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시인의 발문(跋文)이 박준 시인의 시를 감상하는 데 약간의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다.
박준이 선택한 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서정(Lyric)'이다. 이 오래되고도 아득한 단어, '서정'의 뒤편에는 악기가 있다. 서정의 노래를 부를 때 그 노래를 동반하는 악기는 현악기 리라(Lyre)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현을 종종 짐승의 내장으로 만들었다. 양의 내장을 잘 씻어서 산(酸)에 담갔다가 재로 씻어서는 길쭉하게 잘랐다. 그것을 말렸다가 유황에 넣어 표백했다고 한다. 산과 재와 유황이라는 극악한 지옥과, 시간이라는 무표정한 얼굴을 통과한 짐승의 내장을 쓰다듬을 때 나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그것을 우리가 '서정'이라는 오래된 단어의 영혼으로 가정할 수 있을 때 박준이 쓰는 시들로 들어가는 입구는 조금 넓어진다.
저녁 찬거리는 있냐는 물음에 조금 머뭇거렸습니다 민박집 주인은 턱으로 언덕 채마밭을 가리킵니다
나는 주인에게 알부민 양철통을 재떨이로 쓰고 계시던데 혹시 간(肝)이 안 좋으시냐 물으려다 말고 언덕을 올랐습니다 근처에 분명 고추밭이 있을 것 같은데 언덕에서 헤매입니다
언덕이 튼 살 같은 안개를 부여잡고 있을 때 반팔을 입고 나가기로 한 조금 전을 후회했다고 언덕이 언덕을 모르고 있을 때 제 몸의 한기를 그 자리에 벗어두고 떠난 그녀를 생각했다고 말하기로 합니다
변심한 애인들의 향기는 좋고 나는 살아서 나를 속이지 못했다라고도 말하기로 합니다. 덧셈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간밤에는 달게 잤습니다, 라고 연이어 말할 때 나는 저녁의 억양과 닮아갑니다
나는 혼잣말을 할 때면 꼭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오래 비어 있던 내 손을 보고 있었는지 주인이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가파른 경사에 닿기 전에 서둘러 상추 몇 잎을 따 언덕을 내려갑니다
방으로 돌아와서는 나도 같이 텅 비어서 비어 있는 상(像)들이 누군가를 부를 때 짓던 표정들을 따라 지어보기도 했습니다 - 박준, <언덕이 언덕을 모르고 있을 때> -
빛 하나 들여보내는 창(窓)이면 좋았다 우리는, 같이 살아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네가 피우다 만 담배는 달고 방에 불 들어오기 시작하면 긴 다리를 베고 누워 국 멸치처럼 끓다가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 정도의 글귀를 생각해 너의 무릎에 밀어 넣어두고 잠드는 날도 많았다 이불을 개지도 않고 미안한 표정으로 마주앉아 지난 꿈 얘기를 하던 어느 아침에는 옥상에 널어놓은 흰 빨래들이 밤새 별빛을 먹어 노랗게 말랐다 - 박준, <광장> -
그림자가 먼저 달려드는 산자락 아래 집에는
대낮에도 볼을 끄지 못하는 여자가 살고
여자의 눈 밑에 난 작고 새카만 점에서 나도 한 일 년은 살았다
여럿이 같이 앉아 울 수도 있을 너른 마당이 있던 집
나는 그곳에서 유월이 오도록 꽃잎 같은 책장만 넘겼다
침략과 주름과 유목과 노을의 페이지마다 침을 묻혔다
저녁이 되면 그 집이 불빛은 여자의 눈 밑처럼 돋아나고
새로 자란 명아주 잎들 위로 웃비가 내리다 가기도 했다
먼 능선 위를 나는 새들도 제 눈 속 가득 찬 물기들을 그 빛을 보며 말려갔겠다
책장을 덮어도 눈이 자꾸 부시던 유월이었다 - 박준, <유월의 독서> -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 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 보았다 - 박준, <환절기> -
남진이 나훈아보다 좋다는 이야기를 이제 어디서 누구한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오래된 유원지로 갑니다 유원지 강변에는 하나는 자신 있는데 두 개는 정말 모르겠어 하며 고개를 기울이고 라면 물을 맞추는 여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냄비 옆에는 우리의 걸음 안으로 떨어진 해가 있고 그 옆에는 애호박잎 깻잎들이 잡히지도 않은 피라미나 모래무지를 기다리고 그러면 저는 어느 낡은 대문 같던, 여자의 앞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바람 소리들을 듣다가 어두워지는 강 건너를 궁금해할지도요 낮게 자란 뚝새풀 사이에는 물새 발자국 몇 개도 찍혀 있겠습니다 기색도 없이 웃음을 터뜨리던 여자나 우리가 보낸 여름 같은 것들은 새의 걸음을 따라 하다 갑자기 거세진 강물에 놀라 날아올랐겠고요 저는 강변에 텐트를 치고 누가 문을 열어젖힐까 걱정하면서 젖은 몸을 꼭 안고 저녁잠이 들고 싶었습니다 - 박준, <오래된 유원지> -
오월 천변(川邊)에서는 멀리 보는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보리 이삭이 패기 시작하면 숭어는 겨울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뜹니다
천변의 긴 밭에서
새들은 어제 심은 들깨씨를 잘도 파 물어갔고요
노인은 막대기에 양철통을 들고 밭으로 나가
새들을 쫓다가 졸다가
가져간 찰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새로 울고 싶은 오월의 밤하늘에는
날아오른 새들이 들깨씨를 토해 놓은 듯 별들도 한창이었습니다 - 박준, <별들의 이주(移住) --- 화포천> -
정원상회 돌아 만리장성 옆을 지날 때면 춘장처럼 새카만 손톱 밑이 남기는 그닐거렸습니다* 달 번지(番地)에 꽃이 필 때까지는 하루에 두세 번씩 올라야 하고요 영동선을 타고 온 검은 씨앗들이 실핏줄 같은 골목에서 멈칫거리면 아버지 등지게 지고 엄마는 집게로 나르고 남기는 리어카를 지킵니다 탄은 수직으로 쌓는 것이 아니라 탄과 탄을 서로 기대게 쌓는, 자세히 보면 그것이 계단 같아 달 번지의 사람들은 탄을 밟고 담을 넘기도 했습니다 리어카는 비탈을 내려옵니다 모두 하얀 이빨이 닮아 있습니다 집집마다 두고 온 탄이 저 노을처럼 검붉어 타고 있겠습니다 허면 삼천리가 봄처럼 따듯해져서 내일 아침이면 살구색 재꽃들이 달 번지의 고개를 타고 달까지 피어오르겠습니다 - 박준, <꽃의 계단> *그닐거리다: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살갗에 근지럽고 저릿한 느낌이 자꾸 들다.
눈을 감고 앓다 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새이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들을 소리 내보거나
역(驛)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러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 넣고 있었습니다 - 박준, <눈을 감고> -
좁은 길 가장자리가 소란하고 밝다
불 꺼진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잠시 붐비는 일은 생장한계점 근처에서 자라는 전나무들이 유난히 키가 큰 이유처럼 간단하다 좋은 골목은 침엽수림을 닮았다가 반지하 방의 작은 창들을 닮아간다
너는 금속 세공사의 아들이었고 너는 아파트 수위의 아들, 나는 15톤 덤프트럭 기사의 아들이었으므로 또 새봄이 온 데다 공업고에 가야 했으므로 우리는 머리색을 노랗게 바꿔야 했다
너는 졸업식 날 과학실에서 알코올램프를 들고 나왔고, 너는 맥주를 샀고, 나는 대중목욕탕에서 남성용 스킨을 훔쳐 나왔다 우리는 머리털이 빠지고 이마가 헌 채로 범용 선반 기계 앞에 섰다
경품 게임기 업자들은 기계 위에 빈 포장 상자들을 쌓아두기도 한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다시는 화(火)를 당하지 않는다 해서 오래전 대추나무 아래서 돌탑을 쌓던 장돌뱅이들의 손끝처럼, 대추나무 도장을 바라보는 저 눈들이 떤다
경품을 손에 쥐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걸음은 전자식 만보기로 재지 않아도 안다 그들은 걸음을 아껴 골목으로 사라진다
골목에서 중력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시야(視野)였으므로 나는 남성용 스킨로션 세트나 대추나무 도장, 전자식 만보기 대신 골목에서 만난 눈동자를 내 방으로 집어온 적이 있다
작은 창으로 바라본 하늘엔 봉제선 같은 별들이 두둘두둘 많다 수많은 별들이 저마다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별보다 많은 눈동자들이 어두운 방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내 창에 골목에서 만난 눈동자를 잘도 그려 넣었다 - 박준, <잠들지 않는 숲> -
길눈이 어두운 겨울이나 사람을 잃은 사람이 며칠을 머물다 떠나는 길
떠난 그 자리로 가난한 밤이 숨어드는 길
시래기처럼 마냥 늘어진 길
바람이 손을 털고 불어드는 길
사람의 이름으로 지어지지 못하는 글자들을 내가 오래 생각해 보는 길
골목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림자로 남고
좁고 긴 골목의 끝을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다 지새워지는 길
달이 크고 밝은 날이면 별들도 잠시 내려와
인가(人家)의 불빛 앞에서 서성거리다 가는 길
다 헐어버린 내 입속처럼 당신이 자주 넘어져 있는 길 - 박준, <입속에서 넘어지는 하루> -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머리맡에 있던 초코파이 상자를 품에 안은 일로 그날을 기억합니다
한 여덟 시간 만의 공복이었을까요 상자의 절취선을 뜯어 올라가면 으드드득 열두 개의 검은 달이 떴더랬습니다
네 개는 점심으로, 네 개는 저녁, 아침 네 개는 후일담처럼 찾아오던 새벽에 먹는 것이었는데 고객 사은 행사로 들어 있던 나머지 하나는 제가 언제 먹어야 했을까요
지구는 둥그니까 그 초코파이 손에 꼭 쥐고 자꾸 걸어 나가면 어머니가 손님들이 벗겨 먹고 있는 맥반석 계란, 그 숫자를 세고 있을 산호사우나도 나왔습니다
사우나 앞에서 봉지에 녹아 붙은 초코파이를 들고 바라본 연신내의 저녁은 목욕탕 같았습니다 길의 주름마다 어둠이 불어 있고 그 어둠을 밀어내다 배가 고파졌습니다, 자주 벌거벗었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던 길 동그랗게 만든 초코파이, 봉지에 적힌 정(情) 자를 검지로 말고 희망 소비자 가격 글자를 중지로 말아 투수 최동원처럼 한쪽 다리를 높이 올려 아랫동네로 던지면
무엇을 생각하거나 궁금해하는 일이 우리가 희망하는 일이 될 것만도 같은, 그래서 조용히 밤을 외우면 곧 찾아오는 어둠이 지나간 우리의 밤들과 함께 담겨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 박준, <희망 소비자 가격> -
오랫동안 기별이 없는 당신을 생각하면 낮고 좁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울음이 먼저 걸어 나오더군요
그러고는 바쁜 걸음으로 어느 네거리를 지나 한 시절 제가 좋아한 여선배의 입속에서도 머물다가 마른 저수지와 강을 건너 흙빛 선연한 남쪽 땅으로 가더군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땅 황토라 하면 알 굵은 육쪽마늘이며 편지지처럼 잎이 희고 넓은 겨울 배추를 자라게 하는 곳이지요 아리고 맵고 순하고 여린 것들을 불평 하나 없이 안아주는 곳 말입니다
해서 그쯤 가면 사람의 울음이나 사람의 서러움이나 사람의 분노나 사람의 슬픔 같은 것들을 계속 사람의 가슴에 묻어두기가 무안해졌던 것이었는데요 땅 끝, 당신을 처음 만난 그곳으로 제가 자꾸 무엇들을 보내고 싶은 까닭입니다 - 박준, <해남으로 보내는 편지> -
술잔에 입도 한번 못 대고 당신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 많은 술을 왜 혼자 마셔야 하는지 몰라 한다 이렇게 많은 술을 마실 때면 나는 자식을 잃은 내 부모를 버리고 형제가 없는 목사의 딸을 버리고 삼치 같은 생선을 잘 발라먹지 못하는 친구를 버린다 버리고 나서 생각한다
나를 빈방으로 끌고 들어가는 여백이 고맙다고, 청파에는 골목이 많고 골목이 많아 가로등도 많고 가로등이 많아 밤도 많다고,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고, 북방의 굿에는 옷[衣]이 들고 남쪽의 굿에는 노래가 든다고
생각한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버릴 생각만 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한다
술이 깬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버리지 못한다 술이 깨고 나서 처음 바라본 당신의 얼굴이 온통 내 세상 같다 - 박준, <당신이라는 세상> -
내가 연안(沿岸)을 좋아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을 나에게조차 내어주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던 그날 아침 손끝으로 먼바다를 짚어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의 이름을 말해주던 당신이 결국 너머를 너머로 만들었다 - 박준, <세상 끝 등대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