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취(銅臭)가 진동하는 전치錢痴)들 세상
김 익 하
요즘 돈벌레[그리마]가 득실거린다. 나라가 온통 동취(銅臭)가 진동한다. 나랏일 한다고 뻔뻔하게 큰소리치는 무리에서 그런 자가 많다. 부의 사회에서 윤리 도덕의식이 실종된 반증이라서 더욱 입맛이 쓰고 암담하기까지 하다.
마침 돈에 관한 글이 기억나기에 여기에다 옮겨놓는다. 조선 후기 문신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의 『무명자집(無名子集』문고 제10책 ‘돈에 대하여[錢說]’이란 글이다. 이 글은 저자가 예순아홉에서 일흔이던 1809년에서 1810년 무렵에 지은 글로 추정하고 있다. 돈의 유래와 속성과 그 폐해를 서술한 다음 예의염치를 내팽개치고 오로지 돈만을 추구하는 상류층을 에둘러 비판한다. 또 직접 겪은 세태, 즉 돈이 안 되는 곳을 피하는 능제관(陵祭官)의 행동과 별미, 지필묵을 나눠 줄 때만 모이는 성균관 유생의 이끗 형태를 개탄한다. 평생 올곧은 문사로 살아온 그의 면면이 잘 드러나는 글이다.
돈에 대하여[錢說]
돈이란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고, 백 가지 쓰임에 하나도 들어맞지 않으나, 교역하고 장사하는데 편리하기에 빈부귀천이 돈으로 말미암아 생사와 영욕이 돈에 달려 있다. 세상 온갖 일이 돈 때문에 굽히고 펴지고, 통하고 막히고, 복을 받고 재앙을 받기도 하며, 슬프기도 기쁘기도 한다.
이에 쟁탈하는 습속과 시기하고 비루한 짓을 하는 풍속이 사람의 마음에 뿌리를 박아, 그 양심을 상실하고 타고난 선한 성품을 버리고서 날마다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달려가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이 때문에 진(晋) 나라 노포(魯褒)가 ‘전신론(錢神論)’을 지었고[註1], 양 무제(梁武帝)의 작은 아들 수(綏)가 ‘전우론(錢愚論)을 지었으며[註2], 왕연(王衍)이 아내 곽씨(郭氏)의 탐욕을 미워하여 입으로 돈을 말한 적이 없고[註3], 추장천(鄒長倩)은 공손홍(公孫弘)에게 박만(撲滿)을 주었으니[註4], 이는 모든 탐욕과 혼탁을 경계한 뜻이지만 종이 위에 빈말에 지나지 않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역산(歷山)과 장산(莊山)에서 돈을 주조한 뒤에 돈이 생겼으니[註5],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본디 성왕(聖王)이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고 속매(贖賣)[註6]하던 정치에서 나와서, 있고 없는 것을 서로 옮겨 주고 물화를 유통시켜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했다. 그런데 세상이 점차 낮아져 간사한 기교가 날로 불어남에 미쳐서 인욕이 횡행하고 천리가 멸절되어 백성을 이롭게 하려던 물건이 도리어 백성을 유리시키는 물건이 되었고, 물가를 통일시키려던 제도가 드디어 재물을 독차지하는 수단이 되고 말아, 사람마다 화교(和嶠)의 벽(癖)[註7]이 적은 자가 없고, 관리마다 최열(崔烈)의 동취(銅臭)[註8]가 있어서 온 세상의 낮고 높은 자를 막론하고 밤낮 오직 돈에만 급급할 뿐이다.
조정 관리는 부정한 방법으로 수령(守令)과 방백(方伯) 자리를 구하니, 송계아(宋季雅)가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되는 데 돈 일천 꿰미를 바친 것처럼 한다[註9]. 백성들은 온 마음을 다하여 오직 적은 돈과 자잘한 이문을 좇아 천장부(賤丈夫)가 반드시 높은 곳에 올라 좌우의 이문을 그물질한[註10] 풍습을 이뤘다.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평생 도모하는 일이 돈을 벗어나지 않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 바쳐 내달리는 일이 모두 돈만 기약하는 것이니. 이른바 예의염치와 인정사리는 모두 잊어버리고[註11], 오직 돈만을 꾀하고 돈만 늘리고 돈만 사랑하고 돈만 지키니, 이에 이르면 인심과 세도(世道)가 모두 없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하겠다.
근일에 보고 들은 것으로 말하면, 매년 능향(陵享 능에 제사를 올리는 것) 때가 되면 군함(軍銜)[註12] 중에 약간이라도 세력이 있는 자는 제관(祭官)에 차임되기를 달가워하지 않고 반드시 피하기를 꾀했다. 그런데 근래에는 국가가 특별히 반전(盤纏.노자)의 비용을 올려 하루에 100전을 주니, 이에 도리어 다투는 자리가 되어 유력자들마저도 모두 차명되기를 바라고, 혹은 먼 곳의 능향을 구하는 자까지 있으니, 이는 가까운 곳보다 반전이 많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리(曹吏)들이 말하기를 “능제관(陵祭官)이 어찌 세력이 없는 자가 얻을 수 있는 자리겠는가.” 라고 하니, 이에서 세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경제(京祭)의 경우 소득이 없으므로 모두 꺼리고 피하여, 간혹 뽑히기라도 하면 반드시 청탁하여 다른 자로 바꾸고야 만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제관명부에 부표(付標)[註13]가 많은 것을 보고서 “이 제관들에게 엽전 3닢만 주었다면, 반드시 여기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 말이 참으로 길이 한숨이 나올 만하다.
고인이 말하기를 “사대부가 1문(文)의 돈을 사랑하면 곧 1문의 가치조차 없다[註14]”라고 했는데, 오늘날 사대부가 1문의 돈을 아끼지 않으면 곧 1문의 가치조차 없고, 1문의 돈이나마 아낄 줄 알아야 곧 경상(卿相)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또 반유(泮儒.성균관 유생)로 말하자면 국가가 선비를 대우하는 뜻이 매우 성대하여 삭분향(朔焚香)[註15] 때에 지필묵을 나눠 주고, 16일에 별미(別味)를 나눠주며, 절일(節日)[註16]에는 별공(別供)이 있고, 과거 때에는 시지(試紙)를 지급하되 모두 도기(到記)[註17]를 따른다. 그런데 근래 식당의 인원수를 100인으로 한정했으므로 구방(舊榜)이 아니면 참여할 수 없으니, 이는 진실로 매우 좁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구방이라면 부귀가의 자제나 음관(蔭官)이라도 누구나 이날이 되면 들어와 돈을 받지 않는 자가 없다. 만일 삭분향, 1일, 6일, 절일, 과거 때가 아니면 들어오는 자가 드물기 때문에 신방(新榜)들이 간혹 식당에 참여할 수도 있다. 지금에서 4, 5십 년 앞서 사람들이 이것을 수치로 여겨서 손가락질하며 조롱하여 심지어 삭진사(朔進仕)니 육일거사(六一居士)니 하는 별칭까지 붙였다. 지금은 사람마다 그러하여 남을 비난할 수 없기에 이런 말조차 없어졌으니, 이 또한 세태의 변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아니겠는가.
저 삭지(朔紙)[註18]란 것이 많은 경우라도 1속(束)이 되지 않고 적으면 3,4장(張) 뿐이고, 별미(別味)는 8문에 불과하고, 별공(別供)도 수십 문에 불과하며, 시지는 50문에 불과하니, 그 얻는 이득으로 볼 때, 이처럼 다투는 데는 이르지 않아야 마땅할 듯하다. 시지(試紙)로 말하자면 곤궁한 선비가 혹 낭패로 인하여 과거를 포기하면 부귀한 자들이 그 시지를 빼앗아 스스로 계책이 훌륭했다고 자랑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늘날 세상에 만약 1문의 돈을 얻을 수만 있다면 아마도 하지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니, 식자들이 본다면 어찌 크게 한심스러워 하지 않겠는가.
아, 왕의계(王義季)가 유응지(劉凝之)에게 10만 전을 보내자, 모두 시문(市門)의 굶주린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註19], 장일(張鎰)이 육지(陸贄)에게 100만 전을 주었으나 육지는 차(茶) 1관(串)만을 받았으니[註20], 오늘의 세상에서 어찌 이런 사람이 있겠는가.
------------------------------------------
註1
진(晋) 나라 시속이 돈을 좋아하므로 노포(魯褒)가 ‘전신론(錢神論)을 지어 ’돈은 귀신에 통한다.‘라고 풍자함
註2
육조(六朝) 시대 양 무제의 아우 소굉(蕭宏)이 3억 돈을 모으고도 지나치게 인색하자, 무제 아들 수(綬)가 ‘전우론(錢愚論)’을 지어 ‘돈만 모을 줄 아는 바보’라 기롱했다.
註3
왕연은 진(晋) 나라 청담가로 자는 이보(夷甫)다. 늘 아내 곽씨의 탐욕을 미워해서 돈이란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는데, 그 아내가 시험하려고 돈을 침상을 둘러 늘어놓아 다니지 못하게 하자 왕연은 ‘이 아도물(阿賭物)을 치워라’라고 말했다는 고사. 『산당사고(山堂肆考)』권93 친속(親屬) 질처호탐(嫉妻好貪)
註4
한나라 공손홍(公孫弘)이 현량(賢良)으로 뽑혀 들어갈 때. 친구 추장천(鄒長倩)이 그에게 생추(生篘) 한 묶음, 소사(素絲) 한 타래, 박만(撲滿) 한 개를 선물로 주었으니, 생추는 미천한 데서 고귀한 데로 나아가란 의미고, 소사는 소선(小善)이라도 소중히 실천하라는 의미이며, 박만은 저금통인데 가득 차면 깨뜨려야 하므로 취렴(聚斂)을 일삼지 말라는 충고를 담은 것임. 산당사고(山堂肆考)』권106 인풉(人品) 증이생추(贈以生篘)
註5
우(禹)가 5년 홍수에 역산(歷山)의 금으로 돈을 만들어 백성을 구제했고, 탕(湯)이 7년의 가뭄에 장산(莊山)의 금으로 돈을 만들어 백성을 구제했던 고사.『관자(管子)』권22 산권수(山權數)
註6
속매(贖賣)란 기근에 백성들이 자식을 파는 것을 대신 갚아 주었다는 의미다.『관자』에 나오는 말로 탕 임금과 우 임금이 큰 가뭄과 홍수에 백성들이 양식이 없어 자식을 팔자, 돈을 주조하여 이를 구제했다 함. 『관자(管子)』권22 산권수(山權數)
註7
진(晋) 나라 화교(和嶠)는 왕자와 견줄 만한 재산을 가지고도 계속 모으기만 할뿐 지나치게 인색했으므로 두예(杜預)가 그에게 수전노[錢痴]라는 별명을 붙였다는 고사.『진서(晋書)』권45 화교열전(和嶠列傳)
註8
돈을 가지고 관작(官爵)을 사는 행위를 말함. 후한 때 최열(崔烈)이 돈을 가지고 벼슬을 사니,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여 동취(銅臭)라고 부른 고사.『후한서(後漢書)』권82 최인열전(崔駰列傳)
註9
양(梁) 나라 송계아(宋季雅)가 남강군(南康郡)의 거처를 당시 실권자인 여승진(呂僧珍)의 옆집으로 옮기며, 집값이 1천에 이웃을 사는 값이 1백이라고 말하곤 했다. 여승진이 아들을 낳자 송계아가 예물상자를 보내면서 겉에 ‘1천’이라고 썼는데, 여승진이 은화인줄 의심하여 언짢아하다가, 열어보니 금화가 1천이었으므로 양 무제에게 송계아의 재능을 추천하여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삼게 했다.『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續集 卷7 居處部 百萬買隣
註10
『맹자』‘공손추 하(公孫丑 下)’에 나오는 말. 옛날 어떤 천장부(賤丈夫)가 반드시 높은 언덕에 올라 좌우로 이리저리 바라보면서 이끗을 독차지했다는 고사.
註11
원문은 ‘화자건곤(華子乾坤)’인데,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망각한다는 의미임. 송나라 양리(陽里)에 사는 화자(華子)가 건망증이 심했는데, 노나라 유생이 고쳐 주자, 화자가 화를 내면서 “건망증에 걸렸을 때에는 천지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지금은 존망득실과 희로애락 등 온갖 복잡한 상념이 일어나니 어찌하면 망각 상태로 다시 돌이킬 수 있겠는가” 하며 오히려 창을 들고 유생을 좇아냈다고 하는 고사. 『열자(列子)』주목왕(周穆王)
註12
오위(五衛)에 속하는 무관 벼슬을 통칭하는 말로 호군(護軍),사직(司直),사과(司果), 사정(司正), 사맹(司猛), 사용(司勇) 등을 지칭함.
註13
부표(付標)는 참고사항과 변동 사항을 찌에 적어 책이나 문서에 붙이는 것을 가리킨다.
註14
옛날 중국에서 전해 오는 말로 사대부의 청렴함을 강조하는 의미임. 사대부가 돈을 탐하면 사대부로서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의미한다.『학림옥로(鶴林玉露)』
註15
매월 초하루에 종묘나 능침에 향을 사르는 예식.
註16
한 계절의 명절, 곧 인일(人日), 삼월 삼짇날, 오월 단오, 칠월 칠석, 구월 중양절 등을 가리키며, 임금의 탄신일과 만수절(萬壽節) 등을 포함하기도 한다.
註17
식당 장부에 찍는 원점(圓點)을 말함. 성균관에 거재(居齋)하는 유생의 출석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유생들이 아침저녁으로 식당에 올 때마다 점호하여 식당의 출석부에 점을 찍는데, 아침과 저녁 두 번 출석하면 1점으로 인정해 주었다. 이 점수는 나중에 과거 시험을 응시할 자격 기준으로 활용했다.
註18
삭지(朔紙)는 성균관 유생과 호조나 선혜청에 다니는 벼슬아치들에게 다달이 주는 종이를 말함.
註19
왕의계는 형양왕(衡陽王) 의계(義季)이고, 유응지(劉凝之)는 남조 송나라 은사이다. 형주에 기근이 들자 형양왕 의계가 혹시 유응지가 굶주릴까 염려하여 10만 전을 보내니, 유응지가 크게 기뻐하며 그 돈으로 시장 골목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송서(宋書)』권 93 은일열전(隱逸列傳)
註20
당나라 육지(陸贄)가 벼슬에서 물러나 모친을 뵈러 돌아갈 때, 수주자사(壽州刺史) 장일(張鎰)의 명성을 듣고 방문하여 나이를 뛰어넘어 사귀는 망년(忘年)의 우의를 맺었는데, 작별할 때 장일이 100만 전을 주며 모부인의 반찬값에 쓰라고 하자, 육지는 새로 만든 차 1관(串)만 받았다고 한다. 『구당서(舊唐書)』권139 육지열전(陸贄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