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돌이 되기 전부터 만나왔으니, 서른 다섯 해가 된 셈이다. 고리 원자력에 근무했던 남편의 직장 동료들이다. 아이들은 삼십대에서 사십대가 되었다. 부산 송정 해수욕장 부근 나즈막한 산에서 열 살 미만의 다섯 집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찍은 사진을 보면, 쏜살같이 흘러간 시간들을 절실하게 실감하게 된다. 숯가마에서 찜질을 하고 남편들 넷이서 주황색 면찜질복을 헐렁하게 입고 찍은 사진도 있다. 지금에 와서 보니 젊음이들이다.
퇴직을 하고도 만남은 지속되었다. 고리와 광주와 구미와 부산과 서울. 거리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봄과 가을이 돌아올 때마다 만났다. 가는데 반나절 돌아오는데 반나절, 그리고 겨우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것이었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구미 부산 광주 양평 울산등 꽤 여러지역에서 만났다. 남편들은 지나치다싶을만큼 술을 많이 마셨고 취해서 세상을 점령한 듯 큰소리를 쳤다. 그 당시에 아내들은 너나없이 적당히 마시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젊어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이제 나이들어보니 안다. 지금 술을 마시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다.그것도 조금. 여자들은 밤이 이슥토록 고단한 인생길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도시에서나 사회생활에서 맛볼 수 없는 훈훈한 사람의 정이 느껴져서였을 것이다.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다들 달려왔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 양보하고 배려하고 이해하며 개인 개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면 그 만남에 문제가 생길 이유가 없다. 남편들이 직장을 다니는 동안 우리 모임은 평탄하게 유지되었다. 그동안 모아온 회비로 퇴직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여 네 집이 대만여행을 계획한 것이 화근이었다.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함께 여행을 다녀오라는 말이 있다. 해외 첫번째 여행이 아닌가. 서로에 대한 기대가 커서였을까. 믿음과 배려와 이해가 깨졌다. 누군가 한걸음 물러서면 쉽게 해결될 수 있어 보였지만, 결국 한 집이 모임에서 빠져나갔다. 그것은 삼십여 년 넘게 쌓아온 정을 소중하게 여겼던 모두에게 상처로 남았다.
세월이 지나가고 있고 한 사람이 저 세상으로 돌아섰다. 한 사람은 암에서 벗어났고 또 한 사람도 암으로 투병중이다. 거기다가 코로나로 만날 수 없던 기간이 무려 3년이 지나갔다. 이래저래 만나기가 어려운 상황의 연속인데, 딸아이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다들 와주면 좋겠지만 거리상 기대할 수는 없었다.
신부와 신랑과 혼주의 사진 촬영이 끝나고 하객들을 맞이하기 위한 자리로 이동 중인데, 저만치에서 활짝 웃으며 세 사람이 걸어온다. 울산에서 구미에서 그리고 분당에서 총무님과 회장님과 한나엄마다. 어찌나 반갑던지 어찌나 고맙던지.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참석해서 함께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교통이 편해지기는 했다지만 울산이나 구미에서 하루에 다녀가기에는 먼 길이다. 내가 기어서라도 참석하려고 했습니다. 고리에 살고 계신 상문이 아빠의 진심이 느껴지는 말씀이다. 더욱 총무님 남편께서는 투병 중이기도 하고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어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 처지다. 고맙습니다 가 저절로 나오고 공손하게 고개가 자꾸 숙여졌다. 모든 하객에게 결혼식 내내 그런 마음이었다.
보답을 하고 싶었다. 조카들까지 모두 참석하게 해주신 언니들과 오빠는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서울이나 경기도 쪽에 사는 사람들이야 언제든 만나서 따스한 밥 한 그릇 대접하면 되는 일이다. 문제는 고리와 구미에 사는 분들인데. 그동안처럼 만나서 하룻밤 자는 방법을 제안했지만 아쉽게도 주유소를 운영하는 총무님네가 꼼짝할 수가 없다고 했다. 도와주던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부부 둘이서 주유소를 꾸려가는 중이라고 했다. 시간이 많은 우리가 구미로 가기로 했다.
네 시간을 달려 구미 주유소에서 도착했다. 밖에서 손님들 차에 주유를 해야 하므로 두툼하게 옷을 차려입은 총무님이 나이 들어도 복사꽃 같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달려 나왔다. 왜 그리도 반가운걸까? 손을 잡는 것도 부족해 얼싸안고 기뻐하였다. 그동안의 만남을, 지금의 만남을 감사할 줄 아는 나이가 되어서일까. 가까운 고기집이 있어 대접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내가 받은 만큼 또는 준 만큼 세상은 돌고 돌아간다. 서울에서 구미까지 와서 점심을 사주니 너무 고맙다며 회장님은 사과 한 상자를 준비해오셨다. 무엇이든 나누려는 마음이 크신 분이다. 내년 봄에는 만나서 하룻밤 자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솜씨좋은 총무님의 백김치와 돼지갈비를 약속했다. 만남이 있을 때마다 맏며느리처럼 열심히 음식을 준비해 온 사람은 총무님이었다.
구미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일이 우리 나이에는, 특히 운전을 하는 그에게는 무리한 일정이다. 서울로 가는 길목인 단양에서 하룻밤을 편하게 푹 잤다. 아침 일찍 소백산 氣기나 받고 가자며 그쪽으로 향했다. 설악산이나 태백산은 굼벵이처럼 꾸물꾸물 꼴찌로 올라갔지만 그래도 정상에는 다달았다. 소백산은 오며가며 웅장한 자태를 바라만 보았었다. 소백산 입구는 눈으로 덮여있었다. 활기차게 산을 오르는 젊은 등산객들이 많았다. 부러운 눈으로 쳐다볼수밖에. 미친듯이 주말과 휴일마다 산을 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도 언제 천천히 한번 소백산 올라가요 올라 가다가 너무 힘들면 내려오고. 만약 소백산을 오르게 된다면 꾸역꾸역 죽을힘을 다해 올라가고야 말겠지만.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간만 못하니라 친정어미의 말씀처럼.
우리는 산 아래쪽 눈이 덮인 산길을 빙 돌아 천천히 산책하였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대만족이었다. 기쁨이 가슴 가득 들어찼다. 감사합니다 를 걸음마다 되뇌었다. 수많은 가지들을 자랑스럽게 펼쳐든 겨울나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으로 덮인 소백산은 또 얼마나 웅대한가. 심호흡을 크게 여러 번 하였다. 소백산 정기가 느껴졌다. 몸이 가벼워지고 특히 건조한 눈이 부드러워지고 밝아졌다. 감사함을 전할 수 있고 감사함을 느끼고 말할 수 있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이 시간들이 소중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옆지기가 있어 가능한 일.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