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31일 토 맑음 (아내의 지팡이)
아침에 아내가 접견을 왔다. 불편한 다리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다 내 잘못인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하다. 처형처럼 남편이 여유가
있었으면 저리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울적해 진다. 어릴 적에 박근배라는 소아마비에
걸린 친구가 있었다. 우리 집 근처의 쌀가게 집 아이였다. 아침
등교시에는 쌀을 배달하는 아저씨가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왔지만 하교 시에는 우리들이 업어서 집에까지 바래다 주곤 했다. 돌아가면서 업어주기로 했지만 이 친구를 업어주는 일은 노상 내 차지가 되곤 했다. 학교 가는 날이면 어린 아이가 같은 몸집의 어린 아이를 업고 5리
길을 걸어 다녔다. 선생님과 어른들은 나를 칭찬했지만 난 친구를 업고 다니는 것이 너무 지겹고 싫었었다. 언젠가는 내게 너무 당연한 듯이 업히는 그 친구가 얄미워서 집으로 오다가 길에다 팽개치고 혼자 온 적이 있었다. 난 지금도 그 날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럽고 후회가 된다. 이
친구에게는 그 날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서글픈 하루 중에 하나였을 거라고 짐작한다. 우리가 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하루는 이 친구가 술에 만취되어 우리 집을 찾아온 적이 있다. 그 날 그는 내가 자기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자신은 평생에 자기 힘으로 두 발이 동시에 땅에서 떨어져
공중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고 하며 갑자기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냥 생각해 보았다. 평생 한 번도 하늘로
뛰어오를 수 없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아내는 학창시절 춤을 잘 추었었다. 축제 때가 되면 의례 포크댄스
같은 춤을 추곤 했는데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내 아내를 파트너로 불러 시범 교습을 하곤 했었다. 그럴
때면 본관 2층 창문으로 내려다 보이는 잔디 밭에서 경쾌하게 춤을 추는 아내의 모습을 외롭게 지켜보곤
했었다. 재작년인가에 공동체의 밤 오프닝으로 아내가 한별이와 함께 자이브를 함께 추는 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 보았었다.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아들과 아내가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운 기억으로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아내가 계속 춤을 출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무릎 관절에 이상이 생겨 연골주사를 6개월 주기로 일주일 간격으로 3번씩 맞을 때 왜 근본적인 치료를 할 생각을 못했을까? 몸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지만 무엇보다 아내의 몸에 그 만큼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예전에 아내가 갑상선 항진증으로
몸이 반 쪽이 되었을 때도 나는 아내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었다. 숨이 차서
잘 걷지 못하고 자주 사소한 일에도 신경질을 내는 것만 탓했었다. 어느 날 옛날 사진을 들여다 보고
나서야 몸이 너무 지나치게 말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내가 나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었다.
아내가 다시 관절이 회복되어 지팡이 없이도 걸을 수 있고 가벼운 춤도 출 수 있기를 바란다.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통나무 같이 무딘 몸이지만 함께 춤도 춰줄 거다. 제발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아내를 업고 다녀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다시 어린 시절 내 등에 업혔던 친구가 기억날 거다. 내
아내를 업고 다닐 수 있을 만큼 내가 튼튼해야 할 텐데.
아들이 엄마가 만일 여유 있는 남편을 만났다면 품위 있는 귀부인의 자태로 평생을 살 수 있었을 거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평생 자기 옷을 자기가
스스로 사 입은 적이 별로 없이 처형이 입다 준 옷들을 받아서 입고 살면서도 내가 보기에는 고상한 모습이었다. 늘
음악을 사랑하고 전통적인 공예를 즐겼던 아내가 더 건강해 지기를 기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