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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 권력이라는 요소를 무시하는 것은 도덕을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치명적이다.”
- E. H. 카, 『20년의 위기』, 1939년.
11. 라인강의 진군
1936년 3월 7일 토요일 아침, 케 도르세의 전신실에는 베를린, 스트라스부르, 브뤼셀, 런던, 프라하에서 온 전문들이 잇달아 도착했습니다. 문장들은 아직 조심스러웠지만 결론은 분명했습니다. 독일군이 라인란트에 진입했습니다.
로카르노 조약은 독일의 서부 국경과 라인란트 비무장화를 영국과 이탈리아의 보증 아래 고정한 전후 유럽 안보체제의 핵심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체제는 처음부터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독일은 프랑스와 벨기에에 대한 서부 국경은 승인했지만,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향한 동부 국경에는 같은 수준의 보증을 주지 않았습니다. 루이 바르투가 구상했던 동방조약과, 그 뒤를 이은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 및 소련-체코슬로바키아 상호원조조약은 이 약점을 보완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독일의 라인란트 진주는 단순한 서부 국경 문제가 아니라, 프랑스가 동유럽 안보망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오전 8시 30분, 외무장관 집무실 옆 소회의실에 긴급대응회의가 열렸습니다. 조제프 폴봉쿠르는 각료회의 의장이자 외무장관으로서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총선은 끝났고 인민전선은 승리했지만, 아직 인민전선 내각은 출범하지 않았습니다. 폴봉쿠르 내각은 정권을 넘겨야 할 임시내각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스페인에서는 내전이 발발했고, 독일은 그 틈을 찔렀습니다.
회의장에는 베를린의 긴급전문, 외무부 법률국 메모, 군 정보보고가 놓여 있었습니다. 독일은 프랑스-소련 조약이 로카르노 정신을 훼손했기 때문에 라인란트 진주는 독일 주권의 회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외무부 법률국은 독일의 행동을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의 중대한 위반으로 판단했습니다. 군 정보보고는 독일군 규모가 아직 제한적이지만 SA, SS, 경찰, 노동봉사대의 동향은 불확실하다고 보았습니다.
폴봉쿠르는 독일의 조약 위반이 명백하다는 점을 전제로, 프랑스가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베를린, 런던, 브뤼셀, 프라하에 보여줄 수 있는지를 회의의 핵심 질문으로 제시했습니다. 루이 모랭 전쟁장관은 제한적 군사시위라는 말 자체가 정치의 언어일 뿐 군사적으로는 성립하기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알렉시 레제 외무부 사무총장은 영국 없는 프랑스의 행동이 조약 집행이 아니라 고립으로 보일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르네 마시글리는 런던만 바라본다면 프라하와 바르샤바가 사라진다고 반박했습니다.
장 뒤퐁 해군차관은 먼저 용어의 문제를 검토했습니다. 그는 독일의 행동이 공화국의 위신을 건드리고 독일이 다시 대전쟁을 준비한다는 신호일 수 있으므로 침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여지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영국, 소련, 폴란드의 반응을 살핀 결과, 그 단어가 프랑스의 외교적 공간을 좁힐 수 있다는 점도 확인했습니다. 소련은 강한 규정을 반길 것이고 폴란드도 프랑스의 대독 강경 의지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었지만, 영국 외무성 주류는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을 조약 위반으로 보더라도 군사적 대응이 필요한 침략으로까지 보지는 않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폴봉쿠르는 독일의 행위를 로카르노 조약과 전후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무력도발행위로 규정하는 쪽으로 용어를 조정했습니다. 모리스 가믈랭 육군참모총장은 강한 외교적 수사를 사용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실제 조치와 준비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프랑스 육군은 평시 약 25개 사단, 39만 명 규모였고, 독일은 약 36개 불완전 사단, 50만에서 55만 명 규모로 추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총동원령이 내려질 경우 프랑스는 400만에서 500만 명 규모까지 병력을 확대할 수 있었고, 완편사단 수도 100개에 육박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힘은 시간과 정치적 의지에 달려 있었습니다.
레옹 드 클레르퐁은 코민테른과 모스크바의 입장을 파악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독일이 베르사유와 로카르노의 의무를 일방적으로 파괴했으며, 국제연맹과 로카르노 보장국이 즉시 행동해야 한다는 입장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련도 프랑스가 먼저 강경하게 움직이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붉은 군대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폴란드와 루마니아의 협력 없이는 독일에 대한 직접 군사행동이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장 뒤퐁은 해군의 입장도 확인했습니다.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은 영국과 공동행동하지 않는 군사행동은 해군 측면에서 위험하다고 보았습니다. 스페인 내전과 이탈리아의 움직임 때문에 툴롱의 지중해 함대는 묶일 수밖에 없고, 브레스트의 대서양 함대만으로 독일의 유보트와 도이칠란트급 장갑순양함을 상대해야 할 수 있었습니다. 덩케르크급 고속전함은 아직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장은 영국이 프랑스의 강경대응을 공개적으로 뒷받침할 가능성은 낮지만, 지중해와 대서양의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일정한 정보협조나 해상견제는 가능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회의는 곧 강경론과 신중론 사이에서 흔들렸습니다. 레옹은 독일의 행동에 무력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라인란트 진입까지 검토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레제는 그것이 프랑스 청년들을 다시 참호로 몰아넣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마시글리는 동유럽 집단안보체제를 작동시키는 것은 중요하지만, 전쟁은 말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피에르 코트 항공차관은 독일이 모험주의적 외교의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점에서 레옹의 문제의식에 동의했지만, 라인란트 폭격 제안에는 반대했습니다. 폭격은 경고가 아니라 전쟁의 시작이며, 독일군만이 아니라 자르와 라인란트의 민간인 및 반나치 인사들까지 희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 뒤퐁은 산업적 관점에서 다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프랑스는 경기침체, 투자부진, 실업, 산업 유휴, 디플레이션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대규모 국방 발주는 경제를 자극할 수 있었고, 전쟁 준비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인프라와 공장은 민간 부문에도 쓰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자체는 물가상승, 국채발행, 자본도피, 민주주의 훼손, 노동갈등, 사회적 히스테리를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결론은 분명했습니다. 전쟁 준비는 프랑스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실제 전쟁은 프랑스를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논의는 자르 문제로 이동했습니다. 폴봉쿠르는 1935년 자르 주민투표에서 독일 즉시 복귀를 거부한 상당수 유권자와 그 뒤 탄압받은 반나치 세력의 존재를 떠올렸습니다. 그는 라인란트 재진주에 대한 조약상 대응조치로 자르에 대한 일시적 군사조치를 검토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모랭은 상황이 결국 격상될 것이므로 동원 준비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장은 전쟁 준비가 공화국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자르 일시 진입은 전쟁을 실제로 일으키지 않으면서 독일을 압박할 수 있는 방안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마르셀 포쿠아는 폭격과 무한한 대기를 모두 거부하는 절충안을 제시했습니다. 독일에 라인란트 증원 중지와 원상복귀를 요구하고 답변시한을 명시할 것, 영국과 벨기에 등 로카르노 당사국의 긴급회의를 요청할 것, 독일이 거부할 경우 철수를 강제하기 위한 군사적 요구조건을 확인할 것이라는 안이었습니다. 레제는 24시간 내 답변 요구와 로카르노 당사국 긴급회의 소집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마시글리는 철수 강제를 위한 군사적 요구조건이 자르 재진입이라면 독일에게 실제로 아픈 타격이 될 수 있지만, 독일이 끝까지 갈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레옹은 자르 일시점령과 동원, 전시경제 준비를 함께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코트는 전쟁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지만, 독일의 실존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자르 재진입, 국제연맹 중재 시도, 군수산업 재건에는 찬성했습니다.
장 뒤퐁은 URI와 중도우파의 반응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독일의 행동이 로카르노와 베르사유의 중대한 위반이라는 점, 영국 및 벨기에와 긴급대응회의를 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자르 재점령은 위험한 도박으로 보았습니다. 피에르에티엔 플랑댕은 독일의 위협이 중대하더라도, 프랑스가 전쟁을 기정사실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폴봉쿠르는 이에 대해 상원의 저항은 이후의 문제이며, 초기 대응에는 우선 행동 방향을 확정해야 한다고 정리했습니다.
레옹은 별도로 모스크바, 바르샤바, 프라하의 반응을 조사했습니다. 모스크바는 자르 재진입 카드를 원하지만 공개적으로는 국제연맹을 통한 해결을 말할 것이었습니다. 프라하는 국제연맹 절차보다 프랑스가 실제 행동 의지를 보이는지를 중요하게 볼 것이었습니다. 바르샤바는 프랑스의 강경함 자체는 긍정적으로 보겠지만, 소련과 연계된 강경책은 경계할 것이었습니다. 레옹은 공개적으로는 동유럽이 프랑스의 강경 의지를 원하고 있으며, 자르 재진입이 프랑스에 대한 신뢰를 높일 것이라고 보고했습니다.
폴봉쿠르는 최종적으로 방침을 정리했습니다. 독일에 라인란트 즉각 철수와 라인-자르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연맹 조사단 수락을 요구하고, 24시간 내 답변할 것을 조건화하기로 했습니다. 동부 방위태세를 점검하고 동원령 발동 전 준비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영국, 벨기에, 이탈리아와 긴급협의를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24시간 이내에는 영국과 벨기에와 협의해 로카르노 당사국의 단일한 안을 마련하고, 동시에 자르 국경 병력을 증강하기로 했습니다. 독일이 거부하고 통합안 도출에 실패할 경우에는 자르에 대한 군사적 진입을 실제로 검토해 실행하기로 했습니다. 프랑스는 합법적 틀 안에 남되, 그 합법성에 끌려가지는 않는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이탈리아는 협의 참석을 거절했습니다. 이탈리아는 라인란트가 독일의 주권영토라는 점을 앞세웠고, 로카르노 조약과 베르사유 조약의 규정보다 주권국가의 영토권이 우선한다는 논리로 프랑스, 영국, 벨기에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3월 7일 저녁 5시, 프랑스, 영국, 벨기에 대표단은 런던 화이트홀 외무성 청사에 모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폴봉쿠르, 레제, 마시글리, 가믈랭, 조르주 뒤랑비엘이 참석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앤서니 이든, 로버트 밴시타트, 모리스 행키, 아치볼드 몽고메리매싱버드, 언리 챗필드가 참석했습니다. 벨기에에서는 폴 반 젤란트, 페르낭 반 랑엔호베, 에밀 드 카르티에 드 마르시엔, 에두아르 반덴베르겐, 조르주 드퐁텐이 참석했습니다.
회의는 실질적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대표단은 독일의 조치가 유럽 평화와 조약체제에 중대한 우려를 야기했음을 확인하고, 로카르노 조약의 중요성과 국제연맹 절차 활용, 외교적 접촉 지속, 정보교환, 모든 관계국의 자제를 강조하는 공동선언만 발표했습니다. 독일에 대한 강제조치도, 명확한 시한도, 군사적 보장조치도 담기지 않았습니다. 파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3월 9일 새벽 5시 30분경, 앙리 지로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1개 군단이 자르 국경을 넘었습니다. 예하 3개 보병사단과 군단 직할 포병, 공병, 기병, 헌병연대를 합쳐 약 54,000명 규모였습니다. 이들은 실질적 군사작전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독일군 국경경찰을 제압하고, 자르브뤼켄 시내에서 SA, SS, 당원 방위대와 충돌했습니다.
샤를 드골 중령이 이끄는 메스 작전군단 직할 차량보병연대는 빠른 기동으로 자르브뤼켄으로 향하는 독일군 증원로를 차단했습니다. 이 부대는 국방군 제34사단을 8시간 동안 지연시켰고, 프랑스군 제9사단이 합류하자 제34사단장 에리히 뤼트케 소장은 후퇴했습니다. 하인츠 구데리안 대령의 기갑전투집단은 프랑스군 병력을 우회해 자르브뤼켄 가까이 접근했지만, 상부의 강한 후퇴 명령을 받고 물러났습니다. 프랑스군은 자르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했지만, 자르의 절반은 프랑스군 관리지역이 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자르 진입 소식은 베를린에 즉각적인 충격을 주었습니다. 히틀러는 격노했고, 괴벨스는 이것을 독일민족 전체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며 강경 대응을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전쟁장관과 베르너 폰 프리치 육군총사령관은 그렇게 하려면 지금 프랑스와 전쟁해야 한다며 반대했습니다. 루트비히 베크 육군참모총장은 군이 그 작전을 승인할 수 없다는 더 도전적인 입장을 냈습니다.
노이라트 외무장관과 샤흐트 경제장관 겸 라이히스방크 총재 등 나치당 핵심을 제외한 내각 대부분도 확전에 반대했습니다. 괴링은 겉으로는 강경론에 동참했지만, 프랑스가 이미 외교적 고립을 자처했으므로 독일 청년의 목숨을 소모하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는 식으로 퇴로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자르 탈환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음날 블롬베르크, 프리치, 베크가 사임했습니다. 히틀러는 발터 폰 라이헤나우를 국방군 최고위직에 앉히려 했지만, 친나치 장성들마저 주저했습니다. 그들은 군이 독일민족의 부흥을 위해 사용되기를 바랐지, 제2의 돌격대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현장 지휘관들의 판단, 곧 군사적 대치는 유지하되 즉시 항전하지는 않는 방어적 대응이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국방군은 사태를 안정화시켰다고 보고했고, 노이라트는 영국과 접촉하여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이길 수 있다는 논리로 사실상 자르 탈환 명령의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3월 11일, 히틀러는 국방군의 제안을 수용했습니다. 자르는 총성 없는 대치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이 사태는 곧 유럽 전체로 번졌습니다.
영국은 프랑스의 단독 군사행동에 격앙된 반응을 보였습니다. 외무성 국제연맹국 부국장 에드워드 카는 영국이 유럽 대륙을 전쟁으로 몰고 가는 특정 세력이 과연 독일인지 재고해야 한다는 취지의 내부 문건을 회람했습니다. 이른바 카 노트였습니다. 대독 강경책을 마지막까지 밀었던 로버트 밴시타트 사무차관도 프랑스가 과도한 조치를 취했다고 보며 한 발 물러섰습니다. 스탠리 볼드윈 총리는 영국이 자르 문제에 대한 중재를 담당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영국은 대독포위망의 구성원이 아니라 중립적 중재자의 위치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영불협력은 지속되겠지만, 독일 위협에 맞선 공동전선은 지속되기 어려워졌습니다.
소련은 프랑스의 자르 진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독일을 강하게 비난함으로써 사실상 프랑스를 지지했습니다. 스탈린은 친프랑스 외교의 핵심인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인민위원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격상시켰습니다. 이는 프랑스에 대한 신뢰 표시였습니다. 소련은 인민전선이 승리한 프랑스를 혁명의 동지로 본 것이 아니라, 제2의 러불동맹에 가까운 대국외교의 파트너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군이 실제로 자르에 진입한 사실을 중요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주프랑스 체코 대사는 프랑스가 행동했다는 사실 자체가 동유럽에서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고 비공식적으로 감사를 표했고, 유럽 안보질서에서 프랑스와 공동행동하겠다는 뜻을 공식화했습니다. 주데텐독일인당은 독일군이 프랑스의 위협을 격퇴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국방군이 수비적으로 나오자 당황했습니다. 프라하는 그 행동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폴란드는 공개적으로는 평화적 해결을 모색한다는 중립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프랑스 쪽으로 다시 기울어진 행동양식을 보였습니다. 유제프 벡 외무장관은 프랑스에 기울어진 중립으로 정책기조를 수정하면서도, 소련과의 협력은 거부했습니다. 자르 위기 국면에서 그는 테센-자올지에 문제에 대한 외교협의를 재시작하자는 메시지를 냈습니다. 이는 폴란드가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과 연계해 친불, 반소, 동유럽 소국 결속의 길을 다시 모색하려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탈리아는 겉으로는 독일을 지지했지만, 더 중요한 현안은 에티오피아였습니다. 자르 위기 국면에서 에티오피아에는 더 많은 병력이 투입되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이미 사용하던 독가스를 더 전면적으로 사용했고, 아디스아바바 공략에서도 더욱 무자비한 모습을 보이며 더 이른 승리의 문턱에 다가섰습니다. 이는 이탈리아가 스페인에 조금 더 일찍 개입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국내정치도 흔들렸습니다. 폴봉쿠르 내각이 실제로 강경하게 행동하자 URI 및 중도우파 장관들은 일제히 사직했습니다. 카미유 쇼탕과 피에르에티엔 플랑댕은 좌파가 대독 강경론을 핑계로 전시통제를 시작하려 한다며 반인민전선 선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파가 단일하게 결집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원 내 우파 최대세력이 된 PSF의 조르주 망델은 자르 점령이 오히려 너무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했습니다. 폴 레노도 라인란트에 독일 군사비행장과 주둔지가 들어오는 것을 묵인하는 것은 장차 독일군의 파리 입성을 묵인하는 길이라고 쇼탕과 플랑댕을 비판했습니다.
PCF는 공화국을 파시즘으로부터 방위하는 것이 곧 혁명을 방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내각의 조치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며, 그 노선이 향후 수립될 좌파 내각에서도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와중에 알베르 르브룅 대통령은 자르, 라인, 스페인, 국내 경제 혼란을 이유로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폴봉쿠르에게 내각을 통할할 권한을 계속 부여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선언은 곧바로 SFIO와 PCF를 흔들었습니다. 프랑스는 자르에서 독일을 멈춰 세웠지만, 그 순간 공화국 내부의 헌정질서도 다시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12. 엘리제를 위하여
앙리 지로 중장이 자르브뤼켄에 입성한 지 2주가 지난 1936년 3월 24일 화요일, 파리 정계는 알베르 르브룅 대통령의 유임 선언으로 다시 흔들렸습니다. 대통령은 자르와 라인, 스페인, 국내 경제 혼란을 이유로 조제프 폴봉쿠르 총리에게 내각 통할권을 계속 부여할 뜻을 밝혔습니다. 표면상으로는 국가위기 속 행정 연속성을 보장하겠다는 조치였지만, 실제 정치적 의미는 훨씬 컸습니다. 선거에서 승리한 인민전선과 원내 제1당 SFIO의 총리 후보 레옹 블룸을 우회하고, 이미 임시관리 성격을 띠던 폴봉쿠르 내각을 대통령의 판단으로 연장하려는 시도였기 때문입니다.
중도우파는 이 선언 앞에서 혼란에 빠졌습니다. 플랑댕과 쇼탕은 그동안 폴봉쿠르 내각의 대독 강경책을 비난해왔기 때문에 유임을 지지하기 어려웠고, 그렇다고 블룸의 총리 임명을 인정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공화연맹의 루이 마랭은 독일과의 전쟁위기를 이유로 강력한 우파 중심 국민통합정부를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은 오히려 우파 내부의 균열을 드러냈습니다. 반독 우파의 폴 레노는 폴봉쿠르의 자르 대응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르브룅의 유임선언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SFIO, PCF, PUP는 대통령의 선언을 의회공화국의 관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1877년 마크마옹 위기와 1924년 밀랑 대통령 사임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대통령이 총선 결과를 시험하거나 분할하고, 하원 다수파의 정부구성을 지연시키는 것은 공화국 대통령의 중립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문제는 PRRS와 RSR 내부였습니다. 폴봉쿠르는 자르 위기를 실제로 관리한 총리였고,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모두와 대화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유임은 르브룅의 정치적 술수처럼 보였지만, 국가위기라는 명분 또한 완전히 허구는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 르아브르와 불로뉴비양쿠르에서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르아브르의 항공기 공장, 조선소, 정유·항만 시설 일부에서 연쇄 공장점거가 발생했고, 불로뉴비양쿠르의 르노 공장에서도 노동자들이 자체적으로 총파업을 선언했습니다. CGT 중앙은 사태의 정확한 범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동조합 중앙이 지시한 계획적 총파업이 아니라, 현장에서 먼저 터져 나온 정치적 행동이었습니다.
미셸 부스케는 이 사태의 성격을 먼저 확인했습니다. 파업은 단순한 처우개선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노동시간 단축, 임금, 유급휴가, 노동환경 개선 같은 요구는 배경으로 남아 있었지만, 전면에 나온 것은 선거결과의 좌절이었습니다. 우파와 중도정부는 그동안 노동권 확대와 작업장 개혁을 계속 막아왔고, 노동자들은 인민전선 승리로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르브룅이 블룸 총리 임명을 우회하는 듯한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노동자들이 느낀 것은 임금이나 휴가에 대한 불만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투표로 만들어낸 정치적 결과가 또다시 연기된다는 좌절감이었습니다.
루이앙리 콩티브리삭은 PUP와 노동조합 인맥을 동원하여 파업 규모를 확인했습니다. 르노 비양쿠르에서는 약 2만 5천 명에서 3만 명, 르아브르 조선·금속공업에서는 약 7천 명에서 1만 1천 명, 르아브르 정유·항만·창고·부두 주변에서는 약 8천 명에서 1만 5천 명이 직접 행동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파리 교외의 항공·금속·자동차 관련 공장에서도 1만 명대의 동조파업이 이어졌고, 루앙 등 센강 하류지역에서도 수천 명 규모의 동조 움직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직접 참가자는 대략 6만에서 8만 명 수준이었지만, 문제는 숫자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르노 비양쿠르와 르아브르라는 상징적·전략적 산업지대에서 먼저 움직였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현장 분위기가 방치될 경우 하루 이틀 안에 수십만 명 규모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레옹 드 클레르퐁은 PCF 세포조직을 통해 파업의 정치적 의미를 분석했습니다. 현장에서는 CGT 중앙에 대한 항의성 반발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은 기다리라는 말을 너무 오래 들었다고 느꼈습니다. 인민전선이 승리했음에도 대통령이 총리 임명을 지연한다면, 이제는 현장이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정서가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클레르퐁은 이 정보를 PCF 중진들과 공유했습니다. 초기에는 PCF가 이번 파업에 적극적으로 올라타 독자적 기반을 넓히고 CGT 중앙을 견제할 수 있다는 유혹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크 뒤클로와 마르셀 지통은 곧바로 제동을 걸었습니다. PCF가 해야 할 일은 CGT의 깃발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행동과 선거의 뜻을 하나로 묶어 르브룅이 하원 다수파를 우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PCF 회의에서는 구호가 정리되었습니다. 마크마옹과 밀랑의 전례를 들어 르브룅의 선언을 의회공화국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르브룅 퇴진, 블룸 즉시 임명”을 중심구호로 삼기로 했습니다. 앙브루아즈 크루아자는 후임 대통령 문제를 제기했고, 클레르퐁은 폴봉쿠르를 대통령으로 세우는 방안을 떠올렸습니다. 이는 정파적 발상이라기보다 의회수학과 헌정수습을 동시에 고려한 안이었습니다. 폴봉쿠르는 대독 강경책을 실제로 실행한 인물이었고, PRRS·SFIO·PCF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으며, 상원 일부와 반독 우파 일부도 설득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한편 미셸은 PRRS 내부에서 망데스 프랑스, 앙투안 뒤봉, 세자르 캉팡키와 함께 논의를 진행했습니다. 망데스 프랑스는 SFIO 집권이 공화국 전복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캉팡키는 더 직접적으로 말했습니다. PRRS가 SFIO를 보완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후견이나 제어로 바뀌어서는 안 되며, PRRS가 단순한 제동장치가 된다면 결국 쇼탕이나 보네 같은 미래를 맞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가 요구한 것은 공동통치였습니다. 외교, 국방, 해운, 식민지 등 대외정책 분야에서 PRRS가 우선적인 각료 배분을 받고, 대신 PRRS는 단일대오로 블룸 총리 임명을 지지하며 필요할 경우 르브룅에 맞선 헌정투쟁에도 동참한다는 조건이 제시되었습니다. 또한 SFIO는 파업 노동자와의 협상에 최선을 다하되, 공장점거와 총파업이 국가정책의 대체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조건도 붙었습니다.
마르셀 포쿠아는 SFIO 내부에서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그에게 핵심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총리는 선거결과에 따라 블룸이 맡아야 했습니다. 둘째, 자르 위기와 외교·국방정책의 연속성을 고려하면 폴봉쿠르가 일정한 역할을 계속 맡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리우스 무테, 쥘 모크, 뱅상 오리올 등 블룸의 지지자들은 이 방향에 동의했습니다. 평화주의적 사회주의자들 역시 폴봉쿠르의 대독 강경책이 지나치게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오히려 블룸 총리 임명을 서둘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마르셀과 클레르퐁은 거의 동시에 폴봉쿠르를 찾아갔습니다. 마르셀은 폴봉쿠르에게 엘리제의 제안을 거부하고 대통령의 정치적 도구가 되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동시에 자르 위기 수습을 위해 외교의 연속성을 보장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클레르퐁은 더 나아가 르브룅 퇴진과 폴봉쿠르 대통령 옹립을 제안했습니다. 폴봉쿠르는 두 제안 사이의 조율 부족에 당혹감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핵심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유임 선언을 받아들이는 순간 대통령의 방패가 된다는 점, 반대로 당장 사임하면 자르 위기 국면에서 내각 공백이 발생한다는 점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르브룅 퇴진은 상원과 협의할 것, 블룸 내각 조각 협의를 조속히 마무리할 것, 그리고 인민전선의 대원칙으로 단호한 대독정책을 확정할 것이었습니다. 이 조건이 충족된다면 자신도 대통령직 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 사이 SFIO와 PRRS의 조각 협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블룸은 PRRS가 외교와 국방의 핵심 파일을 맡는다는 원칙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다만 그는 총리의 통할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총리청(Présidence du Conseil)의 실질적 신설을 제안했습니다. 뱅상 오리올은 총리청 신설을 명문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블룸은 각료들의 재량권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내각 전체를 조정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이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피에트리 내각의 실패는 총리 권한이 형식에 머물고 각 부처가 제각각 움직인 결과였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캉팡키와 뒤봉은 복잡한 계산에 들어갔지만, 미셸은 반공화국파와 외부 위협에 맞서려면 내각의 조정기구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이들을 설득했습니다.
캉팡키는 총리청을 수락하는 대신, 르브룅 퇴진 이후 PRRS 출신 인사를 대통령으로 세우는 데 SFIO가 협조한다는 각서를 요구했습니다. SFIO는 처음에는 백지위임을 경계했지만, 폴봉쿠르를 우선 검토하는 PRRS 출신 공동후보 원칙에 동의했습니다.
클레르퐁은 상원 설득을 맡았습니다. 마르셀 카생의 소개로 그는 GDRRS의 피에르에티엔 시몽 아시에 상원의원을 만났습니다. 공산당원이 상원 구급진당 원로에게 폴봉쿠르 대통령안을 직접 말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었습니다. 아시에는 곧바로 경계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대통령은 특정 정파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하원 합동 국민의회에서 의원들의 양심과 헌법 절차에 따라 선출되는 것이라고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르브룅의 행동에 대한 분노 자체는 공유했습니다. 상원 구급진당이 르브룅을 설득해 물러나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인민전선에 대한 협력이 아니라 공화국을 향한 자신들의 독립적 신념에 따른 행동이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폴봉쿠르 옹립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르브룅 퇴진에 관한 공감대는 형성되었습니다.
루이앙리는 CGT를 찾아갔습니다. 파리 노동거래소의 CGT 서기국 회의는 이미 통제력을 잃지 않으려는 긴장 속에 있었습니다. 레옹 주오와 르네 벨랭은 파업이 이미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르그리트 데쉴리는 현장에서 돌아와, 노동자들을 일터로 돌려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루이앙리는 노동개선법안을 꺼냈지만, 주오는 지금 그것을 내밀 시점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입법을 강행했다가 상원에서 부결되면, CGT 중앙은 더 큰 총파업을 선언할 수밖에 없고, 그 경우 프랑스는 파시스트를 목전에 두고 내전적 상황으로 미끄러질 수 있었습니다.
루이앙리는 다른 방향을 모색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집단행동 자체를 멈출 수 없다면, 그 행동의 형식이 중요했습니다. 그는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이 설비를 파괴하거나 단순히 생산을 중단하는 대신, 공화국을 위해 한시적으로 생산을 장악하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노동자들의 항의를 국가를 무너뜨리는 행위가 아니라, 정치인들이 지키지 못한 공화국의 생산전선을 노동자들이 지키겠다는 행위로 재정의하는 구상이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처음에는 이를 또 다른 모험주의로 보았지만, 곧 현실적으로 이보다 나은 통제방식이 없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주오는 즉시 노동자대표회의 소집을 지시했습니다. 안건은 노동과 인민, 의회의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한 한시적 생산 장악이었습니다.
3월 24일 심야, 폴봉쿠르는 엘리제궁을 직접 찾아가 르브룅에게 유임 선언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하원의 의사를 방해하는 역할도 맡을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다음날 오전 레옹 블룸과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성명은 대통령이 국민 통합의 상징이자 의회공화국의 수호자이며, 하원 다수파를 시험하거나 분할 지배하는 권한을 가질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불신임 선언이었습니다.
3월 25일 저녁, 쥘 잔느네 상원의장을 중심으로 한 GDRRS 원로들은 엘리제궁에 비공개 서한을 보냈습니다. 서한은 대통령의 조치가 헌정적으로 부적절했으며, 총선 결과를 반영한 내각을 즉각 인준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하원 다수파와 좌파만이 아니라 상원 공화주의 원로들까지 돌아서자, 르브룅은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는 3월 26일 아침, 국내외 위기 속에서 대통령직이 더 이상의 정쟁 원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사임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임은 공장점거운동을 즉시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르브룅 사임 발표 전날 오후, 노동자대표회의 전국위원회는 CGT 중앙의 요청에 따라 결의안을 발표했습니다. 결의안은 공장점거가 무기한 혁명행동이 아니라 의회공화국과 노동자의 투표를 지키기 위한 한시적 행동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필수산업과 군수, 항만, 철도, 정유, 식품 관련 시설에서는 설비를 보호하고 필요한 생산을 유지하며, 모든 생산은 사용자 개인의 이윤이 아니라 공화국의 안전과 노동자 대표의 감시 아래 둔다고 명시했습니다. 새 정부 출범 즉시 노동자대표, CGT, 사용자단체, 정부가 참여하는 전국교섭을 요구한다는 점도 포함되었습니다.
이 결의가 발표될 무렵 공장점거에 참여하는 노동자는 이미 50만 명을 넘어 계속 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르브룅 사임 소식이 전해지면서 운동의 성격은 무질서한 분노에서 해방감과 기대가 섞인 질서 있는 점거로 바뀌었습니다. 노동자들은 공장에 남았지만, 공장을 불태우지는 않았습니다. 작업장을 지키고, 대표단을 뽑고, 설비와 재고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CGT 중앙은 뒤늦게나마 현장과 다시 연결되었고, PCF와 PUP, SFIO 활동가들도 이 운동을 혁명적 전환이 아니라 공화국 수호의 언어 안에 묶기 시작했습니다.
3월 27일 금요일, 국민의회 양원 합동회의가 베르사유에서 열렸습니다. 상원 GDRRS와 하원 URI, 플랑댕계 중도우파는 르브룅 퇴진에는 협조했지만 폴봉쿠르 대통령안에는 처음부터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폴봉쿠르를 사회주의적 국가권위주의자로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폴 레노를 비롯한 반독 우파 일부가 표를 보태면서 판세가 달라졌습니다. 폴봉쿠르는 자르에서 실제 행동을 보인 공화국의 수습자로 제시되었고, 인민전선 내부에서도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폴봉쿠르는 어렵지 않게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폴봉쿠르 대통령은 즉시 레옹 블룸에게 내각 구성을 위임했습니다. 새 내각은 SFIO, PRRS, RSR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PUP는 제한적으로 입각했으며, PCF는 입각하지 않고 신임을 공급하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PRRS는 외교, 국방, 해군, 상선, 식민지 등 대외·전략 파일에서 큰 비중을 확보했습니다. 대신 블룸은 총리청 신설을 통해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내각을 통할할 제도적 수단을 얻었습니다. 이는 SFIO가 단순한 사회정책 담당 정당으로 밀려나지 않으면서도, PRRS가 국방과 외교의 책임 있는 공동통치 파트너로 인정받는 절충이었습니다.
자르 사태는 한동안 위험한 상태로 냉각되었습니다. 국내정치가 격렬한 상황에서 앙리 지로 중장은 추가 모험을 피하고 점령선 방어에 집중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자르의 절반가량을 확보한 채 강과 언덕을 따라 방어선을 굳혔고, 독일군도 맞은편에서 팽팽한 대치를 이어갔습니다. 양측 모두 전면전의 문턱까지 갔지만, 당장 그 문턱을 넘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이 영국은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는 자르 점령을 병합이 아니라 로카르노와 베르사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잠정적 보장조치라고 주장했고, 독일은 프랑스의 불법점령을 선전했습니다. 자르는 이제 군사적 충돌의 공간이자 국제중재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인민전선은 집권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평온한 집권이 아니었습니다. 르브룅은 물러났고, 폴봉쿠르는 대통령이 되었으며, 블룸은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 공장점거운동은 계속 확산되고 있었고, 자르에서는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13. 불개입이라는 이름의 개입
1936년 4월 2일, 런던. 자르-라인 사태 해결을 위한 외교회의는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의 주재 아래 시작되었습니다. 회의장은 의외로 조용했습니다. 독일 대표단은 정중했고, 영국 대표단은 끝까지 중재자의 형식을 유지하려 했으며, 프랑스 대표단 역시 자르 진입이 충동적 군사행동이 아니라 독일의 로카르노 위반에 대한 잠정적 보장조치였다는 점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문장의 태도가 신사적이었다고 해서, 회의의 내용까지 신사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독일 대표단의 목표는 자르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르에서 프랑스군을 철수시키는 것은 필요했지만, 더 큰 목표는 라인란트 재무장을 “이미 일어난 독일 주권의 회복”으로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독일군이 라인란트에 들어간 것은 독일 영토 안에서의 군사배치이고, 프랑스군이 자르에 들어간 것은 국제국경을 넘은 행위라는 논리가 독일 대표단의 기본 전제였습니다. 프라이타크로링호펜 법률고문은 로카르노 조약 위반 여부는 논의할 수 있으나, 그 논의가 곧 프랑스군의 자르 진입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랑스 대표단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달라디에 부총리 겸 국방장관은 자르의 절반이 프랑스가 가진 유일한 실질적 레버리지라고 보았습니다. 독일의 라인란트 진주가 로카르노 조약의 명백한 위반이라는 점을 국제적으로 확인받지 못한다면, 이후 독일의 현상변경은 더 낮은 비용으로 반복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은 독일과 프랑스 어느 쪽의 승리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회의 첫 이틀은 서로의 원칙을 확인하는 데 대부분 소모되었습니다.
4월 4일이 되자, 회의장 안에서는 양국 군대를 자르에서 철수시키고, 독일의 라인 지역 병력을 동결하며, 자르를 비무장지대화한다는 중재문구가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독일 대표단은 새로운 의제를 꺼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국제적 불개입 체제의 창설이었습니다.
스페인 문제 분과회의가 열리자마자 빌헬름 슈타들러 주영 독일대사와 프라이타크로링호펜 법률고문은 준비된 듯 발언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스페인 공화국을 합법정부로 인정한다는 말은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전 상태에 들어간 이상 외국 정부가 어느 한쪽에 무기, 자금, 선박, 항공기, 군사고문을 제공하는 것은 스페인의 국내질서를 국제전쟁으로 확대하는 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겉으로는 내전의 국제화를 막자는 말이었지만, 실제 결론은 분명했습니다. 프랑스가 스페인 공화국을 지원할 수 있는 통로를 국제법상 의심스러운 행위로 묶어두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측 반응도 프랑스에게 편하지 않았습니다. 언리 챗필드 제독은 지중해와 대서양 항로의 불안정화를 우려했고, 허버트 윌리엄 말킨 수석법률고문은 내전은 기본적으로 국내문제이며 외국의 군사적 지원은 제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에드워드 H. 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 대표단을 겨냥했습니다. 그는 프랑스가 자르에서는 국제법을 말하면서 스페인에서는 이념적 동맹을 말하려 한다면,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장 뒤퐁 해군부 정무차관은 먼저 원칙론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는 로카르노 조약과 프랑스-소련 조약은 별개의 조약문서이며, 프랑스가 프랑스-소련 조약을 근거로 독일 침공을 선언한 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로카르노 조약은 위반 시 군사조치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었고, 프랑스는 독일의 위반에 대해 조약질서를 준수하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스페인에서는 정통성이 어디에 있는지 모두 알고 있으며, 프랑스가 합법정부를 지원하는 것과 반란단체를 지원하는 것은 같은 층위가 아니라고 덧붙였습니다.
프라이타크로링호펜은 곧바로 그 논리를 받아내며 반격했습니다. 그는 로카르노 조약과 프랑스-소련 조약이 별개라는 점에는 동의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의 논리는 일관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랑스는 로카르노 문제에서는 조약의 엄격한 문언과 절차를 말하면서, 스페인 문제에서는 합법정부의 요청이라는 이유로 훨씬 넓은 재량을 주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내전이란 정통성이 국내적으로 무력에 의해 다투어지고 있는 상태이며, 외국 정부가 어느 한 정부의 합법성을 이유로 무기를 무제한 공급할 권리를 인정한다면 모든 내전이 국제전쟁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라디슬라스 로랑 식민부 정무차관은 분과회의가 돌아가는 방향을 보고 프랑스 대표단의 기본 방침을 확인하려 했습니다. 달라디에와 델보스의 지침은 명확하지만 좁았습니다. 영국이 독일 쪽에 완전히 붙어버리는 상황만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독일 대 프랑스-소련의 구도가 형성된다면, 스페인 문제보다도 더 큰 외교적 족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뒤퐁은 해군부와 외교 라인의 자료를 통해 스페인 전황을 검토했습니다. 자료는 프랑스 군사안보 라인의 시각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스페인 공화국 정부는 합법정부였고, 주요 도시와 항만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화국 병력은 사기가 높아도 규율과 지휘체계가 불안정했고, 항공 및 보급체계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반란군은 정치적 정통성은 취약했지만 전투경험을 가진 병력과 장교단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스페인령 모로코의 아프리카군이 본토로 이동할 수 있다면, 전황은 크게 뒤집힐 수 있었습니다.
로랑은 영국 대표단 주변을 탐문했습니다. 영국은 스페인 문제에 대해 완전히 정해진 해법을 들고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 판단은 분명했습니다. 스페인 내전이 국제전으로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스페인 공화국이 반란군을 진압하는지, 반란군이 공화국을 뒤집는지보다, 스페인 내전이 유럽 전체의 전쟁으로 번지는 것을 더 중대한 위험으로 보았습니다. 동시에 로랑은 외무성의 중립적 입장이 나올 때마다 이든 외무장관을 향한 정치적 흔들기가 시도되고 있다는 정보도 얻었습니다.
회의가 재개되자 로랑은 불개입 체제의 실효성을 물었습니다. 각국 사이의 신뢰가 이미 크게 약해진 상황에서, 강제력 없는 합의가 실제로 지켜질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말킨은 런던에 불개입위원회 사무국을 두고 영국이 보증국 역할을 맡으면 된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로랑과 뒤퐁이 보기에, 그것은 위반을 실제로 막는 장치라기보다는 위반의 외교적 비용을 높이는 장치에 가까웠습니다.
로랑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무기수송뿐 아니라 비인도적 물자수출, 병력을 승객으로 위장한 항공수송도 개입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영국이 지브롤터를 가진 이상, 그 일대에서 정기적인 항공·해상 순찰을 통해 그런 수송을 미연에 막는 방안은 어떻겠냐는 제안이었습니다. 뒤퐁도 마르세유와 지중해 안보를 언급하며 프랑스 해군도 필요하다면 협조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챗필드 제독은 다양한 방식을 검토할 수 있다고만 답했습니다. 그러나 카는 프랑스가 불개입체제를 의심하면서도 그 불개입체제를 영국 해군이 집행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냐고 지적했습니다. 그 발언은 프랑스를 찌르는 동시에 영국의 한계도 드러냈습니다. 영국은 불개입체제를 원했지만, 그 불개입을 강제할 군사적 책임을 실제로 떠안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로랑은 불개입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개입이 필요해지는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프랑스 해군이 항로를 막으면 그것 역시 누군가에게는 개입으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독일 측은 곧바로 반응했습니다. 슈타들러 대사는 프랑스 대표단도 스페인 내에 단순한 범죄집단 이상의 조직된 군사·정치세력이 있음을 인정한 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감시가 필요하다면 지브롤터뿐 아니라 마르세유, 세트, 보르도, 툴롱, 오랑, 알제, 포르투갈 항만, 이탈리아 항만, 모든 항공노선이 같은 기준으로 다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뒤퐁은 그 논리를 역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독일 쪽도 같은 기준으로 감시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챗필드와 말킨의 표정은 굳어졌습니다. 전 유럽 항만과 항공노선을 대상으로 하는 감시체제는 영국이 원한 불개입위원회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챗필드는 결국 스페인 내전 불개입 체제에 왕립해군이 함대를 동원하는 것은 사실상 스페인을 해상봉쇄하겠다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프랑스 대표단은 이 대목에서 독일의 본래 의도를 일정 부분 드러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독일은 강한 불개입 집행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스페인 공화국 지원을 외교적으로 묶어두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합동 해상순찰과 같은 실효적 방안이 거론되자 독일 대표단은 그것이 스페인 불개입을 명분으로 지중해에서 무력시위를 이어가려는 반평화적 발상이라고 반발했습니다.
말킨은 결국 스페인 주권을 존중한다는 비구속적 선언이라도 발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뒤퐁은 이를 달라디에에게 전달하며 영국이 더 이상 강한 불개입을 밀어붙일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보았습니다. 로랑은 영국과 협력할 의향이 있음을 밝히면서도, 현실적인 방안의 검토를 계속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회의는 더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비구속 선언에는 동의했지만, 실효성 있는 감시체제에는 반대했습니다. 영국은 선언문 한 장으로 체면을 세울 수 있다고 보았고, 독일은 최악은 피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스페인 상황에서의 주권존중에 관한 런던 선언」이 마련되었습니다. 선언은 발표되었지만, 자동제재도 없고, 해상검사도 없고, 항공감시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스페인 내전의 국제화를 막겠다는 의지를 담은 문서였으나, 실제로 각국의 행동을 막을 수 있는 장치는 거의 갖추지 못했습니다.
자르-라인 문제에 대해서는 「자르-라인 사태에 관한 런던 임시의정서」가 채택되었습니다. 의정서는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을 침략으로 부르지 않았고, 명시적 조약위반으로도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자르 진입 역시 무력침공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책임에 관한 문구는 의도적으로 흐려졌고, 프랑스-독일 양국 간의 자르-라인 무장사태라는 애매한 표현이 남았습니다.
의정서는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30일 이내에 자르 지역에서 병력을 철수하고, 자르에 독일 치안유지 인력을 복귀시키며, 독일은 라인 지역 내 병력 규모를 1936년 4월 1일 수준으로 동결한다고 정했습니다. 중포, 공군기지, 영구요새의 증강은 제한되었고, 사단급 이상 병력 재배치는 48시간 전에 영국과 프랑스에 통보하기로 했습니다. 국제연맹 이사회는 자르 및 라인 지역 상황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발간하기로 했고, 빠른 시일 내 유럽 안보 환경을 재평가하기 위한 다자 외교회의를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영국이 보기에는 독일과 프랑스가 조금씩 양보한 타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가 보기에는 독일의 평화체제 파괴에 국제법적 변명을 달아준 문서이기도 했습니다. 독일의 모험에 일정한 비용을 강제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영국이 대독 포위망의 일원이 아니라 중립적 중재자로 나섰다는 사실 자체가 프랑스에게는 뚜렷한 불신을 남겼습니다.
독일 내부의 반응은 더 격렬했습니다. 노이라트 외무장관은 최악은 피했다고 보고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라인란트에서 독일군 재배치조차 영국과 프랑스에 통보해야 한다는 조항은 히틀러에게 굴욕으로 보였습니다. 노이라트는 해임되었고, 그 자리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차지했습니다. 전통적 외교관료와 국방군 수뇌부에 대한 히틀러의 불신도 깊어졌습니다.
그 직후 SS 보안대는 국방군 지도부를 공격할 소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1936년 5월 6일, 육군최고사령부 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 상급대장이 동성애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체포 과정에서 SS 보안대 장교 게르하르트 폰 비르켄호니히스에센 소령이 총격전 끝에 사망했고, 국방군과 SS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게르하르트의 아버지이자 제국 교회문제장관 쿠노 폰 비르켄호니히스에센 백작은 국방군 장성들을 민족의 반역자로 비난하며 강경한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사건은 단순한 형사사건이 아니라, 독일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번져갔습니다.
스페인에서는 런던 선언의 한계가 빠르게 드러났습니다. 독일의 신임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는 프랑스가 선언의 정신을 훼손했다고 주장하며 독일이 더 이상 그 선언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이탈리아 해군의 지원 아래 아프리카군은 본토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고, 안달루시아의 공화파 거점들은 압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바다호스가 함락되며 국민파는 남부의 정예 아프리카군이 마드리드 방면으로 진격할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전선이 국민파에게 유리하게 흘러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북부의 이룬 전투는 공화파의 승리로 끝났고, 프랑스와 스페인을 잇는 보급로는 유지되었습니다. 이룬의 생존은 북부 공화파 지역이 완전히 고립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프랑스군 역시 스페인 공화국을 공개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치장물자를 넘기는 방식으로 공화파를 도왔습니다.
장 뒤퐁 해군차관의 건의를 받은 프랑스 해군은 말라가에 대한 대규모 보급작전을 지원했습니다. 공식적으로 프랑스 해군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르세유와 툴롱의 항만서류는 유난히 느슨했고, 공화파 수병들은 출처가 모호한 탄약과 정비 지원을 받았습니다. 위장한 프랑스 해군 장교들로 구성된 ‘임시 함장단’이 공화파 함정을 지휘했고, 말라가 해안의 공화파 방어선은 함포와 해안포를 동원해 코르도바와 그라나다 방면에서 밀려오는 반란군을 막아냈습니다. 말라가는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바다호스를 잃은 국민파는 남북 점령지 연결에는 성공했지만, 말라가에서 묶이면서 마드리드에 재접근하는 데 필요한 속도를 얻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런던 회의와 스페인 전선의 변화가 새로운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장 뒤퐁과 개인적 친분이 있고, 뒤퐁의 국민장비계획을 지지했던 장 쿠트로는 주간지 《라 뤼미에르》의 주필 조르주 보리스와 함께 도발적인 논설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프랑스 경제가 장기침체, 고평가된 화폐가치, 디플레이션 정책으로 인해 유효수요 창출에 실패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안보환경이 위험해진 지금, 국방 및 군수산업에 대대적으로 투자해 실업을 낮추고 경제활동인구의 구매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주장은 단순한 군비확장이 아니라, 국방생산을 통한 고용회복과 산업재가동의 논리였습니다. 총리청의 쥘 모크와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는 이 논리가 거칠지만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르-라인 사태, 스페인 내전, 독일 내부의 급진화는 모두 프랑스가 더 이상 사회개혁과 국방정책을 분리해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런던 회의는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의 직접 충돌을 잠시 멈추었고, 영국이 중재자의 자리를 회복하게 했으며, 스페인 문제에 관해서는 강제력 없는 선언 하나를 남겼을 뿐입니다..
1936년 5월, 스페인 내전 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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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jdss 3.혁명을 선택하다.
1789년 혁명이 시작되자, 대부분의 귀족들이 망명을 선택한 것과 달리 콩티브리삭 가문은 혁명 편에 섰다.
당시 가주였던 에티엔 드 콩티브리삭은 국민의회에 출석하여 이렇게 선언했다고 전해집니다.
"왕은 우리를 버렸고, 귀족은 우리를 부정했다. 이제 우리의 조국은 프랑스 국민뿐이다."
가문은
-국민방위군 조직 지원
-영지의 곡물 무상 개방
-혁명군 장교 자원
-교회 재산 국유화 지지
-봉건 특권 폐지 찬성
등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이 덕분에 혁명기 동안 수많은 귀족과 인물들이 처형되는 동안 콩티브리삭 가문은 그 참화에서 비껴가게되었습니다. 물론 몇몇은 단두대에 끌려갔지만요.
@dnjdss 4.두 번째 몰락과 유산
1814년 루이 18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왕정복고 정부는 혁명에 협력했던 귀족들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콩티브리삭 가문은
-왕족의 이름을 더럽힌 가문
-귀족을 배신한 가문
-혁명을 지원한 반역 귀족
이라는 낙인이 찍히고야 말았습니다.
그들은 공식 작위는 유지했지만,
-궁정 초청 금지
-명예직 박탈
-군 고위직 진출 제한
-프랑스 귀족 사회 사교계 배제
등의 사실상의 사회적 추방을 당했습니다.
다행히도 이들에게 온정적이였던 외국의 몇몇 귀족 가문들과 지식인들 덕분에 명맥은 유지되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내내 콩티브리삭 가문은 몰락한 채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이들에게 한 가지 가훈만큼은 끝까지 가르쳤죠.
"귀족의 이름은 태어날 때 얻지만, 명예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1902년에 태어난 루이앙리에게도 전해졌습니다.
@dnjdss 못참고 써버린(?) 루이앙리의 가문 몰락사입니다. 물론 캐릭터 설정에 맞지 않는것도 존재하니 재미로만 봐주세요 ㅋㅋㅋ
꽤나 특이한 집안이군요.
@차들어 홍차야 그 이유는 본가들의 탄압과 프랑스 귀족 사회의 위선 때문입니다(?)
혹시 이번주 토요일 18:30에 시작하면 몇 분이나 시간이 되실까요?
여러가지로 시간이 애매해서, 모처럼 시간 될 때 진행하고 나머지 진행을 따로 빼서 별도 이벤트로 만들어버릴까 합니다(…)
오.... 전 가능합니다
하필 그때쯤이 제가 평소 저녁 먹을 시간이라가지고...
18:30에 시작하면 아마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못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뒤론 여유롭고요.
전 됩니다.
저는 그날 대근을 받아서.. 시간이 안될 것 같습니다. 목금토는 안되고, 일월화는 자는 시간을 조절하면 오후에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장 좋은건 아침에 하는거긴 하지만요(...)
가능합니다.
@통장 사실 gm님도 새벽 4시를 원하실겁니다(?)
@dear0904 오.... 토요일 01시부터 가능합니다(?)
@통장 진짜 궁금하긴 합니다 ㅋㅋㅋ 이곳에 새벽반이 몇명일까 ㅋㅋ 저도 토요일 01시도 가능하니...
@통장 저도 되니 좋네요(?) ㅋㅋㅋㅋ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