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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若要人重我면 無過我重人이니라
(약요인중아 무과아중인)
만약 남이 나를 중하게 여기기를 바란다면, 내가 남을 중히 여기는데서 더한 것이 없느니라.
⋇ 人重我(인중아) : 남들이 나를 중하게 여김.
⋇ 無過(무과) : 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에서 지나는 것이 없다.
(해설)
서로에 대한 존중을 말함이다.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임금의 총애를 받을 때에는 나중을 생각해야 한다, 라고 한 말처럼 언제 어느 장소이건 자리이건 자신을 낮추고 굽힐 줄 알아야 오래도록 자리를 보전하고 존중을 받는다. 혹자는 이러한 낮춤과 굽힘을 잘못 해석하여 자신이 잘나고 뛰어나기에 그런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언제나 명심 하여야 하는 것은 자신의 잣대로 남을 평가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능력은 정해진 바가 없기에 그것을 평가한다는 자체가 어렵다. 다만, 그가 걸어온 발자취 즉 경력과 그가 행하여 온 업적이나 자라난 환경(가정과 학문 등) 그리고 친분관계 등을 종합하여 신중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흔한 실수를 범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첫인상에 대한 믿음을 과신하는데서 온다. 즉 외모로 모든 것을 유추하는 어리석음을 종종 저지른다. 그래서 요즘에 취업을 위한 성형이 유행을 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천재나 한 분야에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사람의 경우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만을 고집하고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명장이니 장인이니 하며 칭송을 하는 분들도 그 행로를 살펴보면 오직 한 가지 길을 매진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것들에 대한 고민이나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을 희생하면서 오직 목표하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를 고집스럽게 한 눈 팔지 않고 정진하고 추구한 결과이다.
학문도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어려워지기에 겸허해 진다고 한다. 끝이 없는 길이라 하지 않는가. 어디 학문만이 그러할까. 우리 말하는 모든 분야가 그러한데, 조금 알았다고 전부 안 것처럼 교만을 떨고, 안주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동양적 사고에서는 자연 속에 은둔하고, 물질세계를 추구하는 서양적 사고는 세상을 향해 질주한다. 자연을 정복한다는 발상과 자연과 혼연일체로 동화된다는 발상의 차이다. 겸허와 자신감의 차이도 그렇다. 광활하고 무변한 것 같지만 거대한 움직임으로 느끼지 못할 뿐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진화한다. 먼지보다 가벼운 존재이지만 그 우주를 담는 인간의 노력이 바로 하나 되는 것이다. 반면에 새롭고 발전하는 과학문명은 신비에 쌓여 있던 얼굴을 드러내는 사소한 진전일 뿐이다. 극한의 대비를 보이지만 궁극에는 하나로 귀착되리라. 萬事歸一(만사귀일)이라 하지 않는가. 학문함은 자신을 닦고 이를 펴서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인데, 사사로운 욕심이 눈을 가려 사소한 절차나 명분에 얽매어 논쟁을 일삼아 힘을 낭비시키고, 邪說(사설)로 현혹시키며, 偏僻(편벽)의 극치를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조선조의 사색당파에 의한 朋黨(붕당)의 폐해가 어떠한가는 不問可知(불문가지)다.
개인 대 개인의 관계도 그러할진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국가대사에 있어서야 두말할 필요가 없는데, 자신의 이상과 추구하는 가치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반대하고 깔아뭉개는 것을 이기는 것으로 착각하니 어찌 나라가 편안하고 제대로 운영이 될 것인가. 국론이 분열되는 것은 물론 이를 통한 대립은 힘의 낭비와 소모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어 전진과 발전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가 될 뿐이다. 서로를 존중하며 절충점을(최선의 방법) 찾아 합의하는 즉, 대의를 위해 소소한 걸림돌은 과감하게 버리는 결단을 지니고 있을 때 모두가 바라는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여 남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묵살하면 대화는 이루어지기 어렵고, 갈등과 반목만 키울 뿐이다. 존중과 협의는 모두의 의견이 종합되며 모두가 만족할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비록 시간이 걸리고 우여곡절을 겪는 산통도 있지만 인내와 유연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통과 난관이 없는 결과물은 없다. 온갖 모진 어려움을 이겨내고 피우는 꽃이 아름답고 화려하듯이. 우리네 일상사 또한 같다. 상부상조란 말이 있지요. 혼자 살아가는 사회가 아니기에 늘 상대를 존중하고 함께 걸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解語花(해어화)
-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으로 미인을 비유해 이르는 말. -
開元(개원)의 治(치)라는 칭송을 받았던 唐(당)나라 玄宗(현종)은 얼마 뒤 국가 재정의 곤란과 楊貴妃(양귀비)와의 사치한 궁중생활 때문에 정치에 싫증을 내게 되었고, 이 때문에 나라는 어지러워졌다. 양귀비는 본디 현종의 제18왕자인 壽王(수왕)의 비였는데, 현종이 武 惠妃(무혜비)를 잃은 뒤, 양귀비를 보고 그 미모와 재치에 반해 27세인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현종은 그녀에게 함빡 빠져 그 일족을 모두 높은 벼슬에 앉히고,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어느 화창한 날, 太液池(태액지)에 핀 아름다운 연꽃을 바라보다가 현종은 문득 왕비를 가르키며 좌우에 서있는 궁녀들에게(明皇秋八月 太液池有千葉白蓮 數枝盛開 帝與貴戚宴賞焉 左右皆歎 久之帝指貴妃 謂於左右曰 : 명황추팔월 태액지유천엽백련 수지성개 제여귀척연상언 좌우개탄 구지제지귀비 위어좌우왈)“연꽃의 아름다움도 어찌 말을 알아듣는 이 꽃만 하겠느냐(何如此解語花那 : 하여차해어화나).”라고 말했다고 한다.(출전 開元天寶遺事)
牛乳湯(우유탕)
근간에 중국의 “공인일보”는 중국 남경에서 개업한 우유목욕탕에 대해 맹비난을 퍼붓고 있다. 우유업자들이 우유 판로를 확장하고 양귀비의 우유목욕을 현대에 재생시키고 양귀비의 살결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것으로 입탕료는 부인 1인당 우리 돈으로 약 8,000원이다. 중국의 소비수준으로 사치스러운 목욕 값이다. 동 신문은 개방경제에 일확천금한 소수의 졸부들과 부패관리들의 공급을 유용하는 “奇型消費(기형소비)”라 했다.
한나라 武帝(무제)는 자매를 한 궁에 두고 총애했다.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는 언니 飛燕(비연)은 가냘픔을 사랑했고, 아우 合德(합덕)은 살결의 부드러움을 사랑했다. 합덕의 살결이 얼마나 부드러웠던지 溫柔鄕(온유향)이라는 아호로 부르기까지 했다. 그 온유의 비결이 바로 짐승 젖에 젖어 살았기 때문이라 한다.
비연 자매를 질투한 것이 바로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양귀비다. 양귀비는 비대한 편이라 비연처럼 손바닥 위에서 춤출 수는 없어 합덕을 좇아 부드럽고 향내 나는 살결로 현종을 뇌살했다. 별궁인 華淸宮(화청궁)에는 端正樓(단정루)라는 양귀비의 화장을 위한 전용 궁실과 蓮花湯(연화탕)이라는 전용 욕장이 있었다.
바로 당대의 명시인 이백을 불러 자신의 浴身(욕신)을 보이고는 시를 짓게 했다던 바로 그 목욕장이다. 욕조가 사과꽃 모양의 다섯 칸으로 돼 있었는데, 꽃이슬을 모은 花露湯(화로탕), 양젖에 꽃 즙을 섞은 花汁湯(화즙탕), 심향을 푼 沈香湯(심향탕), 용뇌향을 푼 龍腦香湯(용뇌향탕), 그리고 욕신을 환상적으로 보이게 하는 幽光湯(유광탕)이다.
서양에도 우유목욕의 역사는 유구하다. 네로황제의 처 포파에어가 여행을 할 때는 50마리의 나귀를 몰고 가게 마련인데, 그것은 목욕을 위한 젖을 대기 위해서 이였다. 로마 프리니우스의 “박물지”에 보면 상류층 부인 가운데는 하루에 700번이나 나귀 젖으로 얼굴을 씻는다고도 했다.
사치로 소문난 14세기 샤를6세의 비는 나귀 젖 목욕으로 주름살을 없애고 鰐魚糞(악어분), 멧돼지 골, 늑대 피를 섞은 화장품으로 노쇠를 막았다. 19세기 화장 문헌인 “여자다운 아름다움”에서 우유목욕은 오히려 기공을 막아 피부미용에 해롭다고 하고 오로지 지체의 과시에 불과하다고 효용을 부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상류사회의 조건 가운데 하나로 부인들의 우유목욕이 들어 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장 적대해야 할 이 우유목욕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싹텄다는 것은 다각도로 고찰해 볼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이규태 코너 1996년)
17-7. 父不言子之德하고 子不談父之過니라
(부불언자지덕 자불담부지과)
아버지는 아들의 덕을 말하지 말 것이며, 자식은 아버지의 허물을 말하지 아니할지니라.
(해설)
팔불출이라 칭하는 행태를 보면 자기의 친인을 남에게 자랑하는 것을 말하는데(남자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부인과 아이들),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되지 않는 현실이 이를 양산하는 까닭이리라. “잡은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느냐?” 혹은 “자가용 타면서 택시요금을 내느냐?”라고 말하듯이 가장 친절하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냉담하고 거들떠보지 않으면서 타인에게는 과잉친절과 애정을 보이는 사람들을 경계하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자기 얼굴에 금칠한다고 말하는데, 오히려 주위 사람들의 질시 대상이 될 수 있다. 혹자는 부러워하는가 하면 혹자는 사나이로서 너무 경망스럽고 사리분별에 어둡다는 평을 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고향친구들은 서로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기에 우스개로 넘기지만 그렇지 못한 자리에서의 실토는 극히 조심할 사항이다. 친분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희비가 교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 세상에 그 누구보다 속속들이 잘 알 것이다고 믿고 있는 부모와 자식 간에 있어서 오히려 그것이 걸림돌로 작용하는 때가 많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신이 걸어왔던 길의 어려움과 힘들고 괴롭고 피곤함을 알기에 자식에게 물려주기를 꺼려하는 반면에,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행동하였던 것에 대한 친밀도로 부모의 뒤를 이어가는 것을 선호한다. 또한 자식의 타고난 자질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평가하는데 인색하고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자식이 이루어 주기를 희망하여 전혀 맞지도 않는 길을 강요하는 경우도 왕왕 벌어진다. 기한 없는 갈등과 대화의 부재가 시작이 되는 단초가 된다.
자식이 잘 되고 바람직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모든 부모가 바라고 원하는 가장 바람직한 모양새이다. 그러나 사람이기에 작은 마찰과 오해로 인한 갈등과 소원한 관계도 한 때는 유지되기도 한다. 자식들이 성장함에 따른 반항과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고 고집하여 부모가 지향하는 길과 정반대의 가시밭길을 선택하였을 때 긴장도는 정점을 이룬다. 또한 배우자의 선택에 있어서도 순조롭지 못하고 각을 세우게 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극복하여 정상에 우뚝 서는 순간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장한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주위에 칭찬과 흠모의 대한 대처에 신중하여야 한다. 세상인심은 물 같아서 늘 흐르기 마련이며, 커다란 기대치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비판적인 태도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라, 정상에 서면 내려올 수밖에 없으니 이를 명심하여야 한다.
자식은 부모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 들어내지 말아야 함은 당연하지만, 권력이라든가 재물의 매력에 정신을 빼앗겨 종종 이를 넘어서는 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제도적이건 시대적 상황에 의한 불가피하다 항변할 루 있는, 즉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하여야 하는 기로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것이라 해도 이유가 되지 않는다. 순간적인 선택이 아닌 장시간에 걸친 고뇌 끝에 결정하였다 해도 근본적인 가치와 존엄성 그리고 인의에 벗어나기 때문에 지탄을 받게 된다. 지켜야 할 최고의 덕목을 간과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도 그렇고, 자신이 왜 살아가야 하는가의 물음에 답하는데 확신이 없는 상태로 결정을 하였다고 생각되는 까닭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일생을 두고 후회하고 몸부림치는 어리석은 결정은 하지 말아야 한다.
酒池肉林(주지육림)
- 술은 못을 이루고 고기는 숲을 이룬다는 뜻. 굉장한 술잔치를 벌려놓고 호화스럽게 노는 것을 이르는 말. 동류로 肉山酒池(육산주지), 肉山脯林(육산포림) -
夏(하)나라 桀王(걸왕)은 有施氏(유시씨)의 나라에서 공물로 바친 妺喜(말희)라는 희대의 妖女(요녀)에 빠진 나머지, 보석과 상아로 궁전을 짓고 옥으로 꾸민 침대를 만들어 주색에만 빠져 지냈다. 또한, 말희의 청을 받아들여 궁중에 큰 못을 파서 美酒(미주)를 쏟아 붓고 연못가에는 고기를 산더미같이 쌓아 놓았다. 왕은 말희와 함께 술 못(酒池)에서 뱃놀이를 하고, 왕은 말희의 청에 따라 전국에서 모은 3천명의 미소녀들이 못가에서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북소리가 나면 못으로 달려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뜯어먹으며 호사스럽게 놀았다 한다(爲傾宮瑤臺 殫民財 肉山脯林 酒池可以運船 糟堤可以望十里 一鼓而牛飮三千人 妺喜以爲樂 國人大崩 : 위경궁요대 탄민재 육산포림 주지가이운선 조제가이망십리 일고이우음삼천인 말희이위락 국인대붕). 또한, 殷(은)나라의 紂王(주왕)도 有蘇氏(유소씨)의 나라에서 바친 요녀 妲己(달기)에게 빠진 나머지 그녀를 위하여 백성에게서 돈과 비단, 곡식, 진기한 동물과 물건들을 마구 거둬들여 곳간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그리고는 호화찬란한 궁전을 짓고 연못을 파서 술을 붓고 연못가에는 고기를 잔뜩 걸어 놓고는 악사로 하여금 “北里之舞(북리지무)” 따위의 음탕한 노래를 지어 연주하게 하였다. 이러한 어지러운 잔치가 120일이나 밤낮으로 계속되었음으로 이를 “長夜之飮(장야지음)”(積糟爲邱 流酒爲池 懸肉爲林 使人裸形相逐其閑 : 적조위구 유주위지 현육위림 사인나형상축기한)이라고도 한다. 이 두 왕은 여자와 쾌락에 빠졌다가 끝내는 자신과 나라를 망치고 죽었다고 한다.(출전 史記)
※ 脯(포 포), 桀(홰 걸), 妺(여자의 자 말), 瑤(아름다운 옥 요), 殫(다할 탄), 糟(지게미 조), 崩(무너질 붕), 紂(낑거리 끈 주) 妲(여자의 자 달).
與蘇武詩(여소무시) - 李陵(이릉) -
良時不在至(양시부재지) 인생에 있어 좋은 때는 다시 오는 법은 없는데
離別在須臾(이별재수유) 이별은 순간에 이른다.
屛營岐路側(병영기로측) 그대를 갈림길 한쪽에서 서운한 마음으로 보내며
執手野踟躕(집수야지주) 들 가운데서 손을 잡고 머뭇거린다.
仰視浮雲馳(앙시부운치) 고개를 하늘로 들어 구름이 흘러감을 보니
奄忽互相踰(엄홀호상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곧 흘러가 버린다.
風波一失所(풍파일실소) 인간도 저와 같이 한번 풍파를 만나 쫓겨나면
各在天一隅(각재천일우) 각각 멀리 하늘 한구석으로 헤어져 버리고 만다.
長當從以別(장당종이별) 이제 그대하고 오랫동안 여기서 헤어질 생각을 하니
且復立斯須(차복입사수) 또 다시 잠시 주저하게 된다.
欲因晨風發(욕인신풍발) 하다못해 하늘을 나는 새매가 되어서(晨風)
送子以賤軀(송자이천구) 천한 몸이긴 하나 그대를 배웅해 가소 싶구나.
※ 岐(갈림길 기), 踟(머뭇거릴 지), 躕(머뭇거릴 주), 馳(달릴 치), 奄(가릴 엄), 踰(넘을 유), 隅(모퉁이 우). 晨(새벽 신), 軀(몸 구).
18. 言語篇(언어편)
-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혀는 칼이라 했다. 그 만큼 말은 중요하다. 말 한마디가 개인은 물론 한 나라의 흥망까지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다. 따라서 교양과 인격을 갖춘 품격 높은 올바른 언어생활에 힘써야 한다. -
18-1. 劉會曰 言不中理면 不如不信이니라
(유회왈 언부중리 불여불신)
유회가 말하길 “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말하지 아니함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 劉會(유회) : 미상(未詳)임.
⋇ 不中理(부중리) : 이치에 맞지 않음.
(해설)
말의 힘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그 파장이 크다.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려 웃고 울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말은 화를 불러 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양면의 칼날과 같은 말은 잘 쓰면 양약이요, 잘못 쓰면 독약이 된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주위에 친인들까지 해를 미치는가 하면, 하루아침에 철천지원수로 돌변하게 만드는 파괴력을 지닌다. 이처럼 말은 어렵고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입에서 나온 것이 다 말이 될 수는 없다. 이치에 어긋나거나, 남을 해치는 모함과 비하 그리고 궤변은 인간관계의 자연스런 흐름을 역행시켜 허물어 버릴 수 없는 높은 담을 쌓게 만든다. 그래서 법구경 언어품에 “遜言順辭 尊敬於人 棄結忍惡 疾怨自滅 : 손언순사 존경어인 기결인악 질원자멸 - 공손하고 부드러운 말로 공경하여 원함 맺음을 버리고 악을 참는다면 미움과 원망이 저절로 사라진다.”하였습니다.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평상적인 사고를 마비시키는 교묘하고 현란한 말들은 대개 邪敎(사교)나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즉, 虐政(학정)과 收奪(수탈)에 억압받는 백성들을 선동하거나 그들의 불만과 요구를 자극하는데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에 대한 賊反荷杖(적반하장)격인 언어도 같은 맥락이다. 자신의 커다란 과오는 도외시하고 오히려 상대의 작고 하찮은 잘못을 공격하는 행태는 일상에서 자주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며, 특히나 역사에서 보면 한 나라의 말기에 벌어지는 간신들의 득세에서 많이 벌어진다.
바른 말이 힘을 잃고, 올바르지 아니한 말이 힘을 얻게 되면 질서의 파괴는 물론이거니와 도의가 땅에 떨어져 혼란과 불의가 판을 치는 어두운 세상이 도래한다. 어느 것이 바른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사라지며 오직 힘과 무력이 모든 것을 대신하게 되며, 바른 길을 걷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며, 철저하게 원천봉쇄를 당하기에 은둔과 도피 혹은 대항하는 荊棘(형극)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사람의 말은 마음에서 나온다(人之有言 皆出於心 : 인지유언 개출어심. 言亦心之所發 : 언역심지소발 - 孟子)고 하였는데, 어떠한 마음, 즉 바르고 정의로운 마음이냐 아니면 바르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사사로운 욕심)에서 비롯되었는가가 중요하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을 하는 것이냐 또한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일상적인 대화는 뒤끝을 남기지 않지만 인간의 3대 욕망의 달성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될 때는 그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치의 크기에 따라 자신에 닥치는 저항과 난관 그리고 얻게 되는 대가에 따른 희생은 불가피하게 양산될 것이다. 그 중 가장 많은 희생을 요하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피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늘 많은 사람들이 휘말려 원치 않은 희생의 재물이 된다. 한 사람의 야망을 충족 시키는 대가로서. 親姻戚(친인척)은 물론 가장 가까운 친구조차도 비켜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말하길 칼 날 위에서 추는 춤이라 하지 않는가?
말이 천금의 위엄과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늘 자신의 인품을 닦고 진정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배려와 안위를 위하며 진정성을 담아야 하는데 言行一致(언행일치)가 되지 않고는 말이 힘을 얻지 못한다. 또한 누구나 공감하고 마땅하다 여기며 추구하는 이상과 정의와 이치에 맞아야 한다.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기에 늘 신중하고 깊이 생각하여 후회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꾸짖음을 받지 못한 때문(人之易其言也 無責耳矣 : 인지이기언야 무책이의 - 孟子)이라 한다. 주위에 그러한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다면 행복한 삶이 되리라.
欲速不達(욕속부달)
- 일을 속히 하고자 하나 도리어 이루지 못함. -
孔子(공자)의 제자 子夏(자하)가 魯(노)나라의 작은 邑(읍) 筥父(거보)의 읍장이 되자, 어떻게 이 고을을 다스릴까 궁리하다가 스승인 공자에게 정책을 물어 보았다. 그러자 공자는 “정치를 할 때는 공적을 올리려고 고을 일을 너무 급히 서둘러서는 안 된다. 또한 조그만 이득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 공적을 올리려고 일을 급히 서둘러 하다가는 도리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조그만 이득을 탐내다가는 온 세상에 도움이 될 큰일을 이루지 못하는 법이다(無欲速 無見小利 欲速則不達 見小利則大事不成 : 무욕속 무견소리 욕속즉부달 견소리즉대사불성).”라고 가르쳤다고 함.(출전 論語 子路篇) ※ 筥(광주리 거), 父(남자이름 보).
고무신
무궁화는 우리나라 꽃이요, 막걸리는 우리나라 술이며, 빈대떡은 우리나라 떡이듯이 고무신은 우리나라 신이다. 광복 후 우리나라 신발의 85%나 차지했던 그 고무신이 지금 신발시장에서의 점유율이 겨우 1%라는 보도가 있었다. 그나마도 유통되는 고무신의 95%가 중국산 고무신이라 한다. 고무신은 風前燈火(풍전등화)가 아니라 불 꺼진 그대의 창이다. 이렇게 하여 향수의 역사는 章(장)을 넘기고 있다.
인체의 인위적 변형을 연구하여 이름 난 버나드 루도프스키는 시대가 好戰的(호전적)일수록 신발의 폭이 좁아지고 권위주의가 풍미할수록 신발의 굽이 높아진다 했다. 그 실례로 거위처럼 뒤뚱거리는 독일 나치스의 步法(보법)을 든다. 나치스의 군화 폭이 狹幅(협폭)이라 그렇게 뒤뚱거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중세 유럽의 상류계급이나 귀족일수록 그 신발 굽이 높아져 무려 50㎝짜리까지 있었다. 나들이 할 때는 양쪽에서 손을 잡아주어야 걸을 수 있었으니 신발이 아니라 발에 차는 권위주의의 훈장이었다. 프랑스혁명 후 민권사상이 번지면서 굽 높이가 낮아졌으나 유럽에 있어 신발 속의 발의 경사도가 10도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한다. ※ 幅(너비 폭).
이 신발의 논리를 우리나라에 적용시켜 보면 유사 이전부터 우리나라는 厭戰的(염전적)인 평화민족이요, 권위는 선반에 얹어놓고 살았던 평민주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신발을 보나 고구려 고분 벽화의 신발을 보나 廣幅(광폭)인 데는 예외가 없다. 짚신짝 만하다면 널펀하다는 것을 의미했듯이 서민의 신발에서 춘향 어머니가 끌고 나왔던 발막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발가락은 신발 속에서 자유로웠다. 굽도 빗길을 걷기 위한 나막신 빼놓고는 한국 신발문화에서 퇴화된 개념이다.
이 두 한국적 신발의 특성을 조화시켜 만들어 낸 것이 고무신이다. 거기에 북방계의 덮개신과 남방계의 평바닥 신을 절충 융합하여 반 덮개로 한국화한 것도 일품이다. 브라질 원주민이 고무액을 발바닥과 발등에 칠하고 다닌 데서 힌트를 얻은 한 미국여행자가 고무로 비신을 만든 것이 18세기 끝 무렵이요, 이것을 일본이 수입하여 얼마 전에 지진이 났던 고베(神戶 : 신호)에서 비신을 만든 것이 1880년이다.
조선 사람의 정신이 스민 짚신을 본떠 조선 고무신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21년으로 당시 신문광고를 보면 護謨靴(호모화)라 했다. 한말에 미국주재 대리공사를 역임했던 李夏榮(이하영)이 大陸護謨(대륙호모)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무신 공장을 만들었고 純宗(순종)이 그 국산 고무신을 처음으로 사 신은 분이 되었다. ※ 謨(꾀 모), 靴(신 화).
이제 고무신은 사라져가지만 해외문물을 도입할 때 우리 한국의 정신과 풍토적-육체적-문화적 여건에 맞도록 개량하여 도입하는 수용자세의 垂範(수범)으로서 길이 기억되어야 할 고무신이어야 하겠다.(이규태 코너 1995년)
18-2. 一言不中이면 天語無用이니라
(일언부중 천어무용)
한 마디의 말이 맞지 않으면 천 마디 말이 쓸데없느니라.
(해설)
寸鐵殺人(촌철살인)이란 말처럼 한 마디를 하더라도 핵심을 찌르는 말이 있는가 하면 백 마디의 말을 하여도 핵심이 없으면 말을 한 의미조차 없는 시간만 낭비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말이 많아지면 중심이 흩어지면서 앞뒤가 맞지 않는 소위 말하는 횡설수설하는 형태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벌어진다. 자신이 한 말에 자신이 휘말려 버리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뜻을 함축해서 전달하는 방법에 능숙하지 못한 때에 벌어지기 쉬운데, 어떤 경우인가가 중요하다. 즉, 남을 설득하거나 충고를 할 때는 비유와 사례를 섞어서 하여야 효과가 있기에 빙 둘러 말하기에 길어지지만, 보고나 지시를 할 때는 요점만 정리하여 간단하게 할수록 효과가 높다. 그러나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관심분야나 서로의 안부정도로 긴장감 없이, 약간의 과장은 섞이지만 진솔한 사실에 입각한 것들이 주류를 이루기에 뒤끝이 없다. 다만, 제3자에 대한 비판이나 좋지 않은 평판 등에 대한 것들은 나중에 되돌아 올수 있는 여지가 있어 후유증이 남을 수 있기에 신중하여야 한다. 평소에도 유머나 재치가 뛰어난 사람들의 말은 그러려니 하며 가볍게 흘려듣고 말지만, 진중하고 말이 없는 사람의 한 마디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파급효과가 크다. 眞否(진부)를 떠나 믿음이란 신뢰 때문에 확고한 이미지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과장과 허풍이 심하고 가볍게 말하는 자의 이야기는 사실이건 아니건 귓등으로 흘러버리는 경향이 많다. 말에 가치도 그 사람의 가치에 따라 그 무게와 확신의 차이는 천차만별이 된다.
“한 마디의 거짓말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열 마디의 거짓말을 양산한다.”는 말처럼 한번 잘못하여 신뢰를 잃게 되면 그것을 회복시키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듯이, 잘못된 말을 자꾸 변명하거나 덮어버리려 하면 할수록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신용은 하루아침에 쌓아지는 것이 아니고 변함없이 행동하고 말하고 실천하는데서 생겨나는 특성을 지닌다. 우리가 하는 말 또한 같다. 말도 사람마다 특이한 개성을 지닌다. 어눌하고, 속사포처럼 빠르며, 나긋나긋한가 하면 굵직하고 걸쭉한가 하면 쇠를 긁는 거북한 소리도 있고, 메아리처럼 울림이 있는가 하면, 봄바람처럼 졸린 소리와 푸른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처럼 맑고 청량한 소리도 있다.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하는 말인가에 따라 그 강약과 고저 그리고 빠르고 느리며 뜸을 들이기도 한다. 타고난 목소리라 하지만 어느 정도는 노력에 의해 변화가 가능하다. 명창들처럼 목에 피가 나도록 연습하고 연습하면 득음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너무 무리를 하면 오히려 목소리를 잃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목소리에 따른 매력과 설득력도 무시할 수 없지만, 거북하고 어눌한 언변이라 할지라도 말에 실린 진정성과 그 사람이 지닌 인격만큼은 전혀 지장을 주지 않으리라. 그래서 법구경 언어품에 “言使投意可 亦令得歡喜 不使至惡意 出言衆悉可 : 언사투의가 역령득환희 불사지악의 출언중실가 - 말을 남의 뜻에 맞게 하고 또 기쁨을 얻게 하며 악의에 이르지 않게 한다면 말이 많아도 모두 좋다.”고 하였습니다. ※ 悉(다 실).
말의 전파속도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빠른 속성을 보이기에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先人(선인)들은 경계하지 않았는가. 유명한 인사라든지,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방이나 헐뜯는 이야기는 미화되는 것보다 더 빠르게 확산된다. 사실을 확인하는 것을 떠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각자의 생각이 보태지면서 부풀려지며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던진다. 그래서 오해소지가 있는 행동이나 말 한 마디도 깊은 思慮(사려)가 필요한 것이다.
孟子(맹자)께서 말할 때 예의를 비방하는 것을 自暴(자포)이라 하고, 몸은 仁(인)에 거하고 義(의)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을 自棄(자기)라 하였다(言非禮義 謂之自暴者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 : 언비예의 위지자포자 오신불능거인유의 위지자기야). 명심할 내용이 아닐 수 없다.
能書不擇筆(능서불택필)
- 글씨를 잘 쓰는 이는 붓을 가리지 않음. -
당나라 때 書道(서도)의 대가 褚遂良(저수량)은 평소 좋은 붓과 먹이 없으면 글씨를 쓰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수량이 서도의 대가 虞世南(우세남)에게 “내 글씨와 歐陽詢(구양순)의 글씨를 비교하면 누가 더 나은가?”하고 물었다. 이에 우세남은 “순은 종이와 붓에 대하여는 전혀 말이 없고, 아무 종이에나 글씨를 썼다(紙筆不擇 : 지필불택)고 하며 어떤 붓으로도 마음먹은 대로 쓸 수 있었다 한다. 그대는 아직 종이와 붓에 구애받고 있으니 순을 따를 수 없다(吾聞詢 不擇紙筆 皆得如志 君豈得此 : 오문순 불택지필 개득여지 군개득차 ).”고 말했다고 한다.(출전 唐書 歐陽詢傳) ※ 褚(솜옷 저), 詢(물을 순).
歸去來辭(귀거래사) - 陶淵明(도연명) -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奚惆愴而獨悲 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實迷塗其未遠 覺今是而昨非 舟搖搖以輕颺 風飄飄而吹衣 問征夫以前路 恨晨光之熹微 乃瞻衡宇 載欣載奔 僮僕歡迎 稚子候門 三徑就荒 松菊猶存 㩦幼入室 有酒盈樽 引壺觴以自酌 眄庭柯以怡顔 倚南牕以寄傲 審容膝之易安 園日涉以成趣 門雖設而相關 策扶老以流憩 時矯首而游觀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景翳翳以將入 撫孤松而盤桓 歸去來兮 請息交以絶游 世與我以相遺 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農人告余以春及 將有事于西疇 或命巾車 或棹孤舟 旣窈窕以尋壑 亦崎嶇而經丘 木欣欣以向榮 泉涓涓而始流 善萬物之得時 感吾生之行休 已矣乎 寓形宇內 復幾時 曷不委心任去留 胡爲乎遑遑欲何之 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懷良辰以孤往 或植杖而耘耔 登東皋以舒嘯 臨淸流而賦詩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矣 : 귀거래혜 전원장무호불귀 기자이심위형역 해추창이독비 오이왕지불간 지래자지가추 실미도기미원 각금시이작비 주요요이경양 풍표표이취의 문정부이전로 한신광지희미 내첨형우 재흔재분 동복환영 치자후문 삼경취황 송국유존 휴유입실 유주영준 인호상이자작 면정가이이안 의남창이기오 심용슬지이안 원일섭이성취 문수설이상관 책부노이류게 시교수이유관 운무심이출수 조권비이지환 경예예이장입 무고송이반환 귀거래혜 청식교이절유 세여아이상유 복가언혜언구 열친척지정화 낙금서이소우 농인고여이춘급 장유사우서주 혹명건차 혹도고주 기요조이심학 역기구이경구 목흔흔이향영 천연연이시류 선만물지득시 감오생지행휴 이의호 우형우내 복기시 갈불위심임거류 호위호황황욕하지 부귀비오원 제향불가기 회량진이고왕 혹식장이운자 등동고이서소 임청류이부시 요승화이귀진 낙부천명복해의.”
- 자, 돌아가자 전원이 장차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 이미 스스로 마음으로써 형의 사역이 되니, 어찌 惆悵(추창 : 한탄하고 슬퍼함)하여 홀로 슬퍼하랴. 이미 간하지 못할 것임을 깨달고 來者(내자)를 따를 수 있음을 알았다. 실로 길은 헤매되 그 아직 멀지 않았나니, 지금은 옳으나 어제는 틀렸음을 깨달았다.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바람에 흔들리고, 바람은 펄럭펄럭 옷자락을 날린다. 나그네에게 前路(전로)를 물었고, 새벽빛(晨光)의 희미함을 한했다. 이에 衡宇(형우 : 대문과 처마)를 보고 기뻐하며 달려 들어갔다. 동복이 반가이 맞아주고 아이들은 문에서 기다렸다. 三徑(삼경 : 마당에 난 세 갈래 길)은 荒蕪(황무 : 거칠고 풀 우거진)에 나 있었으나 松菊(송국)은 아직 있었다. 어린 것을 이끌고 방에 들어오니, 술이 단지에 가득하다. 단지와 술잔을 끌어 술을 마시고 마당의 나뭇가지를 보고 안색을 기쁘게 하였다. 남창에 기대어 奇傲(기오 : 거리낌 없이 자유스러움)하면서 무릎만 들어가는 좁은 곳에서도 편안히 있기 쉬움을 알았다. 날마다 정원을 거닐며 멋을 이루고 대문은 있으나 늘 닫혀 있다. 지팡이에 늙은 몸을 기대어 아무 곳에서나 休憩(휴게)하고, 때로 머리를 들어 마음대로 바라본다. 구름은 무심하여 산봉우리에서 나오고, 새는 날기에 지쳐 돌아옴을 알더라. 햇빛은 어둑어둑하여 장차 지려 하면서 孤松(고송)을 어루만지며 서성인다. 자, 돌아가자, 청컨대 사귐을 그만두어 교유를 끊기를, 세상과 나는 서로 잊으리니, 다시 수레를 타고 무엇을 구하랴. 친척과의 정겨운 대화를 기뻐하고, 琴書(금서)를 즐겨하여 근심을 없애리라.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음을 고하니, 장차 西疇(서주 : 서쪽의 전답)에 일이 있으리라. 혹은 巾車(건거 : 수건 씌운 수레)에 명하고 혹은 孤舟(고주)를 저으면서, 이미 구불구불 구부러져 있는 깊은 골짜기를 찾고, 또한 崎嶇(기구 : 험한 것)한 언덕을 지나노라. 나무는 기쁜 듯이 번영으로 향하고 샘물은 涓涓(연연 : 샘물 솟는 모양)히 비로소 흐른다. 만물이 때를 얻었음을 기뻐하면서 나의 생이 장차 쉴 것임을 느꼈노라. 끝났구나. 형체를 세상에 붙임이 다시 몇 때이랴. 어찌 마음대로 하여 去留(거류 : 가고 머무는)를 맡기지 않는가. 어찌 遑遑(황황 : 바쁜 모양)히 어디론가 가려 하는가. 부귀는 나의 소원이 아니며, 帝鄕(제향 : 신선의 나라)은 기약할 수 없도다. 좋은 시절을 생각하며 홀로 가서, 지팡이를 세우고 김매고 培土(배토)하여 주었다. 동쪽 언덕에 올라 천천히 휘파람을 불고 淸流(청류)에 임하여 시를 짓는다. 얼마 동안 자연의 변화에 따르다 돌아가리니, 천명을 즐기면 그만이지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출전 古文眞寶)
※ 蕪(잡초 우거질 무), 惆(실심할, 한탄할 추), 愴(슬퍼할 창), 颺(날릴 양), 飄(회오리바람 표), 吹(불 취), 征夫(정부) : 나그네, 瞻(볼 첨), 僮(아이, 하인 동), 㩦(끌 휴 : 攜와 동자), 壺(병, 단지 호), 眄(애꾸눈 면), 怡(기쁠 이), 倚(의지할 의), 牕(창 창 : 窗과 동자, 원자는 窓), 岫(산굴 수), 景(햇빛 경), 翳(일산 예), 桓(푯말 환), 疇(밭두둑, 밭 경계 주), 崎(험할 기), 嶇(험할 구), 涓(시내 연), 曷(어찌 갈), 遑(허둥거릴 황), 耘(김 맬 운), 耔(북돋을 자), 皋(언덕 고, : 皐와 동자), 嘯(휘파람 불 소), 聊(귀 기울, 의지할 료).
자료출처-http://cafe.daum.net/sungho52
박광순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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