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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발행하는 청소년 문학잡지 『풋』에 정보라 작가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배를 잡고 웃으면서 봤어요.^_^;; 독자 여러분과도 공유하고 싶어서 『풋』의 허락을 받고 일부분을 올립니다.
(작성자 - 정세랑 : 작가, 청소년 문학잡지 『풋』 에디터) <-인터뷰 사용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_^
사랑과 공포 사이의 스펙트럼, 울트라 바이올렛 늑대인간과 달걀귀신과 모든 버림받은 괴물들의 대모, 정보라 인터뷰
간절한 사랑 이야기를 아주 잘 쓰는 작가가 있다. 그리고 몸서리쳐지는 공포에 대해 쓰는, 독자의 정신 건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단호한 호러 작가도 있다. 그런데 그게 한 사람이다. 놀랍게도 한 작품 안에서 추가 왔다갔다한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높은 탑에 공주와」연작의 마지막 편에서 발췌한다.
기사는 왕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가슴에 뚫린 구멍에 한 손을 넣어 심장을 꺼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왕비 앞에 내밀었다.
좀비가 된 기사와 왕비가, 여전히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다. 좀비가 등장하는데도 달콤하다. 심장을 바치는군, 상징적이네, 하는 생각이 든다.
왕비는 기사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심장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먹기 시작했다. (……) 왕비가 기사의 심장을 다 먹고 나자 기사는 일어섰다. 손가락으로 왕비의 입가에 묻은 피를 부드럽게 닦아냈다. 그리고 기사는 왕비에게 입맞추었다.
……다정하다 생각하는 다음 순간, 말 그대로 우걱우걱 먹어버린다. 사실 이 정도는 약과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 치고 나오는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정보라의 소설을 읽는 것이 즐겁다고 말해야 할지 괴롭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 매운 음식을 먹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경험일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정보라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2008년 디지털문학상을 수상하고, 여러 잡지와 웹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모두 기대하던 차에 드디어, 첫 장편소설을 내놓았다. 『문이 열렸다』는 늑대인간과 달걀귀신의 사랑 이야기다. 고쳐도 고쳐도 계속 고장나는 가로등 아래에서 가끔 현실을 무너뜨리는 저편의 ‘문’이 열리는데, 둘은 그 가로등 아래에서 만나 우여곡절 끝에 연인이 된다. 웃다가 의자에서 떨어질 만큼 유머러스하고, 조금 다치더라도 가까이 가서 안아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주인공들이 나오는데다, 밤에 혼자 읽는 것은 무리일 정도로 섬찟하다.
솔직히 고백하는데, 밤에 읽다가 조용히 덮고 사람들이 가득한 대낮의 사무실에서 다시 읽었다. 인터뷰하려고 읽는 거니까, 어때, 하고 민망함을 감추었다. 치정극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다”라고 쓰셔서 한참을 웃었어요. 위트 있게 치정극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아주 멋진 사랑 이야기들을 쓰시는 것 같아요.
보라_ 비극으로 자주 끝나지만, 사랑 이야기죠. 우연히 치정(癡情)의 한자를 보았는데 어리석을 치(痴) 자를 쓰더라고요. 이거다, 싶었어요. 새삼스럽게 아, 어리석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겠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멋있는 말이더라고요.
세랑_ 보통 ‘치정 살인’처럼 부정적인 뜻으로 써서 그렇게 귀여운 단어인지 몰랐어요. 어리석으니까 살인도 하는 거겠지만요.
세랑_ 프로필에서 “어떤 소재나 주제도 전부
보라_ 사실 사랑이, 현명하게 이 사람이랑 결혼하면 벤츠 타고 다니면서 평창동 대저택에서 살고, 애들은 다 외국인 학교에 보내고 그런 거 아니잖아요. 그것만 현명한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 그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거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세랑_ 전 정말 매일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리석을 치! (웃음) 이번 장편에도 부합되는 말이네요. 몸 사리지 않고 사랑하는 주인공들 덕에 장편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보라_ 친구 중에 읽고 가위 눌렸다는 사람이 있어서……
세랑_ 저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특히 후반부에 ‘문’이 정말 제대로 열리고 난 다음에 굉장히 무서웠어요. 의외로 주인공들은 늑대인간과 달걀귀신인 것 빼고는 참 친근한 캐릭터들인데 말이죠. 간략하게 소개해주신다면?
보라_ 루저들의 이야기? (웃음) 특별한 것 없고 가진 것 없고. 평범한 사람들도 살다보면 정말 많은 문제에 부딪히잖아요. 그런 문제들에 부딪쳤을 때 평범한 방식으로 다정하게 끝이 나는 이야기를 한번 써보고 싶었어요.
세랑_ 작품마다, 굉장히 압축적인 한 장면이 꼭 있었던 것 같아요. 『문이 열렸다』에서는 어떤 장면인가요? 이 장면을 위해 작품을 썼다 라든가, 그런 식으로 스토리보다 장면이 먼저 오는 경우가 있잖아요.
보라_ 마지막 장면인 것 같아요. 남녀 주인공이 손을 잡고 골목길을 올라가는. 아, 그리고 지하철 장면이요. 요즘은 스크린 도어 때문에 누가 선로에 떨어지는 일이 적은데,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다가 예전에 아기가 선로에 떨어진 걸 고등학생이 거의 초인적인 속도로 구해낸 사건을 다시 봤어요. 그 CCTV 장면을 보니 고등학생이 구해내서 망정이지, 아기가 걸어가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둘러싸는 귀신이라든가, 발만 나오는 그런 건 생각해낸 거지만요.
세랑_ 전철 맞은편에 여자가 앉아 있는데 여자 머리는 멀쩡하고 뒤에 비친 유리창에서만 머리카락이 마구 날리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어요. 으아, 무서워라. 작가 후기에서 벽에서 나오는 소리는 직접 경험하신 거라고 읽었어요. 저도 사실 그런 경험이 있었거든요! 고등학교 때 공부하고 있는데 눈앞에서 아무 이유 없이 종이가 막 구겨졌어요. 펴져 있던 종이가 주먹만하게. 귀신이 “너 공부하는데 무섭지!” 하고 구기고 간 것 같았어요.
세랑_ 아, 무서운 이야기일까 겁내며 들었는데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참, 그 장면 재밌었는데! 늑대인간이 변신하다가 옷이 찢어졌는데 경찰이 공연음란죄와 외설죄를 적용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장면요. 아, 그리고 급박한 상황에서 여주인공이 남주인공한테 “물어!”라고 하니까 남주인공이 “명색이 늑대인간인데 개도 아니고” 하면서 투덜거리는 장면도 좋았어요. 아주 이상한 이야기인데도 대사가 일상적었어요. 실제로 이런 대화를 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할 정도로요.
보라_ ……친구 중에 늑대인간이 없어서. (웃음)
세랑_ 주인공들 중에서 누가 제일 본인과 닮았나요?
보라_ 역시 남자 주인공인 것 같아요.
세랑_ 글만 봤을 때는 여자 쪽이지 않을까 했는데, 직접 뵈니 정말 남자 쪽이랑 더 비슷하신 것 같아요. 저는 정말, 석원씨가 완소! 제 이상형이에요!
보라_ 저도 그래요.
세랑_ 어쩜 그렇게 완벽한 남자가 있을 수 있을까. 누나 말 잘 듣는 남동생인 것도 맘에 들어요.
보라_ 그렇지만 유부남이어서. (웃음)
세랑_ 남매 관계가 생생한 것 같아요. “그래도 망나니 오빠라도 사람인 쪽이, 괴물보다는 훨씬 나았다”라는 문장에서 폭소했어요. 슬픈 문장인데 웃어서 죄송해요. 실제로 형제분은 어떻게 되세요?
보라_ 저도 여동생이 있어요. 소설과는 좀 다르지만요. 아, 내용 중에 나왔던 녹색 알약, 제가 편두통이 심해서 여동생이 보내준 거였어요.
세랑_ 아, 결정적인 녹색 알약! 현실에 기반하고 있었군요.
보라_ 은행잎 성분의…… (웃음)
세랑_ 참, 그 장면도 너무 좋아해요. 늑대인간이 가게를 마구 헤집고 있어서, 가게 바깥에서 사람들이 미친개가 나타났다고 경찰이랑 동물 보호소에 연락하자니까 여자가 내가 키우는 개라고 말하는 장면요.
보라_ 예, 뭐, 사실 거짓말도 아니니까요.
세랑_ 지금은 러시아문화에 대해 강의하고 있으시잖아요, 어떤가요?
보라_ 학생들이 정말 재밌어요. 그런데 졸면 상처받아요.
세랑_ 유학 생활의 로맨스 같은 건 없나요?
보라_ 옥수수밖에 없어서요. 자동차 번호판에도 옥수수가 그려져 있는 동네였죠. 주산물이라. 아, 유학은 아니고 여행 갔을 때 우즈베키스탄에서 잠시 로맨스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일 때문에 우즈베키스탄에 초청을 받으셨는데 가족들이 다 함께 갔어요. 그런데 공항에 가보니 그렇게 온 가족들이 여러 팀이더라고요. 일행이 열여덟 명인데 현지 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저뿐이더라고요.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러시아어가 통하니까요. 우즈벡인 가이드로 알바하시는 분과, 현지 한국인 교수님께서 도와주러 오셨어요. 2주 정도 다녔는데 우즈벡인 청년과 눈이 맞은 거죠. (웃음) 분위기가 참 묘했던 게 어디가 가고 싶다, 뭐가 먹고 싶다, 일행 중에 누가 약이 필요하다, 그런 걸 제가 다 해야 하잖아요. 그런 대화가 결국 나중에는 밀어가 되었는데 그쪽 사람들은 애정 표현을 “아,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여, 불꽃이여” 식으로 고전적으로 하더라고요. 그런 말들을 나누고 있는데 나머지 일행들은 전혀 몰랐죠. 사무적인 대화를 하는 줄 알았을 거예요. 평생 이런 말을 언제 들어보겠나 하고 가만 있었어요. 스무 명 넘게 다녀도 둘만 있는 느낌이 신기하더라고요.
세랑_ 온 가족 앞에서 밀어를 나누셨군요. 결말은 어떻게 되었나요?
보라_ 여행이니까, 정식 연애는 사흘이고 결국 돌아와야 했죠. 손도 한 번 못 잡아보고. 돌아와서 두 달 정도 메일로 연애를 했는데 그 친구가 목화 따러 가야 해서 헤어졌어요. 비극적이죠. (웃음)
세랑_ 목화요?
보라_ 우즈베키스탄이 전 세계 면화의 7,80퍼센트를 생산한대요. 그 친구가 메일로 우즈베키스탄의 모든 것에 대해 강의를 했거든요. (웃음) 아, 혼삿길 막히는 거 아닌가. 여튼 도시에서는 서구화된 생활이 가능했지만 거기가 그때만 해도 조금만 도시를 벗어나면 우편물도 제대로 전달이 안 돼서 사람을 직접 보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요즘은 좀 낫겠지만. 우즈베키스탄은 목화 따는 계절에 모든 게 멈춰요. 직장인도 학생도 하던 일 다 그만두고 목화를 딴대요. 두 달 넘게 따더라고요.
세랑_ 소설로 쓰셔도 되겠어요! 목화 말고 좀더 끔찍한 걸 따면.
보라_ 눈알. 눈알을 따야 할까요.
세랑_ 중간문학, 경계문학의 대표 주자로 손꼽히시는 것 같아요.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보라_ 사실 그런 규정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이 없어요. 신경 쓰지 않아요.
세랑_ 하긴 정말 좋은 문학 중에 중간문학이나 경계문학이 아닌 게 없으니 좀 애매한 개념인 것 같긴 해요. 대중성과 작품성을 다 가지고 있다는 말에서 장르문학이란 말보다는 좋긴 한 것 같은데.
보라_ 특별히 그렇게 구분하지 않는 편이라…… 그냥 쓰는 거죠.
세랑_ 이건 꼭 써보고 싶다 하는 이야기, 다음 단편이나 장편이나 좋으니 예고편 삼아 살짝 귀띔해주신다면?
보라_ 단편은 젊은 여자 대학생이 주인공이에요. 과외도 잘리고, 어머니가 편찮으세요. 편찮으신 어머니를 위해, 자기도 모르게 여러 가지 모험을 하는 내용이에요. 장편은 추리소설이 쓰고 싶어요. 30대 중반 남자가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사건을 해결하러 다니는.
세랑_ 웃기고, 무섭고 그렇겠네요.
보라_ 웃길 수 있으려나.
정보라의 다른 작품이 읽고 싶다면 환상문학단편선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 전자책 『방문』, 그리고 환상문학 웹진 거울(www.mirror.pe.kr)에서 다채로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 단편들을 읽다가 보이지 않는 이면의 이런저런 괴물들이 따라붙는다면, 책임지지 않겠다. 나는 모르겠다. 나도 읽기 무서워 죽겠다. 인터뷰 내내 작품 속 장면들을 회상하며 돋은 소름을 작가에게 보여주며 “이것 보세요!” 하기 바빴다.
그래도 어리석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섬뜩한 장면 아래에 사랑의 밀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끝없는 옥수수밭과 죽은 도시를 헤치고 돌아왔으니까.
정보라 작가님과 정세랑 님의 인터뷰 풀버전은 『풋』 2010년 여름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미처 분량관계로 다 싣지 못한 깨알같은 이야기들이 가득가득 심겨 있어요. 무더운 여름날입니다. 서늘하게 『문이 열렸다』와 함께, 건강하게 보내세요!
저는 사무실 밖에 천둥번개가 쳐서 덜덜덜덜, 떨고 있습니다.ㅜ_ㅜ 곧 오컬트호러액션소설(?)『게이트』도 나오는데 이 무슨…… 아흑.
[출처] 『문이 열렸다』정보라 작가님 인터뷰|작성자 파란미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