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왕궁의 전설을 찾아 익산으로 떠나는 인문학기행/전성훈
봄이 오는 길목에서 재개한 무술년 첫 ‘인문학기행’ 장소는 옛 백제 왕궁 터였다고 전해지는 전라북도 익산지역이다. 익산은 나에게 귀하고 좋은 인연을 맺어준 곳이다. 우연히 도봉문화원의 역사문화탐방이라는 멋진 프로그램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처음 참가한 곳이 익산이었다. 봄이 한창 무르익은 2009년 4월 중순 이었다. 그 때 익산의 대지는 화창한 봄날의 햇볕을 듬뿍 받았는지 ‘제국의 꿈’을 잉태한 황토 빛으로 물들었다. 설레는 내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이 얼굴을 간질간질 쓰다듬어 주었다. 차분한 목소리에 맑은 표정을 지으며 유머를 자주 섞어 버스 안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며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수고하셨던 분, 그 분이 도봉문화원 해설사라는 사실을 알고 조금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용기를 내어 인사를 나누었다. 이 자리를 빌려 그 분께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기쁜 마음으로 새벽길을 나서 도봉문화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봄을 재촉하는 하늘의 기운을 느끼며 약 20분 정도 빠르게 걸어 도봉문화원에 도착하였다. 관광버스에는 생각보다 일찍 온 사람들이 자리를 거의 다 차지하였다. 그나마 뒷좌석에 빈자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버스에서 읽으려고 가져간 신문을 꺼내들어 보니 실내등이 어두워서 도저히 신문을 읽을 수 없었다. 별수 없이 신문을 접어 가방에 넣고 눈을 감고 잠을 청하였다. 눈을 감고 있으니까 집에서 손자를 돌보느라 씨름하고 있을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안한 마음이 들자 버스에 몸을 싣고 인문학기행에 나선 자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떠나는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춘곤증이 예년에 비해 일찍 오는 것 같았다. 3월 들어 피로감을 자주 느낀 탓인지 버스가 출발하고 조금 지나서 잠이 들었다. 의자에 등을 대고 쪽 잠을 자는 잠자리가 불편해 중간 중간에 몇 번씩이나 깨어났다. 휴게소에서 봄바람을 쐬면서 기지개를 켜고 목덜미를 좌우로 돌리고 눈동자도 좌우를 굴렸다. 조금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할 즈음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린 버스가 어느 듯 익산에 도착하였다. 먼저 찾은 곳은 익산 보석박물관이다. 익산 인근의 풍부한 백제 문화유적과 보석 생산으로 유명한 익산시를 왕궁테마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보석박물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생뚱맞게 인문학기행에 웬 보석박물관을 찾아가나 했다. 그런데 보석박물관입구에서 코를 자극하는 아주 진한 냄새를 맡으며 생각을 달리했다. 봄철을 맞이하여 화단 가꾸기 작업을 하는 인부들이 보였다. 꽃모종을 커다란 화분에 넣기 전에 퇴비 썩힌 부식토를 화분에 함께 넣고 흙을 뒤집는 일을 하고 있었다. 부식토가 골고루 잘 섞이도록 흙은 뒤집을 때 나는 냄새였다. 부식토 냄새는 자연의 냄새다. 인공적이 아닌, 살아있는 자연의 냄새를 모처럼 맡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살짝 흥분된 기분이 되어 오는 봄을 생각하며 그 모습을 그려보았다.
여인이 치맛자락을 휘감으며 사뿐사뿐 걸을 때마다 날리는 치맛바람처럼 봄바람이 불어온다. 햇볕이 따사롭게 비추고 하늘도 맑아 서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봄이 오는 자연의 향연을 온몸으로 느끼며 봄내음을 만끽하니 기분이 하늘로 날아갈 듯하다.
봄은 아무 값어치를 요구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그냥 찾아온다. 찾아오는 봄을 어떻게 맞이하는 가는 오로지 각자의 몫일뿐이다.
보석박물관을 벗어나 미륵사지를 찾았다. 미륵사지 9층 석탑을 재현한 모조품과 보수작업에 들어간 진품 석탑을 둘러보았다. 보리막걸리 한 잔에 입맛을 돋우고 정갈한 갈치조림과 갈치찌개를 맛보며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에 왕궁리 유적지를 방문하였다.
백제 무왕의 꿈과 염원을 빌었던 미륵사와 왕궁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현지 해설사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의 주인공 ‘서동’으로 알려진 무왕,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은, 당시 수도인 사비(부여)와 이곳 왕궁리(익산)에 두 개의 왕도를 경영하는 큰 꿈을 펼쳐보려고 했었다고 멋진 음색을 가진 여성 해설사는 강조하였다. 일행 중 어느 분이 그토록 귀중한 문화재였다면 왜 당시 사람들이 제대로 보존하고 관리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고 물었고, 또 어떤 분은 신라가 삼국 통일한 게 우리나라의 불운이라고 말했다.
오늘의 시각과 척도를 가지고 천년도 더 지난 과거를 재단하는 것은 오류에 빠지기 쉽다. 어느 특정한 시대는 그때의 시대적 상황과 주변 여건에 따라서 당시 사람들이 결정하고 도모한 결과이다. 그 결과가 지금 사람들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하거나,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잘못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과거의 역사는 과거의 시대를 반영할 뿐이다. 우리의 후손들이 지금 우리가 하는 행위와 결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하고 평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강조한 영국 역사학자 E.H.카아의 명쾌한 명제가 생각난다.
망해버린 왕국의 영화롭던 영광의 빛과 찬란한 색의 형상을 찾을 길 없다. 왕성은 어디로 가고 그 자리에 절이 들어서더니, 그 절집마저 사라져 없어지고 달랑 5층 석탑이 외롭게 저 홀로 서 있다. 잊혀진 왕궁의 흔적을, 초토화된 절집의 웅장함을 그려볼 이야기만 수수께끼로 남겨둔 채 넓디넓은 왕궁리 유적지에는 봄의 소식이 성큼성큼 찾아오고 있다.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해설사가 알려준 곳에서 두 그루의 소나무 사이로 솟아오른 왕궁리 5층 석탑의 소박하고 투박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본다.
지금 이 자리에서 본 것은 그저 눈에 비친 짧은 순간이요 찰나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영원하리라는 생각은 인간의 헛된 욕심이자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불가의 말씀처럼, 제행무상(諸行無常),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와 나, 우리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봄의 소리가 들린다. 텅 빈 허허벌판 왕궁리 유적지에도 뭇 생명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따사로운 봄이 스며들고 있다. (2018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