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랑개비는 바람을 먹고 산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손에 쥔 사람이 빨리 뛰어야 팔랑개비는 돌아간다. 바람이 멈춰 선 자리에 팔랑개비는 그저 어쭙지않은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길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팔랑개비가 바람을 맞아 빠르게 돌아간다. 연어가 태어난 고향을 찾아오듯 마음에 빚을 진 사람들이 새해를 맞아 봉화마을로 모여든다. 주민의 환호 속에 귀향보고를 하며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세상을 향에 외치던 마을 어귀에는 참배객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하다. 어여쁜 손녀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달리던 논두렁길은 황량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부엉이바위를 올려다보는 서글픈 눈동자들이 몰려 있다. 박석(薄石)이 바닥에 빼곡히 깔려 있어 걸음을 더디게 한다. 미안함과 그리움 그리고 숭고한 뜻을 잊지 않겠다는 각오가 적힌 글귀가 마음을 붙잡는다.
떠나가면 사랑이 시작된다는 바보 같은 진리를 자유롭게 하는 텅 빈 공간이 마냥 서글프다. 들녘에서 부는 바람이 팔랑개비를 열심히 돌린다. 영민하지 못해 바보라 불리던 그 사람을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이곳을 찾는 우리에게 있음을 안다. 얼마 전 오물이 뿌려진 터럭 바위 사진을 보았다. 부관참시도 마나 하지 않는 무도함과 아직도 팽팽히 날이 선 이념의 갈등을 보는 것 같아 침울하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조직된 시민의 힘이다.’라는 글귀에 등골이 서늘하다. 강경일변도로 치닫는 대북정책과 물 만난 고기처럼 연일 군사적 대결과 타격이라는 용어를 써가며 신이 난 보수언론의 작태가 광풍처럼 이 나라를 휩쓸고 있다. 10년간 공을 들인 평화정책은 이미 철저하게 난도질당해 걸레 조각이 되었다. 인권위원장의 수상을 거부하는 현실에도 누구도 돌아보고 반성할 줄 모른다.
검찰조사를 받고 버스에서 내려 지지자들에게 미안하다며 인사를 하고 돌아선 곳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쯤 될 것이다. 언론에 공개된 마지막 모습이다. 새해 첫 신문에 강력한 대선 후보로 지목된 여성 정치인은 ‘참 나쁜 대통령이다.’라는 말을 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인 줄도 모른다. 이 분의 재임 시절은 참 시끄러웠다. 경박한 말투라고 분노한 근엄한 식자들의 비판부터 각종 정책에 대한 첨예한 대립 등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은 애국가 시청률밖에 나오지 않은 토론회가 그때는 즐겁고 재미있었다. 논객들의 정책 토론과 이념 논쟁 등을 통해 정치가 무엇이고 왜 우리가 관심을 둬야 하는지를 알았다.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과 그에 반대하는 촛불 집회와 이라크 파병 문제 그리고 한미 FTA의 문제로 언제나 이 나라는 시끄러웠다. 민심은 요동쳤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한마디씩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논쟁과 토론 그 소란스러움이 우리가 잊고 살았던 민주국가의 주인으로 우리 소리를 내는 것에 익숙지 않은 촌스러움이라면 그 말이 맞다.
파스칼 말 중에 ‘당신의 말에 한마디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선 내 목숨도 바치겠습니다.’라는 말처럼 정책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서 목소리가 다소 투박하더라도 다양한 가치와 의견이 개진되는 최소한의 자유는 누리고 살았다. 검찰과 국세청에 대해 정치적 외압을 행사하지 않는 도덕성은 가지고 있었다. 미국과 다소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더라도 우리의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한 경제협력으로 군사적 갈등은 피할 수 있었다. 배고픈 자에게 기다리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다. 북한에 대해 일방적인 퍼 주기라고 그렇게 매도해서 지금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따뜻한 바람이 불면 그때 당신이 오신 줄 알겠습니다.’ 노란 나비가 줄마다 달라붙어 따뜻한 봄을 기다린다. 부활을 꿈꾸는 팔랑개비가 바람을 기다리고 있다. 투박했지만 따스했던 사람, 노회(老獪)한 정치가의 음흉한 언변보다 진솔함으로 사람의 마음을 열었던 사람, 세상에 뻔뻔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가랑잎만 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몸을 던져 사람을 깨운 사람, 그가 사는 이곳에 바람이 불어 팔랑개비가 돌았으면 좋겠다.
흰 국화꽃 한 송이를 쥐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과 어린 자식들 데리고 노란 팔랑개비 손에 쥐여 주고 눈가에 눈물짓는 사람이 바람이 된다. 팔랑개비는 바람을 먹고 다시 돌아간다.
첫댓글 바람이 많으니, 팔랑개비는 늘 배부르겠습니다. 그러나 속에 담아두지 않았으니, 허허로움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그 님처럼 오래 도는 삶을 위하여.
두 번째 방문에는 부엉이바위와 사자바위에 올랐지요. 참 추웠습니다. 날씨도 그렇고 맘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