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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1963년 덕은(德殷) 송재직(宋在直)이 지은 「한후정기(寒後亭記)」에 정자를 건립하게 된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거처하던 당은 오랜 세월에 폐허가 됨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그 옛터를 찾아 정자 하나를 세우고 당시의 당호(堂號)를 건 다음 동현(東賢) 익환(益煥)으로 하여금 나의 글을 청하여 그 전말을 기록하고자 하였다.” 짓고 살았는데,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 풍파에 무너져 집을 지었던 옛 땅에 후손들이 다시 정자를 세워 한후정 이라 이름붙였다. |
선조(宣祖) 때 사람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순왕 28대 손으로서 충북(忠北) 영동군(永同郡) 심천면(深川面) 각계리(覺溪里)에서 영양으로 입향하였다. 그는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인 상촌공 (桑村公)의 8세손으로 한산 모시 씨를 입향 때 가지고 왔으므로 동명(洞名)도 모시골(苧洞)로 불러져 내려오고 있다. 저리에 한후정(寒後亭)을 지어 송백(松柏)이 한겨울을 지나도 푸름을 잃지 않는 형상을 취하여 자신의 뜻을 보인 것이며, 아침저녁으로 시를 읊조리고 유유자적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청기면저리靑杞面苧里 금계재金溪齋<저리 금계재>는 경주인 김건金楗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사로 모시골 마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재사는 1890년에 건립하였고,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켰는데,대청의 전면에는 각 칸마다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으며 좌측칸을 제외한 우측 3칸의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건물의 3면과 대청의 배면에는 쪽마루를 둘렀으며 전면에는 계자난간을 세웠다. 가구는 오량가의 초익공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청기면저리靑杞面苧里 장암정章巖亭<저리 장암정>은 1859년 장암章巖 남주일南周一이 장암서당으로 건립하였던 것인데,서당의 기능이 소멸 되자 정자로 사용하고 있다.정자는 모시골마을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데,정자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 담장을 둘렀으며 좌측 담장 사이에는 일각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평면은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켰으며 전면의 퇴칸 주위에는 평난간을 세운헌함을 둘렀다.가구는 오량가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청기면저리靑杞面苧里 초계정樵溪亭<저리 초계정>은 모시골마을 우측단의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경주김씨 문중정자인데,1900년에 건립하 였고,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다.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좌측에 마루방 1칸을 두고 우측으로 온돌방 2칸을 연접시킨 편방형偏房形의 평면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으며 퇴칸의 전면에는 계자각을 세운헌함을 설치하였다. 가구는 오량가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청기면저리 경주김씨종택 김세종가옥<경주김씨 저리종택 김세종 가옥>은 1900년대에 건립한 저리 경주김씨 종택으로 제당堤塘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배치는 남향한 일一자형의 안채와 사랑채를 ㄱ자형으로 앉힌 후, 안채의 우측에는 아래채를,사랑채의 좌측 전면에는 뒤주를 각각 배치하였다. 안채는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며 사랑채는 정면 4칸,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문화관광해설사 박원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