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팔상성도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도 부처님은 많이 계신다.
이들 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아눗다라삼막삼보리(無上正等正覺)을 이루시고,
그 지혜로서 삼세의 한량없는 우주공간을 두루 살피시어 가르쳐 주신 부처님들이시다.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1) 도솔래의상 (兜率來儀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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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래의 | |
부처님께서 호명보살로 도솔천에 계시다가 카필라국의 태자로 탄생하여 사바세계에 나투시는 모습이시다.
육아를 가진 흰코끼리를 탄 호명보살이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있는 모습, 바라문에게 꿈의 해몽을 듣는 왕과 왕비의 모습 등을 표현하고 있다
2)비람강생상 (毘藍降生相)
룸비니 도안의 무수 꽃가지를 붙들고 서서 오른쪽 옆구리로 태자를 출산하는 장면, 그리고 제석천왕이 비단을 가지고 내려와 태자를 받으며 하늘의 모든 천왕들이 온갖 보물을 공양하는 모습과 땅에서 솟아오른 연꽃을 밟고 칠보를 걸으며 하늘과 땅을 가르키면서 天上天下 唯我獨尊 一切皆苦 我當安之(천상천하유아독존 일체개고 아당안지)라 외치는 장면과 하늘에서 용이 차고 뜨거운 물을 토하여 태자를 목욕을 시키는 모습과 태자를 가마에 태워 궁궐로 돌아오는 모습 그리고 아지타 선인에게 관상을 보이는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 (BC624. 4, 8음)
3)사문유관상 (四門遊觀相)
태자의 성장에 따라 왕은 태자를 위하여 전단향, 염부단금, 보배, 신령스러운 약등으로 몸을 보호하게 하였고 영락으로 몸을 장엄케 하였으며 三時殿(삼시전)을 지어주고 연못과 연꽃을 심게하여 후원에는 귀한 꽃의 향기가 사라지지 않았어나 7세쯤 봄 농경제를 참석하여 흙구덩이에서 꿈틀대는 벌레를 새가 쪼아 물고 달아나고 그새를 큰새가 날아와 작은새를 잡아 먹는 것을 보고 약육강식의 비정함과 농부나 농부의 수고로 편안히 배불리 먹는 귀족 왕족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이 염부수(閻浮樹)아래의 정관(靜觀)이라고 한다.
이후론 태자의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사문밖에 나가 관찰하는 모습이다.
동문에서 노인을, 남문 밖에서는 병자를 보고 서문으로 나가서는 상여를 보았고,
북문밖에는 사문을 보고 출가 결심하는 모습 등이 표현되고 있다.
그 태자의 모습을 보고 한 여인이 넋을 잃고 다음과 같은 노래를 하였다.
"저러한 아들을 둔 어머니와 그 아버지는 얼마나 기쁘고 즐거우랴.
저 같은 분을 남편으로 맞이하는 여인은 참으로 가장 행복할 것이다" (五分律)
태자는 최상의 행복이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렇다! 행복중 에서도 가장 행복인 무상의 열반을 얻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얻을 수가 있을까?" 하고 외쳤다.
태자의 행동에 관심을 기우리고 있었던 부왕은 태자의 심경변화를 알아차리고 크게 염려하였다.
아무래도 출가를 하고야 말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부왕은 태자에게 왕통을 이을 왕손을 얻기 전에는 출가할 수 없다는 조건을 내세우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태자는 19세에 같은 석가족의 콜리 성주의 딸인 야소다라와 결혼하였고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 라훌라를 낳았다.
*,부처님의 아내와 결혼 설화 및 아들
1)부처님의 아내
왕자로 태여 난 싯달타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매우 풍족한 생활을 하여 뒷날 부처님께서 직접 술회한 경전에 의하면 1년 중에 찌는 듯한 여름, 장마철인 우기, 추위 없는 겨울 등 매 계절마다 각기 다른 궁전에서 살았다고 한다(三時殿).
궁전은 아름다운 보석으로 장식하고 앞뜰에는 여러 종류의 고운새 들의 노래소리와 연못에서는 청,홍,백색의 연꽃이 청초하게 피여 있어 집안 가득히 연꽃향이 진동하였으며 몸에는 부드러운 옷을 입고 고급 향수로 치장을 하고 정원뜰을 거닐 때면 뜨거운 햇살을 피하기 위한 양산이 준비되어 있었다.
더우기 3개월간의 긴 우기(雨期)에는 반나의 여자들만으로 구성된 악사들이 귀를 즐겁게 해주어 매일 흥겁게 지나고, 또 왕위를 이어 받기 위한 교육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싯달타의 나이 16세 때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귀여운 라훌라를 낳았다.
태자의 부인인 야소다라에 대해서는 여러설이 있는데 "불본행집경"이나 "수행본기경"에는
분명 야소다라라고 하였으나 남방 불교의 경전에는 라훌라의 생모는 첫째 아내였다고 기록하고
이름은 명기하지 않았고, 어떤 문헌에는 싯달타의 아내가 데바다하에 사는 콜리족의 딸이며 밧다카치나라고 하였다.
그 외의 여러 이름으로나타나 있어 싯달타의 아내에 대해 몇 명인지 의문을 일으킬 수가 있다.
여기에는 당연히 전생이나 전전생의 먼 옛날의 인연, 즉 연기에 대한 설화가 있고 후대에는 더 많은 전설이 첨가되어 무려 547개에 이른다.
그런데 어디를 보나 부처님의 가문은 명가라고 표현하여 "좋은 인연을 쌓은 집"이였다.
한 예로 본생담 중에 부처님의 생가는 4아승지 십만겁으로 숫자로 셈할수 없는 아주 오래전 옛날에
善慧(선혜)라는 브라만의 집이 였는데 그 집은 대대로 선근(善根)즉 좋은 과보를 받을수 있는 선인(善因)을 심었다고 했다.
이는 부처님의 초전법륜 즉 첫 설법에서 "나는 업론자(業論者)다" 라고 설하신 것처럼
부처님은 출생전 전생에서부터 깨닫음을 구하는 집안에서 태여 났으며 금생에 태여나서도
전생과 마찬가지로 명문가에 태여 나 바른 도를 위하여 정진하는 사람이 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도 마야부인이 죽은 뒤 처제를 아들의 양모로 받아드려 아들을 하나
더 낳았을 뿐 다른 여인을 맞아 드렸다는 기록은 없다.
이로 미루어 본건데 본생담등이 한사람만의 기록도 아니고 또 같은 시대의 기록도 아니기 때문에
여러사람들이 집필하는 과정에서 동명이인의 야소다라를 만들어져서 사람들의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2)결혼에 얽힌 비화
정반 왕은 아시다 선인의 예언이 항상 마음에 걸려 아들이 출가하여 성인이 되는 것 보다
세속에서 전륜성왕이 되어 가문을 빛내주기를 바랐기에 여러 가지 궁리 끝에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우선 여자에 대한 즐거움을 알려주는 것이 최선책이라 생각하고 태자비의 간택을 서둘렀다.
"아들아 너는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 혹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말해 보렴"
"아바마마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결혼할 여자는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젊고 아름다워야 하고 누이처럼 다정해야만 하고, 어머니처럼 인자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모든 일에 진실하고 거만하지 말아야 하며, 잘 난체도 하지 말아야 하고, 귀한 것을 시기하거나
부러워 해서도 안돼며, 노예처럼 온순하고, 하녀처럼 겸손하며,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잘 것이며
옷으로 치장하거나 향수를 바르거나 소란스러운 놀이나 호화로운 잔치에도 무관심해야 하고
몸과 마음이 순결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여인이 있다면 서슴치 않고 결혼하겠습니다"
왕은 아들의 말을 듣고 식견이 빼여 난 궁전의 승려를 불러 아들의 의견을 전하며 그런 여인을 찾을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여러날 동안을 찾아 헤매였으나 그런 여인은 찾을 수가 없었다.
승려는 실의에 빠져 궁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와 함께 하녀를 데리고 나들이 나오는 한 소녀를 발견하고 순간 그의 눈이 빛났다.
샤카족의 딸 단다파니의 딸 야소다라였다.
승려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를 질문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왕에게 고 하였다.
"폐하 드디어 찾아내였습니다. 틀림없는 천생연분입니다.
이 이상 더 찾아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왕은 아무리 슬기로운 승려라 하더라도 실수가 있는 법이라 생각하고 직접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그는 신하들에게 일주일 후 태자가 젊은 처녀들에게 보석을 나누어 줄테이니 모두궁전으로 오라고
공포하였다.
약속한 날 많은 처녀들이 궁전으로 몰려 왔다. 태자는 처녀들에게 일일이 보석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보석을 하나씩 받고 기뻐하며 돌아가는 처녀와는 달리 야소다라는 맨 뒤에 있다가 태자의
텅 빈바구니 앞에 서게 되어 몫이 없었어나 야소다라는 태자 앞에서 미소를 머금고
"태자님 아무것도 없군요. 저를 업신여기는 건가요?"
"천만에요 아가씨가 마지막으로 왔기 때문이지요. 그 대신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드리지요."
그러자 야소다라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 아닙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태자님 것이지 제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게 보석이 있다면 태자님께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야소다라가 물러가고 그 말을 전해들은 정반왕은 그녀가 바로 진짜 보석이며,
태자비로 손색이 없음을 직감하고 단타파니를 궁전에 불렀다.
"단타파니여 그대의 딸을 나의 아들에게 주게나"
그러자 그는 머뭇거리며 쉽게 승낙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반왕은 재차 청혼을 하였다.
"폐하 용서하소서 쾌히 허혼 할 수가 없습니다. 왕자께서는 온갖 사치와 호강 속에서 자랐습니다.
조금도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기에 분명 명예와 권세에 나약하고 나태에 젖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딸의 남편감으로는 적격자가 아닙니다.
저희 가문은 힘세고 슬기롭고 머리 좋은 남자에게만 딸을 줍니다"
단도직업적인 거절에 왕은 오히려 당황하고 부끄러워 태자를 불렀다.
"아바마마 몹시 슬프고 괴로워 보이십니다. 무슨 사연인지 들려주십시오? "
왕은 여러 가지의 생각 끝에 단다파니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것을 털어놓았다.
태자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공연한 걱정을 하고 계셨군요. 아바마마 저보다 더 재능있고 힘센 남자는 카필라성안에는
드물 것입니다. 저와 겨눌 사람을 전부 모아 주십시오. 저의 재능과 힘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부왕은 아들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카필라성의 모든 젊은이를 모아 시합을 치렸는데
아무도 싯달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를 지켜본 단다파니는 속으로 외쳤다.
"저같이 훌륭한 젊은이와 내 딸이 부부가 된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인가?
하마터면 큰 보물을 잃는 실수를 저지를 뻔하였구나 !"
단다파니는 왕에게 사과하고 청혼을 받아들일 것을 오히려 간청하여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3) 부처님의 아들
본생담에는 싯달타는 라훌라를 탄생한 그 해 29세 때 출가를 한 것으로 되어 있어
결혼후 13년만에 아들을 낳은 셈인데 손자의 탄생소식을 학수고대하던 숫도다나왕은 왕자 출생
소식을 듣고 흐뭇한 마음으로 아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는데,
그런데 라훌라의 출생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것은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의 전승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심지어 부처님께서 성불한 날 밤에 라훌라가 태여 났다는 경전이 있을 정도로
불합리한 것도 있다. 그 까닭은 앞의 야소다라와 마찬가지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 기록에는 라훌라는 불종(佛種:부처님의 종자), 즉 부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의문이 대두되자
정반왕은 크게 상심하였으며,
만일 소문이 사실이라면 며느리인 태자비와 손자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할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경솔한 행동을 취할 수가 없어 한가지 묘방을 생각해 내었다.
손자를 목판위에 싣고 돌을 매달아서 왕궁의 연못에 띄우는 것이다.
만일 가라앉으면 내 손자가 아니고 돌만 가라앉으면 손자가 틀림없다는 생각 이였다.
결심을 한 정반왕은 여러신하와 궁녀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실천한 결과
다행히도 돌만 가라앉고 어린 왕손은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무사히 성장한 라훌라는 나이10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인 부처님을 처음
만났으며 얼마 후 출가하여 불교사상최초의 사미(沙彌)가 되어 밀행제일의 10대 제자가 되었다.
밀행(密行)이란 밀교(密敎)와 같이 비밀한 수행이 아니라 여러 계율을 세밀하게 지키고
잘 수행한다는 뜻이다.
물론 어린 시절에는 경솔한 언동으로 부처님이 소망어계(小妄語戒)를 만들기도 하였지만
철이 들면서 계율을 아주 잘 지켰다.
예로 "라운 인욕경(羅雲忍辱經)"을 보면 한때 사리풋다 존자와 사위성으로 탁발을 나갔는데
동네 악동들이 사리풋타의 발우에 모래를 집어넣고 라훌라의 머리를 때리는 행패를 부렸지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잘 참았다고 한다.
또 그의 태도는 겸허하여 계율의 규정대로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미이기 때문에 비구들과 동숙치
못하여 타 곳에서 혼자 자면서도 조금도 불평을 않았다고 한다.
라훌라는 부처님의 열반 후 지극한 효심을 발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장법사가 부처님의
입적지인 쿠시나가라를 참배하였을 때 1100여년이 지나 번화하였던 옛 모습은 간데 없고
황량한 사당뿐 이여서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그는 그때 그 지방에 오랫동안 살고 있는 한 브라만에게 깜짝 놀랄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에 이상한 비구니 한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옛날부터 부처님의 사리탑을 지키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 대한 내력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그 비구에게 "스님은 어디에서 왔으며 출신은 어디냐"고 물은즉 " 예 나는 이 탑의 주인이신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로 이 탑묘가 너무 황폐한 것을 보고마음이 아파 이곳을 지킨 것이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
라훌라는 부처님의 독자이면서 출가 수행하여 인욕행과 계율행을 잘지키고 수행을 잘하여
아라한이 되어서 존경을 받았다.
아라한이란 소승불교에서는 최상의 성자이며, 처음에는 부처님을 일컫는 명칭이 였으나 뒤에는
아라한과 부처님을 구별하였다.
샤카족의 설화는 아주 많은데 그 중에 라훌라의 이름에 대한 흥미로운 전설이 있다.
여간한 보통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점이 더 많다고 할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자신의 귀여운 아들에게 상서롭지 못한 장애라는 뜻의 라훌라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한역 경전에는 라훌라 또는 라호라(羅 羅)로 되어있다. 원 뜻은 장애(障碍)이다.
부처님께서는 태자시절부터 항상 명상에 잠겨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인간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생사 문제의 해결없이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그를 괴롭혀 왔다.
이 같은 사고는 점점 사회적 향락에서 멀어져 조용한 명상에 들기를 좋아하는 성격으로 바뀌게 되고, 이 사실을 안 부왕도 서둘러 결혼을 시킨 것인데 그 결과 아들을 낳았지만 태자로서는 싫증을 느낀
결혼생활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오 라훌라"라고 한탄하였던
것이다.
왕손의 탄생을 확수고대하던 왕은 왕손 탄생의 기쁜 소식을 듣고 태자의 입에서 장애가 생겼다는
한탄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잠시 생각을 한 후에 왕손의 이름을 라훌라로 정했다는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 가장 힘세고 용감한 인드라(뒤에 제석천이 됨)신과 일식과 월식을 일으켰다는
'라후'라는 두 신이 있다. 항상 불만을 품은 것은 악마 라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드라에게는 불로불생불사의 영약인 아므리타(Amrta)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그러한 영약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 신비의 영약은 젊어지며 천하제일의 힘을 자랑하게 되기에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그 신비의 영약을 훔쳐먹어야 인드라를 제압할 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라후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든 중에 인드라가 외출한 틈을 타서 몰래 숨어 들어가 인드라가 비장해둔 영약을 훔쳐 마시게
되었다.
그때 마침 집으로 돌아온 인드라는 악마 라후가 자신의 영약을 훔쳐 마신 것을 알고 라후의 목을
단칼에 치고 말았다. 하지만 신비의 영약의 힘은 대단하여 인드라의 칼을 맞은 악마의 목이 공중을
떠 돌다가 요령성(妖靈星)이 되어 영약을 훔쳐 마신 것을 일러 바친 월과 일을 원망하여
일식과 월식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것이 해와 달을 먹는 라후가 요령성(요사스러운 별)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7C중반경 인도의 소, 대승불교를 거쳐 밀교가 성립되면서
라후도 태장계 만다라의 제일 바깥쪽 안에 들어가게 되어 불 보살의 일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