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靈柩)가 집을 떠나 묘지로 가는 절차.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루기 위해 마을 전체가 동원된다. 그러다보니 장례 뒤에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는 예도 많았다. 여기에 3년 상까지 하게 되면 더더욱 생활형편이 어려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973년에는 가정의례준칙까지 발표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시화와 핵가족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 마을에는 장례를 치를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면서 발인도 많이 변하였다.
시골에서도 상여를 맬 인력이 없어 경운기로 옮긴다. 포크레인을 이용하여 무덤을 만들고 있다. 따라서 상여 행렬은 당연히 없게 되었다. 그리고 무덤을 만드는데 여러 사람이 동원될 필요도 없게 되어 상두꾼, 회 다지기, 「달구질 노래」 등도 점차 잊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발인 중에서 산신제, 평토제가 없어졌다. 여자들도 장지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것도 바뀐 것이다.
실제 발인은 관을 상여나 영구차로 장지에 싣고 가 무덤을 완성하기까지이다. 장지로 가기 위해 영구(靈柩)를 방에서 상여나 영구차에 옮기기 전에 발인제를 올린다. 발인제가 끝나면 상여가 떠난다. 상여는 요령잡이의 지휘에 따라 가게 된다. 행렬의 순서는 네 눈을 가진 탈을 쓴 방상(方相) 2명, 명정(銘旌), 혼백을 실은 가마 즉 영거(靈車), 만장(輓章), 공포(貢布), 상여, 상주, 복인(服人), 친지 순으로 간다.
요령잡이는 상여 바로 앞에서 상여노래를 선창하고, 요령을 흔들어 상두꾼들의 발을 맞추게 한다. 간혹 옛날식으로 하나 요사이는 상여로 운구하지 않아 옛 방식은 찾아볼 수 없다.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면 조문을 받고 지관이 정한 하관(下棺) 시간을 기다린다. 영구를 넣을 광중은 미리 완성해 둔다. 하관할 때가 오면 영구를 상여에서 옮겨 관을 벗기고 공포로 시신을 덮는다. 관이 돌로 만든 것이나 두꺼운 송판에 옻칠을 한 것이면 썩지 않기 때문에 관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묻는다. 그렇지 않을 때는 태운다.
하관을 하면 광중에 틈이 있는 네 귀퉁이를 상제가 석회를 섞은 흙 또는 그냥 흙으로 먼저 메운다. 허리의 왼쪽에 검은색 헝겊(玄), 오른 쪽에 붉은색 헝겊(纁) 즉 현훈(玄纁)을 놓는다. 이를 여단이라 한다. 검은색은 하늘, 붉은색은 땅을 상징하며 만년유택(萬年幽宅)을 뜻한다고 한다.
일꾼들이 흙을 다지며 봉분을 만든다. 묘가 완성되면 성분제를 지내고 이어 평토제를 지낸 다음 혼백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나라의 남서해안 쪽 섬 지방에서는 시신을 초분(草墳)을 하여 육탈(肉脫)을 시킨 뒤 매장한 관습이 최근까지도 있었다. 이처럼 시신을 바로 매장하지 않는 지역이 있듯이 매장을 할 때도 관을 벗기느냐? 그대로 묻느냐? 칠성판을 썼느냐 안 썼느냐? 횟가루를 이용하느냐? 등 차이가 있다.
지역에서는 관을 벗기고 시신을 매장하는데 칠성판을 덮는다고 한다. 이는 가정 형편에 따라 차이가 있다. 집안이 넉넉한 사람은 썩지 않는 석관 또는 옻칠을 한 관을 사용한다. 이 때는 관을 벗기지 않고 그대로 매장한다. 매장 방법에 지역적 차이가 있으나 빈부의 차이도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