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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제독이 이끄는 절대적 열세의 영국해군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해군이 지원하는 스페인 무적함대를 트라팔가 해전에서 궤멸시켜 버렸다. 세계 전쟁사에 위대한 승리로 기록된 이 사건을 기점으로 영국은 사실상 당대 최강의 국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이 여세를 몰아 영국은 해외 식민지 건설에 박차를 가해서 마침내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에 걸쳐 유니온 잭(영국 국기)은 온 세상에 나부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식민지 건설의 배후에는 영국인 B.디즈레일리와 J.챔벌린, 그리고 케이프타운 식민지 관리인이었던 C.로즈가 있었다.
이들은 고대 이집트 시대에서부터 계획은 있었으나 실행되지 못했던 수에즈 운하를 프랑스가 레셉스(Ferdinand Marie de Lesseps)로 하여 운하를 완공하게 되자,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새롭고 원대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20년 전에 인도를 점령하여 그곳으로부터 목화를 재배하고 무연탄을 채굴하여 영국까지 해상 운송하여 방직산업을 발전시켜 왔는데 그 과정에서의 운송비용이 큰 부담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 타개책을 운하건설에서 찾았다.
운하의 건설은 많은 시간과 천문학적 비용과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 이에 영국은 운하의 건설비용에 국운을 걸고 엄청난 돈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이집트 정부가 발행하는 운하건설 주(株)를 무한정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운하가 완성되자 운하 운영의 주체를 놓고 영유권자인 이집트와 건설사인 프랑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자 거대 지분을 차지한 영국이 운하의 운영권을 놓고 경쟁에 뛰어 들었다. 심지어는 군대를 동원해 이집트를 점령해 버리는 사태에 이르고 말았다. 부랴부랴 강대국들이 중재에 뛰어들어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통해 운하의 소유권한은 이집트에 있으나, 운영의 절대적 주권은 영국에게 있다는 조약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프랑스는 죽어라 땅만 판 꼴이 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확보한 물자를 본국으로 운송하는데 비용절감과 안전한 교통로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아프리카 최남단의 케이프타운과 연결하는 아프리카에서의 절대적 영향력 확보에 열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3C 정책’이다.
식민지 건설이 국가의 운영과 체제유지에 얼마나 유리한 조건이 되는지를 절감한 열강들이 너도나도 식민지 건설에 뛰어들게 된다, 후발 주자는 독일의 ‘3B 정책’ 이다. 그 뒤를 이어서 러시아가 남하하기 시작하였고, 그 틈을 노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를 차지해 버렸다.
해외 식민지 건설의 목표는 주로........ 식민지를 통해 자원을 약탈하고, 값싼 노동력을 징발해서 사용하며. 차지한 식민지를 새로운 식민지 건설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는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제기된 방법론이 두 가지가 있는데, 식민지를 개척함에 있어서 원주민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해주고, 이들을 제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우수한 관리를 파견하여 정복한 식민지 사회를 완전 개조시켜서 영원히 본국에 충성하는 유용한 식민 집단으로 양성시키는 것이다. 바로 일제가 우리나라에서 행했던 바로, 강대국들이 식민지에서 실제로 행했던 가장 전형적인 지배 형태인 것이다.
이와 다른 형태로는 자국민을 집단으로 식민지로 이주시켜서 원주민 지배계급을 몰아내고, 그들로 하여금 식민지 개조운동을 벌이게 해서 장차 본국과 식민지 간의 격차를 줄인 또 하나의 분국을 만드는 방법이다. 하지만 두 번째 방법은 소요 비용이 엄청날뿐더러 자칫하면 일부 동원되는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칠 수 있어서 실제로 많이 실행되지는 못했다.
하여, 그 대안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 민간 주도의 식민지 회사의 등장이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탄생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가 국가나 국왕으로부터 특허장(임명장)을 받고 현지에서 식민지를 대신 운영하는 방법으로 정책의 주체를 국가에서 민간으로 슬쩍 이양하는 방식으로 식민지배를 계속해 나갔다.
바로 이 민간 식민지 지배의 형태야말로 비인간적이며 비인륜적이며 잔혹한 수탈과 납치와 살인과 방화와 강간과..... 아비규환의 시작이었던 것이다.(오늘날의 대표적 다국적 기업인 거대한 방위산업체의 전형)
그런 과정 속에서 드디어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나타났다.
마침내 처음 베트남에 도착한 프랑스는 사이공에 둥지를 틀고 식민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사이공을 점령군 요새로 탈바꿈시킨 프랑스는 이어서 메콩강을 따라 내륙 깊숙한 곳으로 진출해 나가기 시작했다.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라오스를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급로는 길어졌고 군대는 점점 지쳐갔다.
더하여,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든 독일이 영국과 잦은 마찰이 불거졌고, 북쪽의 거대한 괴수인 소련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결국 확장 보다는 안전한 요충지가 시급했던 프랑스는 사이공으로 철수했다.
이 대목에서 참으로 아이러니한 사실은 식민지를 대하는 프랑스의 정책이 위에 열거한 식민지 점령방법 중에서 전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후자도 아닌 실로 기기묘묘한 행태였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어정쩡한 태도였을까?
나는 그것을 두 가지로 나름 파악하고 있는데, 첫째는 서구인들 중에서도 유별난 프랑스인만의 어떤 특성에서 찾았으며, 다른 하나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도 유독 특별하게 베트남만이 가지고 있는 현지사정 때문이라고 결론 내리게 되었다.
흔히 프랑스나 프랑스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멜랑꼴리(melancholy) 하다’라는 표현들을 곧 잘 쓰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아무리 오래되어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우울감’ ‘괜시리 기분이 울적하고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매한 느낌이나 기분’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멜랑꼴리하다’ 라고 표현한다.
그런 것을 꼭 낭만적이나 할 수는 없겠지만 서도, 아무튼 감성이 풍부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는 표현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흔히들, 그런 감성적인 사람에게는 독립투사와 같은 결기나 민족주의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과감한 희생정신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어디까지나 나는 추측하고 있다.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휩쓸려 부랴부랴 인도차이나에 상륙한 프랑스 사람들의 상황은 도대체 어떠했을까?
유럽의 근현대사가 온통 민족이나 국가나 종교 간의 분쟁으로 전쟁을 가슴에 껴안고 살아온 처참하고 암울함의 연속이었다.
산업의 눈부신 발달로 생산은 급속도로 늘어갔고 도시와 국가의 발전으로 시장은 점차 무역으로 까지 발전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안착된 자본주의는 가히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선택하고 누릴 수 있는 지상 최고이자 마지막 사회제도로 누구나가 여겼다. 이제 곧 세상은 지상낙원처럼 될 것임을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생산을 늘어났고 시장은 활성화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사람들의 생활은 점점 궁핍해져만 가는 것이었다. 자본가들이 더 큰 이윤추구를 위해 전 생산과정을 쥐어짜고 또 쥐어짰다. 이에 사람들이 모여서 항의를 하면 자본가가 거둬들인 이익을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정치 지도자와 군인과 경찰과 공무원에게만 뇌물로 바쳤다. 그러자 자본가들의 점점 거세지는 횡포가 오히려 정당성을 띠게 되고 합법화가 되어가는 것이었다.
‘빵을 달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에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빵을 달라.’
성난 프랑스 군중들은 바스티유로 몰려가 부패한 정권과 자본가에 의해서 억울하게 갇혀있는 민중지도자들을 구해주기 위하여 거대한 권력의 상징인 바스티유를 부숴버렸다.
프랑스 혁명이 발생했고, 당연히 혁명은 민중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제 부패하고 무능한 위정자들을 척결해 버리고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함께 힘들어 하고 함께 기뻐하며 노동의 결과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가 실현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희생으로 이룩한 프랑스 혁명은 불과 얼마 못가서 허망하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혁명을 종결짓고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야 하는 새로운 정부(지도자) 구성에 실패한 것이다. 거대한 악을 힘들여 도려냈더니, 때를 기다려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새로운 악의 씨앗들이 사방에서 들이닥쳤던 것이다. 이 새로운 악의 씨앗들 끼리 내분이 일어나고....... 세상은 혁명이전의 시대로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다. 아니 세상은 혁명 이전보다 더 혼란스럽고 과격해지고 피로 얼룩져 갔다.
혁명의 말기적 증상이 만연해 지자....... 이번엔 군대가 세상을 새롭게 정화하겠다고 총과 대포를 끌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 부대의 젊은 지휘 장교가 바로 나폴레옹이다.
프랑스를 점령한 나폴레옹의 군대는 잔혹하게 부패한 자와 반대세력에게 단두대로 숙청을 감행했고, 이제 프랑스는 혁명 이전의 부패하고 무능한 왕정시대보다 더 참혹한 탄압과 독재 권력이 새로운 형태로 진일보한 또다른 과거속의 왕정시대로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
나폴레옹이 세계 정복을 추진하면서 프랑스의 남자들은 무조건 전쟁터로 끌려 나가야 했으며, 남아있는 여인들과 노약자와 어린이들은 천문학적인 전쟁비용을 마련해야만 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나폴레옹과 지휘부의 눈부시도록 찬란한 업적으로 빛났지만, 군중들의 삶은 깊고 깊은 수렁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했고, 패전국이 된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은 전쟁의 책임과 배상을 떠안아야만 했다. 프랑스는 영락없는 쌩 거지꼴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군(영국. 독일. 스페인. 러시아 등등)이 프랑스를 난도질해서 갈기갈기 찢어 나누어 갖기 시작했다. 전쟁의 막대한 채무는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귀족과 평민들 간의 반목과 마찰은 여전했고, 종교와 민족 간의 싸움질이 이어졌고, 구태의 청산을 앞세워 서로 간에 밀고가 횡행하였고, 결국 국외로 도망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믿을 수 없는 시대였던 것이다.
이 고비를 겨우 넘기고, 프랑스가 겨우 다시 국가로서의 위용을 어느 정도 되찾아가고 있을 즈음에 프랑스가 느닷없이 인도차이나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든 것이다.
하여, 베트남을 차지한 프랑스 점령자들의 생각과 태도는......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타의 식민지 지배 통치 방법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분명하게 달라 있었다.
이것을 내 방식대로의 표현방법으로 설명하자면........ 베트남을 점령한 프랑스 식민지배 계급층의 마음속엔 애국심이니 민족주의니 하는 것들이 찾아 볼 수 없었다. 힘들게 살아남아서 우여곡절 끝에 식민지로 빠져나와 겨우 남부럽지 않게 살 정도가 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고국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느냔 말이다. 돌아가 보았자 전쟁의 상처에서 채 회복되지 못한 상흔뿐이 너저분한 프랑스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거대한 농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관리로서 고위직이 보장된 것도 아니고, 귀족의 지위나 높은 명예를 가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식민지를 차지한 지배세력에 편승해 이곳의 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누가 보아도 현명한 판단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베트남에 상륙한 지배자들은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보다, 이대로 식민지에서 지배세력으로 정착하기를 열망하게 되었으며, 이는 식민지 침략의 이유인 ‘인력과 자원을 수탈해서 본국으로 운반하여 국가 살림을 보다 풍요롭게’라는 가장 기본적 원칙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가져다 바치면 남의 것이요, 거두어서 가만히 쌓아놓으면 내 것이 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당시의 사정이 공공 인프라 구축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식민지는 점령했으나, 도시도 항구도 도로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수탈과 약탈을 해 보았자 본국으로 제대로 수송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식민지 국가들 마다 제각각 상황이 다르겠지만, 당시로서 베트남에서 거둬들일 수 있는 것이라야 기껏 쌀과 목재뿐이었다. 거대한 목재를 기껏 선박에 실어보아야 얼마나 싫겠는가? 해상 운송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비되는 점에 비교하면 목재는 전혀 이윤이 생기는 사업이 못되었다. 다음으로 베트남이 가진 것이 쌀인데...... 쌀은 오랜 시간의 해상운송에서 무게만 무겁고 쉽게 변질되거나 썩기가 십상이었다. 더하여 프랑스인의 식생활 문화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높지 않은 이유도 분명 있었다.
아주 쉽게 한 번만 뒤집어서 생각해 보자.
영국과 독일이 아주 치열하게 대립하는 틈을 타서 비교적 약체였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손쉽게 차지하였다고 하지만........ 인도차이나에서 황금이나 풍부한 철광석이나 인도에 못지않게 양질의 목화가 생산되거나 당시에 커피의 절대적 주산지였다고 가정하자면....... 절대로 영국도 독일도 모른 체 마냥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한다. 어쩌면 영국과 독일의 입장에서는 이미 인도차이나반도가 무덥고 습하기만 하고, 겨우 쌀이나 좀 생산되는 별로 쓸모가 없는 지역이라는 판단이 이미 섰기 때문에 모른체 해주었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결론 적으로 베트남을 위시한 인도차이나 반도는 유럽의 열강들에 의한 식민지 정복 전쟁에서 별로 쓸모없는 지역으로 판단되어 나중까지 버려진 듯 밀려나 있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베트남은 많은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석유와 천연가스도 많이 매장되어 있으며, 히토류를 비롯한 중요한 지하자원을 상당량 가지고 있는 어엿한 자원보유국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식민통치 시대에는 이런 지하자원의 필요성이 거의 유명무실 했으며, 사회적 인프라가 전혀 구축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 지하자원을 개발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그저 무용지물로 여겨졌을 것이다. 베트남을 위시한 인도차이나는 쌀을 제외하고는 쓸 만한 것이 별로 없는 다분히 비효율적인 땅덩어리였을 뿐이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러자 이는 곧바로, 프랑스 식민통치 정부의 베트남 식민지 활용과 운영 방법에서 적나라하게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다.
프랑스는 젊은 베트남 현지인 출신들을 초급 관리로 선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식민지 지배의 실질적 활동을 하도록 교육하고 길을 들였다. 지배와 수탈에 있어서 모든 악역을 그들이 담당해 줄 것이며, 여기서 파생되는 모든 문제의 책임 또한 그들이 지게 될 것이다. 하여 그들에게는 적정선에서의 권력을 부여해 주고, 어느 정도의 부패와 축재에 대해서도 모른 척 눈을 감아주는 태도로 일관 할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 국민을 규합하려 하거나 선동하여 프랑스의 식민통치 행위에 저항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최고의 범법행위로 뿌리 채 근절시키고야 말 것이다.(어떠한가? 우리나라 일제 식민통치 36년 역사와 판박이가 아닌가?)
베트남에 정착하기로 작정한 식민지 지배세력은 그 방책으로....... 인구 조사를 시키고, 그 숫자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했다. 값싸게 사들이고 안 되면 강제로 빼앗고 하여 부를 축적하고 그것으로 이곳에 정착해서 호사를 누리고 싶었지만, 정작 빼앗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엄연한 베트남의 현실이었다. 하여 우선 세금을 착실하게 거둬들이는 것으로 지배세력의 기본적 생활과 향락문화를 유지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널려 있는 쌀을 거둬들여 점차 무역을 통한 수출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수출을 늘려도 그것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러자 식민정부가 다음 시책으로 펼친 것이 바로...... 식민지 정권이 부당하게 차지하여 독점권을 가진 아편. 소금. 술에 대한 전매권이었다. 이후로 식민지 정부는 총 수입의 약 70% 정도를 여기에서 충당하게 된다.
식민지 지배세력은 엄청난 부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돈으로 프랑스식의 관청을 짓고, 역사를 짓고 기찻길을 놓기도 하고, 각 도시마다 지배세력인 프랑스인들을 위한 극장과 카페와 최고급 빌라를 사방에 짓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프랑스 본토에서 보다 식민지 수도 사이공에서 더 화려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이 더 부자가 되고 생활이 풍요로워 질수록 피지배 하층민으로 전락한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은 궁핍해졌고, 굶주림과 마약으로 폐인이 되어갔다.
부를 축적한 프랑스인들에게 인도차이나의 습한 날씨와 무더위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난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산정의 시원한 휴양도시(힐 스테이션) 이었다. 달랏은 바로 그런 식민지 지배계급의 필요에 의해서 건설된 도시다. 다낭의 바나 힐 역시 그런 같은 필요에 의해서 건설된 휴양지 중의 하나이다.
이 상황에서 베트남 북부 예안지방 출신의 ‘판 보이 쩌우(Phan Boi Chau)' 라는 학자가 마침내 베트남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그는 ‘유이 떤 호이(Day Tan Hoi)’라는 단체를 이끌었는데 번역하면 (혁신회)가 된다.
‘대국민 의식전환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마약과 술의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애국의 시작’ 이라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한다. 국민의 정서와 가치관이 훼손되고, 중독으로 인해서 무분별하게 계속적으로 들어가는 돈을 통해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영원히 지속시키려는 것이 저들의 흉계라고 계속적인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모든 베트남 사람들의 의식과 핏줄 속에는 2천년 가까이 내려온 유교(儒敎)적 가치관과 풍습이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선과 악, 옳고 그름, 그리고 인간답다거나 인간이기에 지켜야 하는 것들과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가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체는 병들었어도 아직 정신은 살아있었던 것이다.
한 순간에 술과 마약의 유통이 급속하게 줄어드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당연하게 하루아침에 판 보이 쩌우는 식민지 정부의 최고 공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프랑스를 베트남 영토에서 영원히 몰아내자.’ ‘베트남의 자주독립을 쟁취하자.’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를 설립하자.’ 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당연히 프랑스의 반격과 태클이 들어왔다. 프랑스 식민정부는 (판 보이 쩌우)를 납치하여 하노이에서 불공정한 재판에 회부했다. 평생 노동형에 처해졌고 영원히 가택에 연금되었다가 1940년에 사망했다.
그의 가르침과 일생의 업적을 통해 수많은 학자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같은 고향출신의 후배인 호치민(胡志明)이다. 어찌되었건 (판 보이 쩌우)가 남겨 놓은 베트남의 독립이라는 유업은 결국 호치민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달랏(Da Lat)은 그런 역사의 아품을 배경으로 탄생한 도시이다. 우리는 지금 달랏으로 간다.'
베트남에는 아주 특별한 교통수단이 있다. 이름하여 슬리핑 버스(Sleeping Bus)라 불리는 베트남만의 아주 특별한 운송수단의 하나이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천상의 버스투어 체험> 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는 딱히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는...... 베트남 여행에서만 특별하게 경험해 볼 수 있는 슬리핑 버스(Sleeping Bus)의 또 다른 이름은 오픈 투어버스(Open Tour Bus)이다. 항공권 구입에서처럼 목적지가 정해지면 그곳으로 가는 버스 티켓을 왕복이던 편도이던 일단 구입만 하고나면, 출발 시간이나 중간에 환승을 언제나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선택의 문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취지는 분명 그렇게 여행선진국의 앞선 제도를 따라한 것이 맞지만, 현지사정(베트남만의 상황)에 따라 꼭 그렇게 말 그대로 약속되고 시행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주 가끔은 그 시행과정에서 엄청난 낭패를 겪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제 그 슬리핑 버스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 보자.
우선, 슬리핑 버스(Sleeping Bus)는 저렴하고 풍부한 베트남의 노동력이 있어서 가능한 여행 상품이다. 그래서 인근 라오스나 캄보디아 연결노선에 일부 사용되고는 있으나, 그 역시도 운영의 주체는 대부분 베트남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의 삼성이라든지, 미국영토 안에서의 구글이라 할지라도, 현재 베트남에서 실행되고 있는 가성비의 버스운행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지 모르겠다. 기업의 모든 수익을 오로지 슬리핑 버스 운영에 모두 쏟아 부어서도 그 실효성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여전히 의문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가족 4명은 베트남의 호치민을 떠나서 달랏으로 이동하려고 한다. 달랏까지의 이동거리는 대략 300KM가 조금 넘는데, 버스의 경우 평균 7시간의 소요시간을 잡는다. 베트남 현지의 열악한 교통사정과 장거리 이동시 중간 휴게소에서의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심야시간의 버스운행의 경우 보통 5시간 반 걸려서 도착하기도 한단다.
버스 티켓 구입은(내 경우는 오로지 해당 버스회사 티켓 부스) 길거리 여행사나 심지어 호텔 카운터에서 구입이 가능하다. 다만 모든 구입처 마다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공식 가격은 오로지 해당 버스회사 전용 티켓 부스에서만 정찰제가 보장된다. 티켓을 구입하면 출발 시간, 아니면 매표소 집합 시간이나 픽업 서비스 도착시간과 선택 지정된 좌석번호를 잘 확인하고 메모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오픈 투어 버스)의 의미에 해당되는 열린 티켓에 대한 조항이 필요한데, 이때 간혹 벌어지는 그 엄청난 패악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는 사전 예약한 데탐 거리에 있는 풍짱 버스(Phuong Trang) 티켓 부스로 향했다. 기다리면 미니버스가 여행자를 데리러 온다. 우르르 주워 담아서는 한참을 달려 새로운 티켓 부스에 내려 준다. 매번 상황이 변한다. 첫 번째 여행에는 슬리핑 버스가 직접 데탐거리 까지 들어와서 태워주었고, 두 번째는 미니버스가 호치민 외곽의 버스회사 전용터미널까지 데려가서 태워주었다. 그런데 이번엔 전혀 다른 동네의 새로운 티켓 부스에서 슬리핑 버스에 갈아 탈 수 있었다.
이 모든 비용이 이미 버스 티켓 가격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호치민에서 달랏까지의 비용은 일인당 이십오 만동(한화 약 12.500원)이다. 이 가격에 호텔까지 미니버스로 픽업하고, 대형버스로 7시간을 달려서 달랏의 풍짱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다시 미니버스로 여행자의 목적지인 예약된 호텔까지 데려다 준다. 이 모든 과정이 포함된 총 비용이 겨우 12.500원인 것이다. 우리식으로 따진다면, 한 번의 픽업 비용으로 풀 써비스가 이루어진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신발을 벗어들고 타야하는 침대 버스는 마실 물과 담요도 제공하고, 이번에 경험한 최신형은 벽걸이 미니 모니터까지 달린 것이, 영락없는 땅위를 굴러가는 저가항공사 비행기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여기 이 장거리 이동버스에는 운전기사 외에 보조 운전기사와 승객을 돌보고 확인하며 목적지에 제대로 내려주려 노력하는 승무원(차장)까지 동승한다. 이러한 과정과 동원된 버스들과 세 명의 기사 인건비에다가 비싼 기름값을 따진다면......... 상상초월, 이해불가 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는다면 절대 믿기지 않을 현실일 것이다.
베트남에는 아주 많은 버스여행사가 존립해있는데, 그중 (신 투어리스트)와 (풍짱 여행사)가 가장 대표적이라 하겠다. 베트남 전역을 가장 골고루 커버하는 전통적인 대표주자는 당연히 신 투어리스트다. 후발 주자인 풍짱 여행사는 국토 전역의 커버 보다는 주요 노선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운영방식을 채택했다. 하여, 신 투어가 호치민->무이네, 혹은 호치민 -> 달랏 노선에 일일 3회 정도를 투입하는데 반하여, 풍짱은 일일 20회 운행을 투입하여 집중 공략에 나서는 방식이다. 하여 비교적 가까운 노선은 풍짱을 주로, 장거리 노선을 신 투어리스트를 택하는 방식을 나는 선택해 왔었기, 이번에도 우리는 풍짱 버스를 이용했다.
달랏으로 향하는 노선이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붐비고 자주 정차도 일어 났다. 고산지대로 접어들면서는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면서 역시나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7시간의 예정된 이동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버렸고 출발한지 8시간이 훌쩍 지나고, 밤이 깊어져서야 겨우 달랏에 도착할 수 있었고, 곧바로 무료 셔틀을 서비스를 이용해 목적지인 숙소에 도착해 늦은 체크인을 겨우 마쳤다.
오늘 하루는 여행 기억에서 그냥 모두 지워버려도 될 것만 같다. 침대버스타고 이동한 것이 전부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슬리핑 버스를 처음 경험한 조카와 손녀가 썩 괜찮은 경험이었다고 불편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래서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남은 여행에 대해서 편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면...... 우리는 3일 후에 이곳에서 호이안까지 또 한 번 11시간의 장거리 버스이동을 해야만 하는 스케줄 때문이다. 미티미티.......ㅎㅎㅎㅎ
무사히 달랏에 도착은 했고....... 대충 허기를 모면하는 수준에서 냅다 맥주만 실컷 들이 키고 나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우리에게 배정된 방이 참 예쁘다.
로즈 하우스(Rose House)에 묵게 되었는데, 손녀가 우리에게 배정된 두 개의 방 중에서 더 예쁜 이 방을 우리에게 양보해 주었다. 하여 다음 여행지인 호이안에서의 해안가 숙소는 당연히 손녀가 우선 선택하게끔 기회를 주었다. 공평하게....
오랜 습관처럼 눈이 떠지면 무조건 벌떡 일어나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아스라이 밝아오는 새벽 미명 속에 파스텔 톤의 고운 차림의 달랏이 시양에 가득 들어온다. 아주 커다란 창을 열고 발코니로 나서니 사방에서 아주 싱그러운 바람결이 폐부 깊숙이 내 가슴을 사정없이 관통하고 지나간다.
“싱그러운 아침. 시작의 내가 있다!”라던 아주 오래된 어떤 광고의 카피가 떠오른다.
평소의 집에서 대로라면 당연히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놓을 시간이다. 그런데 지금 커피포트는 있는데 커피믹스 밖에 없다. 이럴 땐, 우아하면서도 고즈넉한 포지로 발코니에 기대서서 아직 잠자리에서 뒤척이고 있는 그녀를 위해 원두를 가는 그림도 썩 그럴싸할 것 같은데 말이다. 살며시 다가가 가만히 아내를 머리를 만지작거리니 분명 잠은 깬 것이 확실한데 좀체 일어날 기미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으로 ‘이제 나는 외출할 거야’라는 통지는 충분히 한 것이다. 부랴부랴 샤워실에서 찬물을 뒤집어쓰고는 언제나처럼......... 카메라만 달랑 손에 집어 들고는 거리로 나선다.
이제부터는 달랏의 새벽을 산책한다.
베트남의 남부에 속하는 럼동성의 중심지역에 해발 1.500m에 이르는 랑비앙(Langbian) 고원지대가 자리하고 있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일 년 내내 변함없이 선선하고 쾌청한 날씨를 유지하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유독 온갖 꽃들이 잘 자라나는 아름다운 도시로서, 여러 가지 채소와 과일을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현대적 영농방법으로 생산하여 베트남 전역에 공급하고 있는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가 바로 달랏이다.
이곳에는 본래 산악지역의 소수민족들이 모여서 살던 오지 중의 오지였다.
천혜의 환경을 가진 산악지역의 한복판에 아주 너른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그 호수의 이름이 쑤언흐엉(Xuan Huong Lake)로, 달랏(Da Lat)이라는 도시의 이름도 이 호수에서 유래되었다. 호수의 한쪽으로 랏(Lat)이라 불리던 한 고산부족이 살았고, 이 랏족이 사는 마을 한복판으로 실개천(Da, 혹은 Dat)흐르고 있어 작은 나무다리를 놓고 건너다니며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여 달랏(Da Lat)이라는 지금 도시의 이름은 ‘랏족의 하천’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오늘날에 이르러 관광도시 달랏을 홍보하면서 여러 안내책자에 달랏의 알파벳 머리글자를 풀이해서 (Dat Aliis Laetitiam Aliis Temperiem) 이라는 문장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어떤 이에게는 행복을, 어떤 이에게는 즐거움을’ 이라고 해석하면 좋겠다.
달랏은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 시절에 프랑스인들의 휴양지로서 건설되었다.
나폴레옹의 시대를 겪으면서 극심한 전쟁의 피해가 전 유럽을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전투력의 향상은 모든 강대국으로 하여금 신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도록 하였다. 아울러 전장이 아프리카까지 확대되면서 온갖 풍토병이 옮겨지기 시작했고, 전쟁터에서 새로운 질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여 이제는 신무기 개발만큼이나 전투력 상실을 막기 위하여 질병에 대한 대책으로 의학과 생물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활발하게 시도되기 시작했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따라 등장하게 되는 몇 몇 인물들을 우리는 관심 있게 주시해 볼 필요가 있다.
첫 주자는 초등학교 과학시간에도 등장하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프랑스의 생물학자 파스퇴르(Louis Pasteur)이다. 질병과 미생물의 상관관계를 처음 밝혀냈고, 분자가 광학 이성질체라는 사실을 처음 입증했다. 요쿠르트 산업에 적용시킨 저온 살균법, 그리고 광견병 백신과 콜레라 백신을 발명했다.(전부 혼자 한 것은 아니지만)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상을 처음 만들면서 기조연설에서 ‘인류 역사를 통 털어 노벨상의 의미와 가치에 준한 첫 수상자를 선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루이스 파스퇴르여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6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났기에 우리는 그에게 상을 건넬 수가 없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했었다.
그런 파스테르의 연구실에 스위스 태생은 젊은이가 어느 날 찾아왔다. 이 청년의 이름은 에밀 장 예르신(Alexander Emile Jean Yersin)으로, 이후 파스테르의 제자이자 동료로서 수많은 공동연구와 위대한 업적을 쌓게 되었다. 학계에서는 프랑스로 귀화한 훌륭한 의사이자 세균학자로 기록하였다.
예르신의 가장 큰 업적은 일본의 기타자토 시바사루로와 함께 인류 최초로 페스트(흑사병)의 원인이 되는 간균(桿菌)인 페스트균을 발견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제야 인류는 세균이라는 것이 있으며 이것들이 병을 옮긴다는 사실을 알아 챈 것이다. 더하여 예르신은 병원균이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많은 질병이 설치류를 통해서 옮겨진 다는 사실까지 밝혀진 것이다.
스승인 파스퇴르는 가끔 예르신과 다른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학자들은 말이야 연구에 매진하는 것만큼 돈을 버는 것에도 열심이어야만 한다네. 연구란 언제 끝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기에 거기에 소요되는 비용도 얼마가 될지 언제 끝이 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야. 국가나 사회가 언제까지 그 막대한 비용을 제공해 주겠는가? 연구비를 주지 않는다고 연구를 멈출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자면 스스로 연구비를 충당할 수 있는 방법 을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할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이 말의 요지를 예르신은 누구보다도 빠르고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결국, 예르신은 프랑스 정부에게 스승의 이름을 딴 ‘파스퇴르 연구소 설립’을 요청하였고, 놀랍게도 이 연구소를 식민지인 베트남에 지어달라고 요구했다. 비용이 절감되는 이유도 있었고, 질병과 세균의 연구가 자칫 실수로 프랑스 본토에 유입되는 것을 방지한다는 명분도 있었고, 다양한 풍토병의 발견과 연구가 무더운 식민지에서가 유리하다는 판단도 있었으며, 프랑스 국가차원에서는 비용절감만큼이나 이 분야의 연구에 강대국들이 뛰어들면서 연구 실적과 연구 인력의 유출을 우려하는 이유도 있었다. 하여 베트남의 나짱(나트랑)에 ‘파스테르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소장에 취임한 예르신은 베트남 전역에 창궐한 콜레라 퇴치를 위하여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새로운 질병을 조사하고, 그 해결에 필요한 방법과 약재를 조달하기 위하여 베트남 국토 전역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북쪽의 사회주의 공산당 정부인 월맹군에게 포로로 붙잡히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격기도 한다. 훗날 베트남 통일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베트남 명예시민이 되었으며, 현재 나트랑의 파스퇴르 연구소에 안장되었다.
어느 날, 베트남 남부의 고산족들만 겨우 모여서 살아가는 랑비앙산 지역에 낯선 차림의 이방인이 불쑥 찾아왔다. 먼 곳의 같은 베트남 이방인도 방문한 적이 없는 이 절대의 오지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 나타난 것이다. 콜레라 백신을 전파하고 새로운 질병을 연구하던 예르신과 베트남인 안내인이었다.
한동안 이곳에 머물다 사이공으로 돌아간 예르신은 식민지 총독(훗날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에게 랑비앙산 주변의 단키아(Dankia) 지역을 추천하면서, 거듭되는 연구 활동으로 지쳐만 가는 학자들을 위해 휴양 시설을 겸한 작은 연구소 설치를 강력하게 요청하게 된다.
폴 두메르 총독은 재빠르게 온갖 가능성을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미 다른 강대국들은 저마다 식민지에 힐 스테이션(Hill Station)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편안한 본국을 떠나 거친 식민지에서 본국정부를 위해 갖은 위험을 무릎 쓰고 맡은바 책임을 다하는 관리나 함께 따라 온 식민지 상황은 가히 최악이었던 것이다. 모든 생활물자는 부족하고, 문화생활 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낙후된 시설로 질병이 창궐하고 마지막으로 열대의 무더위는 가히 살인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영국이나 독이 등 강대국들의 식민지 영토 안에서 지대가 높은 안전한 지역을 선택하여 본국과 똑 같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휴양과 질병 치료가 목적이었다. 이것이 점차 활성화도지 식민정부들은 힐 스테이션에 아예 관청 건물까지 건설하고는, 너무도 무더운 혹서기(여름)에는 아예 일정기간(한 달씩) 식민정부 자체가 힐 스테이션으로 이사를 해서 현지에서 모든 업무를 처리할 정도였다. 영국은 인도 델리 부근의 심라(해발 2.205m)와 뭄바이 인근의 푸네(해발 580m), 그리고 북쪽 국경 인근의 다르질링(해발 2.248m)에 이미 거대한 산정 휴양도시를 이미 여럿이나 완공한 상황이었다.
두메르 총독은 예르신의 요청을 수락했다.
단키아에 산악휴양도시를 건설하기로 하고 도시 설계를 시작했는데....... 도시를 건설하자면 우선 그 지역까지 접근할 수 있는 도로 건설이 우선인 것이다. 하여 건설업자 에시엔 따르디프(Étienne Tardif)를 토목공사 총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에시엔은 강을 건너고 엄준한 산을 굽이 돌아나가면서 겨우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고원 산악지역을 빠르고 원활하게 다니기 위한 방책으로 철도 건설을 요청하여 바야흐로 철도 건설에도 박차를 가하게 된다. 5개의 터널을 뚫었고, 급경사를 오르기 위해서 지그재그 철도 건설과 톱니바퀴식 철도가 놓이게 되었다. 84km의 철도를 공사하는데 장장 30년이 걸리게 된다.
도로를 내고 철도를 부설하는 과정에서 총감독 에시르는 목표지역인 단키아 보다 커다란 호수를 끼고 고산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는 달랏 지역이 새로운 도시 건설에 훨씬 유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런 사실을 총독에게 보고 하였다.
하여 도시설계 건축학자인 에르네 에브라(Ernest Hébrard)가 부랴부랴 현장에 투입되어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결론은 달랏 지역이 더 우수하다는 판단이었다.
두메르 총독은 에브라에게 ‘호수를 끼고 실개천이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랏족의 터전' 위에 고산휴양도시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바로 지금의 달랏(Da Lat)이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건설된 산정휴양도시가 과연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남게 되었을까?
개뿔!!!! 혜택은 무슨 혜택......... 노동력 착취와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는 결과였을 뿐이지.......
달랏은 오로지 프랑스 식민지 지배층만을 위한 도시였다.
지배층의 휴식과 향락은....... 식민지 사람들의 숱한 피와 땀과 눈물과 목숨을 담보로 이룩되었던 것이다.
예르신은 스승 파스퇴르의 가르침대로 열악한 식민지의 경제사정 속에서도 꾸준하면서도 지속적인 질병연구를 위하여 연구소의 경제적 자립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여, 그 경제적 독립을 위하여 예르신은 말레이 반도에서 고무나무를 가져와 산간을 개발하고 심어서 가꾸기 시작하였다. 점차 엄청난 면적의 고무농장을 파스퇴르 연구소가 소유하게 되었다. 예르신은 이곳에서 생산된 고무를 전량 프랑스 타이어 회사인 미쉐린(Michelin)에 팔아서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자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베 베트남은 본격적인 식민정부의 약탈의 장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식민정부는 열악한 베트남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을 전부로, 소금과 마약과 술을 전매하는 것으로 수익의 전부를 창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르신의 파스퇴르 연구소를 통해서 새로운 식민지 경영 수익창출의 좋은 본보기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식민지 인구는 모두 강제노역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동원된 인구로 산간을 개간하고 고무나무를 심고, 다시 고무를 채취하고 모아서 항구로 나르는데 강제동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무나무 재배가 식민지의 가장 우수한 수익성 사업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는 곧 다른 강대국에도 모두 전해져서....... 동아시아권 전역이 고무나무 재배라는 새로운 식민지 침탈과 경영의 장으로....... 그 부작용이 심각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하게된 것이다.
예르신의 선택은........ 세계적으로는 큰 공을 세웠지만(질병 퇴치), 적어도 동남아시아권에서는 천연두나 페스트 보다도 더 무서운 질병을 들여온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말이다.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베트남 식민지 지배와 약탈에 돌입하였으나, 결국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급격히 쇠락의 기미를 보이던 중에, 결국엔 식민지 지배권을 미국에 양도하게 되었다. 미국은 도미노 이론에 입각하여 베트남 일국의 사회주의화가 인도차이나 지역 전체에 번져나갈 것을 우려하여 전력을 다해 베트남의 민주정부 토착화를 추진했다. 그러자, 이에 뒤질세라 동서냉전의 한복판에서 소련과 중국도 앞 다투어 사회주의 세력 확장을 꾀하면서 호치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1955년 허울뿐인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정식으로 왕정을 축출하고, 허수아비 오딘 디 엠 정부를 옹립하여 (베트남 공화국)을 전면에 내세우고 미국식 지배를 강화했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호치민은 남베트남에 숨어서 활동하던 공산분자들을 동원해서 테러활동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이들로 하여금 남베트남 지역에 (해방민족전선)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공개적 활동을 선언하였으니 이들이 곧 남베트남의 빨치산이라 불린 ‘비엣콩(베트콩)’이 되는 것이다. 베트남의 내분에 본격적인 군사작전이 동원되기 시작하면서 분쟁은 바야흐로 내전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제 베트남전쟁은 동서냉전 시대의 주축인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초강대국들은 자신들만의 실질적 전쟁(핵전쟁)을 회피하면서, 세계정세를 적당히 긴장시키고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로 약소국들을 끌어 모으기 위하여 소규모 지역분쟁 차원의 지루한 전쟁놀이를 끌어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이념과 실천과제를 놓고 종주국 소련과 중공(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논쟁이 벌어져 격화되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전면전을 준비하는 무력분쟁으로 발전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혁명 이후의 소련은 전체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표방한 혁명세력들이 정권을 탈취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을 뿐이었다.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집권한 중국공산당은 다음 단계의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을 위하여 문화대혁명을 통한 과감한 숙청을 벌이던 모택동의 시대였던 것이다. 중공(중국)은 소련을 향해 ‘변질된 사회주의자’ ‘모순된 사회주의 제국’ ‘ 무늬뿐인 수정 자본주의자들’ 이라고 맹비난 하였다. 이제 사회주의 이념을 놓고 공산주의 혁명으로 이룩된 소련과 중국이 갈라서기 시작했다.
절대적이라고 까지 평가하기는 그렇지만, 내 주관적 판단에 의하면 소련의 정책노선에 대한 중국의 지적과 분노에 찬 평가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 이론을 제시하고 완성시킨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자면....... 분명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다음 단계 개념으로 탄생했다. 분명 자본주의는 이제까지의 인류역사가 체험해 보지 못한 최상의 사회제도라 부르기에 충분했다. 생산성과 그에 따른 과학과 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급속도로 발전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풍족한 생활에 충분히 기여할 것이라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제도가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마르크스의 지적은...... 그 좋은 사회제도인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하고 충분히 성숙해져 가면 좋겠는데.......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어(생산성 향상과 이익의 분배 사이에서) 치명적인 부작용들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한계에 부닥친 자본주의의 다음단계로서 사회주의를 주장했던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소련과 무슨 상관이냐 하면........
소련이란 나라는 절대빈곤 속에서 제국주의적 지배세력들만이 풍요를 맘껏 누리던 절대왕정 국가였다.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에 의해서 사회주의 이념을 토대로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서 소비에트 연합(소련)을 건설하였지만, 이들에게는 마르크스가 지적한 어느 정도 충분히 성공한 자본주의라는 과정이 생략된 것이다. 자본주의의 부작용과 한계성 위에 사회주의가 건설되었어야만 하는데, 그 과정이 생략된 채 왕정에서 곧바로 사회주의로 전향되었기에....... 진정한 이상적인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이 불가능 하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따지자면 왕정에서 곧바로 사회주의 진입은 중국으로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겠지만, 지금 중국공산당 정부는 바로 그 점을....... 사회주의 이념을 체제화 하는데 있어서 자기반성과 희생과 타협하지 않을 사회주의 원칙에 대해서 고뇌하면서, 한 방편으로 자기비판과 성찰을 통한 다시 한 번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문화혁명에 국가의 사활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중국에게, 혁명이 끝나자마자 주도세력들이 권력을 잡고 민족주의에 기대서 안주하려 드는 소련의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이념)은 허구라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중국과 소련의 지지와 지원 덕분에 미국과 해방전쟁을 벌이던 호치민의 월맹은 참으로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호치민은 비슷한 약소국의 처지로 사회주의 건설을 추구하고 있던 북한의 김일성과 방금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여 집권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각별하게 교류를 시작하였다.
미국 측으로부터 간간히 휴전을 전제로 한 협상의 카드가 제시되었지만, 월맹 정부 지도부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였다. 미제를 몰아내고 완전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국한다는 목표가 전부였다. 전투는 점점 참혹해 져 갔다. 미국 주도로 전황을 이끌어내야만 월맹이 협상테이블에 나올 것 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시기엔 중국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세계 도처에서 미국과 대응하느라 지원 능력이 뚝 떨어진 소련이었지만, 정적을 상대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신무기가 등장했기 때문에 그 쪽에 더 신경이 잔뜩 쓰였던 것이다. 그 미국을 향한 비수와도 같은 신무기가 바로 쿠바였다. 쿠바의 지리적 위치가 바로 미국의 옆구리쯤이었던 것이다. 소련은 쿠바의 개혁에 아낌없는 지원을 보내면서 함께 군사고문단과 무기(핵미사일)을 몰래 배치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쿠바사태’다. 하지만 소련이 선택한 비장의 무기는 끝내 미국이 유능하고 탁월한 지도자 케네디를 앞세워 무력화 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결국....... 월맹의 지도자 호치민은 베트남의 미래를 ‘중국식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 해야만 한다고 못을 박아 버렸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호치민이 중국식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쿠바 혁명의 주체이자 이후로 전 세계 모든 혁명주의자들의 영원한 우상으로 자리 잡은 (체 게바라)가 깜짝 등장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지만.....
동서냉전이 거의 안착되어가던 시기의 소비에트연방 최고 권력자 후르시초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ev)로서는, 혁명을 통해 쿠바를 사회주의 국가로 이끈 피델 카스트로(Fidel Alejandro Castro)의 도움을 끌어내기 위하여 무척이나 공을 들였다. 정적인 미국을 압박하기에 더없이 좋은 카드로 쿠바가 갑자기 등장했기 때문이다.
후르시초프는 카스트로를 정중하게 모스코바로 초청했다. 혁명의 성공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이를 통해서 사회주의 노선의 종주국이 중국이 아니라 확실하게 소련이라는 것을 분명히 각인시켜 주고, 나아가서 쿠바를 소련의 전진기지로 활용하는 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초청이었다.
하지만, 카스토로 입장에서는 다분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을 성공하기는 했지만 아직 새로운 정부가 안착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미군의 일부가 쿠바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근거지를 이탈한다는 것이..... 혹 미국 CIA의 공작에 말려들 수도 있고, 아직 소련과 중국의 노선 갈등에 대해서 확실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련의 호의를 매몰차게 거절할 입장도 되지 못했다. 하여 카스트로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소련의 초청에 응하되 자신이 아닌 특사를 대신 파견하는 방법이었다. 그 특사가 자신의 분신이자 혁명동지이며 친형제 이상의 관계로 널리 알려진 체 게바라(Che Guevara)라면 소련으로서도 더 이상 흠잡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예상은 적중했다. 사실 당시의 국제사회에서는 혁명에 성공한 카스트로보다도 그의 혁명동지인 게바라의 명성과 영향력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게바라의 소련 방문 이후에 전 세계가 게바라와의 만남을 앞 다투어 경쟁하게 된다. 거기에는 후르시초프 뿐만이 아니라 김일성과 모택동과의 만남도 있었다. 게바라의 선택과 지지를 얻는다는 것은 곧 카스트로의 승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후르시초프의 소련 정부는 게바라를 최고의 국빈으로 대접했다. KGB까지 동원하여 완벽한 경호와 수행을 했을 정도였다. 크렘린 궁의 만찬은 물론 붉은광장의 카 페레이드와 모스코바 인근의 산업시설과 군부대 방문은 물론 예술단을 총동원하여 성대한 환송연까지 벌여 주었다. 보기 드문 최고의 환대였다.
게바라는 환한 미소로 사전 준비된 스케줄을 소화했지만 별다른 표현을 하지는 않았다. 협상테이블에서 조차도 실무적 담당자 태도였을 뿐, 대부분의 안건에 대해서는 돌아가서 성실하게 카스트로에게 전달하겠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후르시초프와 모스코바의 지도부는 게바라의 이러한 태도를 보면서 성공의 축배를 들었다. 틀림없이 게바라가 친 소련인사가 되었다는, 더하여 강력한 후원자라고 판단했다.
과연 그랬을까?
게바라를 태운 비행기가 모스코바 하늘로 높이 솟아올랐다.
그제야 게바라가 처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옆에 앉았던 지인들에게 털어 놓았다.
‘여보게들. 혁명에 성공했다고는 하나, 지금 소비에트 연방의 모든 노동자들이 호화로운 대저택에서 은쟁반에 칠면조를 먹고 좋은 와인을 마시며 오페라 구경을 하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나? 극히 일부의 혁명 주동자들만 저렇게 호의호식에 빠져있는 것이지........ 모든 노동자들이 지금 구국전선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면 당연히 혁명의 주체들도 그들과 똑같이 삽과 괭이를 들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이 거짓이야. 소련의 사회주의는 실패한 것이야. 차라리 과거의 자본주의만도 못한 것이 소련의 사회주의야. 나는 소련에서 비참한 노동자들의 진짜 모습을 보았네. 저것은 결코 사회주의라 할 수 없는 것이야.’ 라고 통탄했다고 한다.
게바라는 쿠바로 돌아와서 자신의 모든 경험을 카스트로에게 털어 놓았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카스트로의 생각은 처음으로 케바라와 달랐다.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이견과 다툼이 이때부터 생겨났다.
소련의 혁명이 실패했던 아니던, 소련의 사회주의가 진짜이던 가짜이던...... 지금 카스트로에게 중요한 것은 소련은 여전히 미국이 쉽게 넘보지 못하는 초강대국이라는 사실이었다. 자신과 쿠바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소련의 지원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결국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이 일을 계기로 결별한다. 카스트로는 소련에 의지해서 자신의 혁명정부를 쿠바에 안착시키는 노선을 선택했고, 오로지 충실한 사회주의 혁명가였던 게바라는 다시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의 의지를 불태울 전선을 찾아서 볼리비아의 정글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소련이 쿠바에 전력을 쏟아 붓는 동안에........ 호치민의 월맹 지도부는 이제 완전히 중국식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선택하고 추구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전선을 중부 이남의 지역으로 확대시켜 나가면서....... 월맹군 지도부는 점차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고, 전쟁 이후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계와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아주 서서히...... 좀 엉뚱한 생각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분히 문제투성이뿐이 실로 좀 과하게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말이다.
최강국 미국에 대항하여 당당하게 승리를 쟁취해 가는 과정에서 월맹정부와 군대는 서서히 자신들의 능력에 대해서 자신감 이상의 그 어떤 것들에 서서히 도취되기 시작했다. 이정도의 힘이라면 중국이나 소련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자신들을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내 이러한 자신감에의 도취는 점점 커져만 가더니...... 베트남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무수히 외세의 침략에 당하기만 했던 설움이 북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경멸하던 참족조차도 인도차이나에서 거대왕국을 건설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작금의 이런 상황이라면 비엣족이라고 그런 영광을 성취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드디어 미국을 몰아내고 1976년 통일정부인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국하자마자 공산당 지도부는 그 흔한 국가의 변천사를 그대로 답습하여 제국주의 전형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말았다. 영토 확장을 통한 거대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에 대한 환상이 공산당의 눈을 삽시간에 멀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베트남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였던 인민(노동자)들이 오랜 전란의 폐해로부터 회복되기도 전에, 공산당 지도부는 영토 확장을 목표로 또 전쟁을 벌인 것이다. 베트남 공산당은 다짜고짜 라오스와 캄보디아 영토를 침범해 공격해 들어갔다.
이런 베트남의 갑작스레 돌변한 태도를 지켜보면서 중국공산당은 고심 끝에 신중한 결론을 내렸다. 자칫 베트남이 영토 확장을 통해 세력을 키워서 중국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었다. 중국은 베트남의 자제를 요청했지만, 베트남으로서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여기서 물러나게 되면 오히려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만 하게 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설마 중국이 우리를 어떻게 하겠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침략전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러자 결국 중국은 그동안의 베트남 지원을 끊고, 오히려 캄보디아 반란군인 크메르 루즈의 전폭적 최대 지원자를 자청하고 나섰다. 무기 지원은 물론 지휘관을 파견하여 크메르 루주군 훈련을 시키기까지 했다. 베트남은 중국에게 커다란 배신감을 가졌고, 이어서 중국과 단절하였다. 그러자 이번엔 그동안 등한시하였던 소련이 베트남의 후원자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이제 인도차이나 반도의 분쟁은 소련과 중국의 대리전 양상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베트남은 중국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가지고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게 된다.
전선이 길어지고 보급이 원활해지지 못하게 되자 전황은 점점 베트남에게 불리하게 작용되었고, 결국엔 베트남 침략군이 철수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공산당 일당체제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성립은...... 실제로 자본주의 시대의 부패한 오딘 디 엠 정권(남부 정부)때보다 살기가 좋아졌을까?
자본주의의 근본적 문제는 생산수단과 이윤을 모두 소유하려는 자본가들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보았다. 아무리 생산력을 증가시키고 이윤을 발생시켜도, 그 결과가 결코 노동자들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올 수 없는 구조가 바로 자본주의의 한계였다.
하지만 사회주의 방식으로 전환하여 생산수단을 국유화 또는 공유화 하게 되면, 노동자 스스로가 생산수단과 생산량을 결정하게 됨으로써, 자원과 노동력의 낭비를 줄일 수 있게 되고, 자본가들이 독점하던 이윤을 공동분배 함으로써 경제적 평등을 실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바람직한 사회제도가 아닌가?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한 공산당은 이러한 원칙 하에서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에 의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운영이 시작 된지 45년이 지난 지금에...... 세 번을 베트남을 방문해 보았으면서도........ 적어도 베트남 안에서........ 베트남이 민주주의 국가인지 사회주의 국가인지, 아니면 공산주의 국가인지......... 자본주의 시장경제인지 사회주의 시장경제인지........ 도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판단 할 수가 없다. 전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마르크스 형!!!!!! 사회주의 하면 도대체 무엇이 좋은 거야?’
--- 다음 이야기에서 달랏 여행을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