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원주고속도로 홍천이포IC로 내려 여주로 들어섰다. 국도변에 벚꽃이 강냉이 티밥 마냥 보기 좋게 만개했다. 남한강 위로 놓인 이포대교를 건너 양평 원덕역으로 가서 친구와 합류했다.
버스나 전철을 두고 차를 직접 몰아 찾는 이 드문 한적하고 멀찍한 교외, 양평 추읍산 산행을 하기로 했던 터였다. 경의중앙선 원덕역 주변 도로변엔 주차된 차량들만 보일뿐 인적 없이 고요하다.
산행 코스를 두고 분분한 의견을 뒤로하고 원덕역을 출발해서 들판을 가로질러 흑천 변에 조성된 물소리길 쪽으로 향했다. 천변을 따라 걷다가 적당한 곳에서 들머리를 찾기로 했다. 너른 논밭 너머로 갓 떠오른 태양을 머리에 인 추읍산과 주변 낮은 여러 산들이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다.
원덕리 넓은 논밭 사이 드문드문 농가가 자리하고 근처에는 상치 치커리 딸기 등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도 늘어서 있다. 어떤 하우스 안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모종하는 농심의 손길이 분주하다.
샛노란 개나리가 울타리처럼 긴 농로를 따라 줄지어 섰고 농로 옆 수로의 물 흐르는 소리는 밝고 경쾌하다. 한쪽은 논밭 다른 한쪽은 흑천을 끼고 5~6미터 간격으로 벚꽃 나무가 늘어선 물소리길로 접어들었다. 벚꽃 길이 앞뒤로 끝이 없을 듯 까마득히 멀다.
물오리들이 무리지어 산과 들 위를 날다가 흑천으로 내려 앉고, 물 위에서 헤엄치는 오리들은 괙괙 소리를 치거나 날개를 퍼득이며 물장구를 치기도 한다.
양평군 동부 성지봉에서 발원해서 80여 리를 흘러온 흑천은 추읍산 주변 얕은 산군과 유유자적 어우러지다가 십여 리 아래 남한강으로 평온하게 흘러간다. 흑천이란 특이한 이름은 냇물 바닥에 깔린 검은 돌로 인해 물빛이 검게 보이는 까닭이라고 한다.
차량이 빽빽히 주차된 고가철로 옆 잔듸구장에서는 축구경기가 한창이다. 부지런한 조기축구 팀이 주말을 맞아 일찍이 시합을 하러 나왔나 보다.
철길 아래를 지나고 흑천을 살짝 벗어나서 삼성2리 별내마을로 들어섰다. 담벼락 옆에 박태기 나무가 붉은색 꽃망울을 머금었다. 우정, 의혹이라는 꽃말의 이 나무가 구슬꽃 나무로도 불리는 까닭은 설명이 필요 없어 보인다. 매년 이맘 때 봄처럼 딸기체험 행사로 북적일 별내마을은 고요하기만 하고 마을체험관 옆 농가에 찾아 든 제비만 처마 밑에서 부지런히 날개짓을 한다.
다시 냇가로 다가와서 흑천 위 좁은 인도교를 건넌다. 다리 양쪽 난간을 따라 나무 밑둥이나 가지 등을 다듬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만든 솟대가 늘어서 있다. 그 이름과 달리 흑천은 물이 맑아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너른 하상을 드러낸 냇가에 누렇게 빛바랜 갈대 군락, 연초록 이파리를 틔운 버드나무 군락, 천변에 늘어선 연분홍 벚꽃 군락, 멀리 검푸른 산군,... 자연의 다채로운 색상이 그림처럼 어우러진 풍경이다.
물흐르는 소리, 경운기 소리, 발동기 소리, 간간이 기차 지나는 소리, 산자락에서 들려오는 장끼 울음소리,... 소리의 향연 또한 풍치에 뒤지지 않는다. 100여 미터 짧은 다리 위를 지나는 춘사월의 주말 아침, 이 때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서 이런 경이로운 풍치를 만날 수 있을까.
다리 건너 삼성교회 앞 물소리길 주변은 쓰레기를 치우고 울타리를 고치는 등 마을 주민들 손길이 분주하다. 추읍산 북변을 휘돌아 흑천으로 안겨드는 삼성천을 따라 들머리를 잡아보려 한다.
추읍산 주봉과 그 아래 봉우리가 흡사 고대 쌍분같기도 하고 여인의 풍만한 가슴처럼 보기도 하다. 두 봉은 200여 미터의 고도 차가 있지만 보는 위치에 따라 저렇게 대등해 보이기도 하다. 사람도 선입견이나 편견이라는 삐딱한 시각을 품는다면 타인을 제대로 바라보기 어려울 터이다.
산자락과 어울려 자리한 전원주택들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철길 밑을 지나 우석교회 부근 산 북쪽 자락으로 들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새들은 제 철을 만난 듯 재잘댄다. 용문면 삼성리에서 질마재를 거쳐 추읍산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로 접어든 셈이다.
추읍산(趨揖山, 582m)은 용문산을 보고 인사하는 형상이라 붙은 이름이라 한다. 또 양평군 내 양평, 용문, 개군, 지제, 강상, 옥천, 청운 등 일곱 개 마을이 내려다보인다고 예전에는 칠읍산(七邑山)으로도 불렸단다.
추읍산 북단 급경사를 따라 닦아 놓은 길로 오른다. 경의중앙선 철마가 꼬부랑산 터널을 나와 추읍산 자락 터널로 사라진다. 묘터까지 적갈색 속살을 드러내며 이어지던 길이 다하고 희미한 등산로가 가파르게 능선으로 향한다.
산 기슭 여기저기 드문드문 참꽃이 활짝 폈고 떨어져 땅에 드러누운 꽃잎도 적지 않다. 고치 속 번데기는 진달래 가지 곳곳에 붙어 화려한 변신의 날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온전한 육산의 모습이던 칠읍산이 7부 능선 쯤부터 너덜바위 길로 바뀌고 우측으로 한아름 크기의 바위들이 산 아래로 폭포수 줄기처럼 흘러 내린 너덜겅을 내놓으며 또 다른 면모를 보인다.
한참 동안 지나 해발 397미터 능선 마루, 삼성리에서 주봉과 더불어 쌍봉으로 보였던 그 봉우리에 올라섰다. 동쪽에 이웃한 해발 318미터 칠보산은 용문팔경 중에 하나인 칠보청람(七寶晴嵐), 즉 '칠보산 아지랭이'로 알려져 있지만 흐릿한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평탄한 능선 길 주변으로 속음 벌목당한 참나무들이 너덜바위와 널브러져 있다. 동행 친구는 날카롭게 각진 바윗돌을 밟으며 걷는 것이 반지의 제왕 헬름협곡의 좁은 성벽을 걷는 기분이란다. 어디선가 영화 속의 익룡이라도 날아들 것만 같다.
성난 것처럼 길게 이어지던 바위너설 능선이 성이 다 풀렸는지 잦아들며 추읍산 주봉 옆에서 주저앉는다. 질마재다. 아무 이정표는 없고 나무가지 여기저기에 묶인 여러 산악회의 리본이 반긴다.
여기부터 길은 또렷해지고 다시 흙이 깔린 육산으로 모습을 바꾼다. 곧이어 만나는 첫 이정표는 정상까지 400미터라고 알려준다.
산정으로 난 비탈길 마지막 고비를 넘기면 정상에 앞서 너른 헬기장이 반긴다. 덤으로 살랑이는 바람이 산행의 노고를 위로한다. 헬기장 부근 검게 탄 초목이 산불의 흔적을 또렷이 보여준다. 3월 14일 추읍산 정상부 산불 발화 현장을 목격했다는 어느 산객의 산행 후기가 생생하다. 다행히 빠른 119 신고로 불길을 잡았다는데, 헬기장 옆 벤치 부근에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 두어 개가 눈에 띈다. 저번 산불은 필시 산객이 버린 담배 꽁초로 발화했을 것이다.
추읍산 정상은 레드 카펫을 대신하여 참나무 낙엽 브라운 카펫을 내놓으며 산객을 맞이한다. 산 주변 지도와 추읍산 위치를 설명하는 등산 안내도가 서있는 정상엔 표지석이 없어 어리둥절하게 한다. 며칠 전 산행후기에 보이던 표지석이 무슨 연유로 어디로 사라졌는지 의아하다. 예전 '칠읍산'으로도 불렸다는 말처럼 사방으로 막힘 없이 툭 터였지만, 시야가 좋지 않아 용문산 유명산 청계산 양자산 원적산 등 주변 산들은 방향으로 가늠할뿐 흐릿하다.
추읍산 남서쪽의 내리마을에 들르기로 하고 급전직하 기슭에 지그재그로 난 길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피라미드처럼 기울어진 사면은 '와우'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원덕역 쪽에서 산행은 대개 이 코스를 택하는지 산을 오르는 산객이 적지 않다. 다들 급경사에 힘들어 하는 기색이다.
칠부능선 쯤 산길 오른쪽 80미터 지점에는 뚝뚝 떨어져 내려 날카로운 단면을 보이는 가파른 바위절벽 사이로 지하수가 뚝뚝 흘러내리는 '약물장'이 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듯 위태로워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또다른 바위너설 지대가 산 아래쪽으로 길게 이어지고 바윗돌을 쌓아올린 돌탑이 가파른 너설지대 중간중간에 서있다.
돌탑동산이라 이름 붙은 너설지대가 끝나고 용트림하며 하늘을 향해 뻗은 노송들이 무리지어 선 '산림욕 숲'이 이어진다. 안내판은 산림욕 숲, 명상의 숲, 아카시아 숲, 만남의 숲, 책 읽는 숲, 바람의 숲, 진달래 동산 등의 위치를 알려준다. 명상의 숲을 지나 내려선 산신당 부근엔 조팝나무꽃, 진달래꽃 등과 어우러져 만개한 개복숭아꽃이 요염하다.
추읍산 산신당은 호랑이 등 맹금류로부터 마을 주민의 안녕을 비는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라 한다. 전면 측면 각 한 칸의 맞배지붕 산신당은 소담하다. 산신제를 소홀히 하면 반드시 재앙이 따랐다니 산신은 성미가 가파른 산세를 닮았나 보다. 수리 한 마리가 계곡 위를 활공한다.
산뜻한 전원주택 십여 호가 드문드문 사이를 두고 자리한 내리마을 웃골을 둘러본다. 내리는 4~5백 년 수령의 산수유 나무가 자생해서 산수유 마을로 불리는데, 웃골엔 산수유 나무뿐 아니라 종지나물꽃, 꽃잔듸, 질경이꽃, 양지꽃, 황매화 등이 어우러져 꽃잔치를 벌이고 있다.
추읍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을 넘어 내리 웃골에서 원덕리로 가는 '희망볼랫길'이 길게 이어진다. 원덕역까지는 십여 리다. 용문산 활공장에서 날아올랐는지 추읍산 정상 상공을 이카루스 후예 패러글라이더들이 선회하고 있다.
희망볼랫길이 끝날 즈음 내리막길 좌측 비탈과 우측 계곡에 자리한 주택들을 훑어보며 흑천변 물소리길로 내려섰다. 봄나들이 나온 장년 부부는 연신 '너무 좋다.'는 말로 양평의 봄에 찬사를 보낸다.
산행을 마무리하고 지척 '양평해장국거리'의 한 식당에 들러 허전해진 배를 달랬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각이지만 식당 안은 사람들로 그득하다. 필시 험험한 시절 봄에 허기진 마음을 채우려는 것일 게다. 조용히 다가온 봄날은 소리 없이 곧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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