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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42
마태복음 7:7-12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6:25-32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며 먹는 것 마실 것 입는 것의 염려는 이방인들의 것이고, 7:1-5에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며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외식하는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거룩한 것을 개와 같은 이방인에게 주지 말고 하늘의 보물과 같은 진주를 돼지와 같은 외식하는 자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하늘의 보물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은 눈에 들보가 박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방인과 외식하는 자들은 자기 눈의 들보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보는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자들에게는 진리가 하나로 주어져도 그것을 땅의 것으로 만들고 혼합하여 산산조각 낸 613개의 율법으로 만들어 그것을 행함으로 복음을 향해 대적하는 모습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 율법의 완성을 은혜로 입은 자는 하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고 하늘의 보물을 거룩한 것으로 알아 말씀이 밟힘을 당하지 않고 찢겨지지 않도록 마음에 품는 자이다.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7-8절). 대부분 기도에 대한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말씀은 6:5-15에서 이미 다 말씀하셨고, 6:33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셨더라도 다시 반복해서 말씀하실 수는 있다. 그러나 갑자기 우리가 무조건 기도로 구하면 받을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문맥상 맞지 않다.
“구하라”의 ‘아이테오’는 ‘요구하다, 구하다’라는 뜻인데 능동태 명령형으로 표현되었고, 근원적으로 자신의 몫으로 어떤 것, 빚진 자에게 채무를 이행해 줄 것을 요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실 것”의 ‘디도미’는 ‘넘겨주다, 부여하다, 수여하다, 선물하다’라는 뜻으로 미래 수동태로 썼다. “찾으라”의 ‘제테오’는 ‘찾다, 갈망하다, 추구하다, 요구하다’라는 뜻으로 능동태 명령형이고, “찾아낼 것”의 ‘휴리스코’는 ‘찾다, 발견하다, 얻다’라는 뜻으로 미래 능동태이다. 발견한다는 것에는 수동의 의미가 들어 있다. “두드리라”의 ‘크루오’는 ‘두드리다, 때리다, 치다’라는 뜻으로 능동태 명령형이고, “열릴 것”의 ‘아노이고’는 ‘열다, 장애물을 제거하다’라는 뜻으로 미래 수동태로 썼다.
그러니까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는 것은 당연하게 주기로 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관계 안에서 구한다는 의미이다. 개와 돼지와 같은 이방인과 외식하는 자들과는 달리 언약 관계에 있기에 하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말씀하신 개와 돼지의 비유 안에 답이 있다. 이 단어들이 같이 쓰인 본문을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크루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아노이고)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결국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는 말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기로 하신 것을 진짜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아들로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드려 열린 것은 하늘의 문이다(계 4:1). 그래서 언약의 완성을 표현하는 것이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는 말씀이다. 언약의 관계 안에서 하늘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되었다는 뜻이고 예수 그리스도 믿음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다.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9-11절). “떡”과 “생선”이 “돌”과 “뱀”이 대조되어 있다. ‘떡과 생선’은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양식이었는데 예수님은 이것으로 5,000명을 먹이심으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자신을 양식으로 넘겨주실 것을 표적으로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돌과 뱀’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자의 모습을 비유한 것으로 비진리를 가리킨다. 제자들이 성전을 자랑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자랑하는 성전은 성전 문자적인 율법의 표상이다. 아버지가 주시는 것은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누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기로 한 “좋은 것”을 “성령”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요한일서 5:6에 보면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라고 성령이 진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에서도 같이 진리의 성령이라고 표현하면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3-14)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들 증언하고 나타내신다고 하셨다. 결국 “좋은 것”이란 ‘아가도스’로 ‘선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문자의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고 곧 이 땅에 진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아버지를 구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구하는 것 역시 아버지이고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진리의 영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는 것이 아버지임을 누차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참고 요 16:23)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그를 : ‘아우토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참고 마 6: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12절). 이 말씀도 흔히 이웃에 대하여 행하여야 할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삶의 원칙이라는 뜻에서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하는데 누가 이렇게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이런 표현 때문에 어쩌면 말씀을 더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이 본문에 대한 설교를 찾아보니 너무도 쉽게 표면적으로만 이해하여 남에게 대접을 잘 받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대접을 잘 해야 한다고 설교한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남편이 남편으로서, 아내가 아내로서, 자녀들이 자녀로서 자신이 그렇게 인격적인 대접을 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상대방을 그렇게 대접해야 한다는 식의 설교들이다. 과연 우리가 이렇게 단순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말씀인가?
본문에서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고 하였다. 율법이요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의 율법서와 선지서에서 말씀하는 내용의 핵심으로서 율법이요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이요 선지자로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렇다면 율법의 완성이 치졸하게 내가 받을 대접을 염두에 두고서 남을 대접해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있는데 이 말은 앞에서 말한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 따른 결과를 본문에서 말씀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 성경에서 “대접”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포이에오’로 ‘되다, 만들다, 창조하다, 행하다’라는 뜻이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무엇이든지 그 남이 되고 싶으면 너희도 그 남이 되어라’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 율법과 선지서의 중심이요 핵심인데 그 핵심적인 일이 바로 ‘그 남이 되고 싶으면 그 남이 되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신 모든 일이 바로 자기 백성의 남이 되어 주신 일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죄인이라 스스로 할 수 없으니까 내가 너희들이 되어 준다는 말씀이고 내가 너희를 이렇게 대접한다는 뜻이다.
대접을 어떻게 하셨는가? 자기 죽음으로 하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이다(막 10:4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예수님이 내가 되고 우리가 되어 율법의 완성을 이루신 것이다. 우리가 눈에 들보가 있어 진리를 보지 못하여 개와 돼지와 같이 진리를 율법의 문자로 만들어 땅에 내동댕이쳐 짓밟는 존재였는데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를 이렇게 대접하셨고 하늘의 보물을 볼 수 있는 자가 되도록 우리의 눈에 박힌 들보를 빼셨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남을 대접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9-13)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새기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란 표현은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3절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혈통이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였다고 표현한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란 믿어진 것을 말한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우리가 그분 안에서 누리게 되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헬, ‘아노이고’) 산상강론을 말씀하심으로 하늘 문을 열어주신 것(헬, ‘아노이고’)에 은혜로 동참 되는 것이다. 세상의 먹고 마시고 입을 것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 그의 왕국과 그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기로 하신 그 아버지 자신, 곧 하늘의 보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구하며 진리의 영에 이끌려 가는 것이고 그것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그것이 하늘 우리 아버지 안에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누리는 자유이다(2025042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