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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학관.한국시낭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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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문학관 스크랩 모운정 이야기
지리산문학관.지리산시낭송축제 추천 0 조회 109 18.01.25 12: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모운정(慕雲亭)
소 재 지 :  의성군 다인면 달제리 45답
(원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달제3리 45답)
건 축 주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건축시기 :  1928년[중건(重建)]
소 유 자 :  경주 최씨(崔氏) 문중

건축 이야기
모운정(慕雲亭)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건립한 정자이다.

건축 구성
모운정(慕雲亭)은 경사진 대지 위에 축대를 쌓아 올린 후 방형의 토석담을 둘렀는데, 전면에는 사주문(四柱門)을 세워 장자로 출입케 하였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좌측에 온돌방 2칸을 두고 우측에는 우물마루를 깐 개방된 당(堂) 1칸을 연접시켰으며,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고 퇴칸의 전면에는 계자각(鷄子脚)을 세운 헌함(軒檻)을 설치하였다. 가구(架構)는 오량가(五樑架)의 홑처마집이다.

현판
모운정(慕雲亭)
경오(庚午)년에 소암(小巖) 박두호(朴斗浩)가 쓰다.
귀낙헌(龜洛軒)
경오(庚午)년에 소암(小巖) 박두호(朴斗浩)가 쓰다.
모운정기(慕雲亭記)
11세손 최영응(崔榮應)이 짓다.

 

누정 이야기
- 최치원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모운정
모운정(慕雲亭)은 옛 양양군(襄陽郡)[예천군의 별호] 현동리(峴東里)에 지어졌다고 한다. 모운정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추모하기 위하여 감찰공(監察公) 최명후(崔明厚)가 처음 세웠다. 이후 세월의 풍파에 퇴락해진 정자를 경주최씨 관가정파(觀稼亭派) 문중의 후손들이 중의를 모아 1928년에 중건하였다. 최치원이 살았던 시기의 시대적 상황은 신라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닌, 당시 제국의 면모를 갖췄던 당나라와 함께 맞물려 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 있었던 17여년간 당나라는 격동과 혼란의 시기였다. 다채로운 문화가 모여드는 대제국의 영화는 지속되지 못하고 현종과 양귀비의 사치로 인하여 당제국의 기강은 문란해져 있었다. 이를 노린 절도사 안록산의 난으로 시작되어 사사명의 난에 이르기까지의 지속된 반란으로 정치 ? 경제가 약화되면서 왕권은 권위를 상실했다. 게다가 당 말엽에 이르러서는 당쟁과 지방에서는 황소의 난으로 왕조의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온 후 최치원이 보게 된 신라의 상황 또한 당나라 못지않게 혼란기에 직면하고 있을 시기였다. 이미 신라 사회는 수차례 왕위 쟁탈전으로 왕위 계승에 있어 적자 계승의 원칙이 무너짐에 따라 지도층의 권위가 무너져 있었으며 진성여왕의 실정으로 인한 기강의 문란, 지방 호족의 성장과 이중수탈로 인한 농민 반란으로 사회질서는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여러 문제에 따른 지배계층의 약화와 더불어 ‘골품제에 의한 인재등용 방법’이 사회 지배계층간의 위화감을 조성한 것도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신라시대 대문호이자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신라말 3최(崔)로 불리었던 최치원은 골품제의 신분적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자신의 개혁의지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둔의 길을 택한다.


관련인물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 857∼?)
신라 말기의 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의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본관은 경주이며, 최견일(崔肩逸)의 아들이다. 869년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가 되고,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879년 황소(黃巢)의 난 때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885년(헌강왕 11)에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가 되었으나 국정의 문란함을 통탄, 외직을 요청하여 지방의 태수를 지냈다. 893년 견당사(遣唐使)에 임명되었으나 가지 못했고, 이듬해 시무10조를 상소하여 이를 시행케 하고 아손(阿飡)이 되었다. 그 후 난세(亂世)를 비관(悲觀)하여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여생(餘生)을 마쳤다고 한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追贈)되고, 문묘(文廟)에 종향(從享) 문창후(文昌候)에 추봉(追封)되었다. 글씨에는「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는『계원필경(桂苑筆耕)』?『중산복궤집(中山覆?集)』?『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등이 있으며, 시작(詩作)으로는『금체시(今體詩)』?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잡시부(雜詩賦)』등이 있다.

주변경관
- 모운정이야기
삼분리를 지나 비릿재를 넘어 달제3리로 접어드는 길을 따라 오면 한적한 곳에 달제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주위가 산으로 둘러져 있어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감돈다. 마을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주위에 논과 밭이 보이고, 비교적 넓은 공터가 있는데, 그 공터 바로 옆에 모운정(慕雲亭)이 함께 위치해 있었다.
모운정은 경주 최씨 관가정파(觀稼亭派)의 시조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후손들이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인데, 공터의 반대편에는 정문이 있는데,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정문의 주위에는 고추밭이 있다. 공터에서 들어가는 입구는 좁은 쪽문이었다. 쪽문을 통해 들어간 모운정은 아담하지만, 멋스런 고풍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팔작지붕의 옆에는 현대식으로 꾸민 보조지붕이 함께 있었는데, 햇볕과 비,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듯 보였다. 정자안에는 큰 참나무 2그루가 정문의 양쪽에 듬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으며, 참나무 2그루는 정자와 함께 세월의 나이를 머금은 듯 가지들은 정자의 바깥쪽까지 울창하게 뻗어 있다. 정자의 동쪽에는 마루가 있어 무더운 여름에 그 마루에서 더위를 식혔으면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정자는 현재 달제마을 어른들의 강학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정자안에 있는 각각의 현판들은 나름의 멋스러운 필체로 정자의 옛스런 분위기를 한껏 살려주고 있다.

마을이야기

의성 > 서북권 > 달제리
- 1600년경 선조때 경주인 최명후(崔明厚)가 개척한 마을 달제리
의성군 다인면(多仁面)은 동으로 곤지봉(坤地峰)과 문암산(文巖山)이 맥을 높게 이루어서 안사면(安寺面)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상주시 중동면(中東面), 예천군 풍양면(豊壤面)에 접한다. 남으로는 단북면(丹北面), 북으로는 비봉산(飛鳳山)이 높고, 그 너머로 낙동강이 서쪽으로 흐르며, 예천군 지보면(知保面)을 건너다 본다. 비봉산과 문암산등 큰 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구릉성 평야지대이고 토질 또한 황색점토질이라 농경지로 적합니다.
달제마을은 조선시대 때 서울로 과거 보러 가는 사람이 이 마을에서 쉬어가면 통달(通達)한다하여 달동(達洞)이라 한 달(達)과 현 달제(達堤) 1리 양지산을 바라보니 황금이 날 것 같았고, 그 산 모양이 길게 제 방과 같아서 금제(金堤)라고 한 제(堤)를 합하여 달제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모운정(慕雲亭)이 위치한 달제(達堤) 3리(里)는 1600년경 선조때 경주인 최명후(崔明厚)가 이 마을을 개척했고, 그 후 영월인 신동주(辛東柱)가 예천군 개포(開浦)에서 이주 정착하였다. 당시 마을 앞산에 영월 신씨의 모정이 있어 모정이라 부르다가 그 후 변음으로 모지라고 하였으며, 모(茅)자는 모(毛)와도 뜻이 통하므로 풀이 우거진 골짜기라 하여 모창(毛昌)으로 개칭하였다.
달제마을 입구 개울을 중심으로 여러 그루의 교목이 있다. 북쪽에 있는 나무는 동신목이고, 남쪽에 있는 나무와 인근에 있는 나무는 풍치림이다.
달제마을에는 예로부터 전설 2가지가 전해내려 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마을 입구 나무 밑에 가로 약 70cm 세로 약 1m 둘레 약 2.8m의 거북모양의 돌이 있었는데, 거북의 꼬리가 자기 마을로 향하면 길하다고 생각하여 이 마을 사람과 서쪽 마을 간에 서로 돌 거북의 꼬리를 자기마을로 향하여 놓도록 하기 위해 실랑이를 벌렸다고 한다. 거북이 상대방 마을의 기운을 먹고 자기 마을에 배설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 한다.
두 번째는 1800년경 모창에 이동지라는 700섬지기의 부자가 살았는데, 주위에 부자라는 소문이 퍼지자 항상 집안에 손님이 많이 드나들어, 귀찮은 나머지 어떤 승려에게 손님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을 물으니 앞산에 있는 돈 바리 바위가 보이지 않도록 막으면 된다하여 몇 달 공사로 둑을 쌓으니 곧바로 손님이 줄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바위가 집안에 영향을 주었다하여 돈 바리 바위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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