빨래터
이혜영
1945년 해방을 하고 육이오사변 전쯤에 서울 도심 근처에 빨래터가 여러 개 있었다.
집에 수도가 있어도 서울고지대는 수돗물을 제한 급수하였고 사람들은 밤에 수돗물을 받아 놨다가 낮에 그것을 사용하곤 했다.
물이 모자란 집은 공동수도에서 줄을 지어 서서 받아다 쓰기도 하였고 물장수가 물 지개의 양쪽 물통 두 개에 물을 가득 담아오면 돈을 주고 사기도 하였다. 서울 사람들은 그렇게 물 항아리 두세 개 정도에 물을 담아 채워두고 쓰곤 했다.
백의민족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그때는 흰색의 무명옷을 입었던 때다. 이부자리도 하얀 면으로 풀을 빳빳이 먹여 덮고 깔았고, 집집마다 칠남매 팔남매 대가족 살림으로 고추장 된장 다 담가 먹었던 때다.
외식이라고는 설렁탕집과 냉면집 정도였고 딸랑이 두부 장수와 밤에 야식용으로 찹쌀떡 메밀묵 정도가 고작인 서울이었다.
지금처럼 세탁기가 따로 없던 때라 주부들은 늘 손빨래를 해야만 했다.
이불 빨래, 밀린 빨래가 어느 집이나 쌓여 있었다.
서울 변두리 정릉, 이화동, 돈암동, 자하문 밖에는 빨래터가 있었다.
한겨울 지나 봄에 꽃이 피면 어머니는 하루를 놀이 삼아 도시락 준비까지 해가지고 이모들과 큰 딸을 데리고 전차를 타고 커다란 빨래보따리를 싸서 빨래터로 갔다.
빨래터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넓적한 돌멩이를 골라 각자가 가지고 온 빨래를 했다. 오육십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서 방망이질을 하면서 빨래를 하다 보니 빨래하기 좋은 곳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자리경쟁을 하기도 했다. 빨래터에는 큰 가마솥이 여기 저기 걸려있었는데 거기서 사람들은 빨래를 양잿물에 삶아주고, 삶아준 양만큼 돈을 받았다.
그때 어머니는 삶아진 빨래를 맑은 물이 나도록 뽀얗게 헹구어 짜서, 넓고 큰 바위를 골라 햇볕에 널어 말렸다.
물이 얼마나 맑고 깨끗했던지 지금도 그 맑은 물이 눈에 아른 거린다.
봄에 가면 들꽃향기가 있고 여름엔 시원하고 가을엔 고추잠자리 날던 어머니를 따라간 그 빨래터.
빨래터에 가자고 어머니가 할 때는 빨래를 가지고 가는 것이 좋지는 않았지만 돌아올 때는 개운해서 그런지 마음이 한결 즐거웠던 그 추억.
어머니를 따라 가고 오던 그때의 빨래터가 지금도 내 기억 속엔 생생하게 남아있다.
2016년 3월
첫댓글 접수했습니다.
좋은 성과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