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교리의 걸림돌 2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개신교 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로부터 유래한 이 말은, 세상사와 담쌓은 채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하거나 거룩한 느끼만을 추구하는 신앙이 자칫 맹목적이고 이기적일 수 있다는 경고로 많이 인용됩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도 비슷한 맥락에서 주목받아왔습니다. 신앙의 공동체적 차원을 잊어버리고 지나치게 개인 구원에만 집착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반성은 적어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신앙인에게 필수적인 몰음이었다.
그런데 바르트가 이야기했던 원래의 뜻은 조금 달랐습니다. 1966년 타임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바르트는 성경과 신문 둘 다 읽되, 성경을 통해 신문을 해석하라고 권고합니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진실을 전해주는 말씀이지요. 이 사랑을 기본으로 두고 그로부터 세상사를 해석하라는 것이 바르트의 권고였습니다. 달리 말하지만,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에 성경을 끌어다 붙이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삼고 그 기준으로 시사를 논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당대의 다수 신학자들이 자유주의와 국가 이데올로기라는 시류에 휩쓸려 전쟁을 옹호하고 나서는 이율배반의 상황을 목격한 뒤에 얻은 깨달음이었지요.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려는 유혹은 사실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닦아 드렸을 때, 유다 이스카리웃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고 투덜거립니다만. 요한 복음사가는 그 속내를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라고 폭로합니다.(요한 12,3-6참조)
사실 어떤 정책이나 정치적 방향성도 완전히 가치중립적일 수 없고, 반드시 어떤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이해관계를 숨기기 위해서, 또는 미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장치들이 동원됩니다. 혹자는 이를 프레임이라 부르고, 명분이나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나 교회의 가르침을 이런 프레임이나 이데올로기를 위해 끌어들이는 일은, 신앙의 외피를 쓰고 자기 이해를 관찰하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다양한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언론이 제 각각의 목소리를 내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검증되지 않는 가짜 뉴스가 떠도는 상황에서 신중하고 현명한 판단이 더욱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교리를 실천하는 일은 영성의 눈으로 시사 문제를 다룰 내적 준비를 갖추고,
하느님의 사랑, 특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선포할 것인지 고민하며,
그 목표에 이르기까지 어떤 수단을 사용해야 그리스도인다운 실천이 될 것인지 숙고하는 가운데서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박용육 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2018년 전교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