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평을 처음 만난 건 국어책을 통해서였다. 지금도 시험 때면 단골로 출제되는 문제가 있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라는 정철의 ‘관동별곡’ 일부가 지문으로 제시된다. 그리고는 밑줄 친 ‘죽림’은 어디인지를 묻는 문제다. 정답은 전남 담양의 창평이다. 창평에는 예전에 도축장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구입한 신선한 돼지 부산물로 끓여 장꾼들을 상대로 판 것이 창평국밥이다. 지금은 도축장은 없어지고 창평시장 안의 국밥집들만 남아 창평의 명물이 되었다. 차츰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 ‘창평국밥’이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화 되다시피 했다. 담양의 고풍스런 멋과 함께 창평장터의 창평국밥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각별한 맛이다. 서울 신설동역 <전라도 창평국밥>은 그 맛과 느낌을 잘 살려낸다.
이모에게 배워 맛 다듬은 창평국밥의 서울행
최영석(59) 김은희(56) 씨 부부는 20년 넘게 광주광역시에서 족발·보쌈 식당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김씨 이모의 권유와 전수를 받고 창평국밥 집으로 전업해 최근까지 광주여대 앞에서 5년간 영업을 했다. 부부에게 비법을 전해준 김씨 이모는 지금도 창평시장에서 국밥집을 운영하고 있는 창평의 터줏대감이다.
김씨는 이모에게 배운 창평국밥의 맛과 질을 좀 더 보강했다. 식당이 여자 대학교 앞이어서 아무래도 시골 장터 국밥과는 좀 달라야 했다. 천성이 성실하고, 좋은 음식에 대한 열정이 강한 부부는 조리방법을 연구하고 식재료를 추가하면서 맛을 차츰 개선했다. 우선 돼지 잡내를 완벽하게 제거했다. 냄새를 없애주는 양념을 찾아내고, 내장은 별도로 끓였다. 내장 끓인 국물도 사용하지 않고 버렸다. 원가가 더 들었지만 국물 맛이 한결 좋아졌다.
무엇보다도 맛을 개선한 일등공신은 연탄불이었다. 여러 차례 시도에도 원하는 맛이 나지 않자 김씨는 연탄에 끓였던 예전 방식을 떠올렸다. 곧 연탄 화덕을 들여놓고 국물을 내어보니 불편하긴 했지만 확실히 깊은 맛이 되살아났다. 돼지국밥이라면 근처에도 못 오던 사람들조차 맛있게 먹었다. 김씨의 창평국밥은 본고장의 맛과 정체성을 유지하되 좀 더 세련미를 더했다.
두 사람은 힘들어도 따로 직원을 두지 않고 부부가 열심히 식당을 운영했다. 단골도 많고 수입도 꽤 짭짤한 편이었다. 그런데 한 달 전에 갑작스레 서울로 식당을 옮겼다. 흔히 수완 좋은 사람들의 분점 개점이나 가맹점을 낸 것도 아니다. 부부가 낯선 타관에 온 이유는 단 하나,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이들 부부 아들이 최근 서울로 유학을 왔다. 서울엔 연고가 없어 아들은 외로운 타향살이를 해야 했다. 다른 건 다 적응했지만 아들은 서울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매일 굶다시피 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건 어느 부모나 괴롭다. 주말마다 광주 집에 내려오는 초췌해진 아들 모습을 보다 못해 극약처방을 내렸다. 돈 버는 것보다 아들 밥이나 제대로 챙겨주자! 부부는 결국 알토란같은 식당을 넘기고 서울로 올라왔다. 일단 2년 기한으로 식당을 열면서 서울에 아들과 머물 예정이다. 맹자 모친도 울고 갈 결정이다.
생닭 넣고 연탄불에 뭉근하게 끓여 진하고 담백
순댓국과 마찬가지로 창평국밥도 깔끔한 재료 손질부터 시작한다. 우선 돼지의 대가리, 내장, 뼈, 부산물을 물에 담가 충분히 핏기를 빼준다. 내장을 제외한 내용물들에 물을 붓고, 잡내 제거용 재료들과 함께 넣어 연탄 화덕에 끓이면서 육수를 낸다. 뭉근하게 연탄불에서 2시간 넘게 끓이면 가스 불에서보다 맛이 훨씬 깊어진다. 이때 닭발과 생닭을 함께 넣어주면 국물 맛이 더 진하게 우러난다고 살짝 귀띔해줬다. 바로 본바닥 창평국밥과 다른 점이자 이 집에서 개선한 부분이다. 고기국물 맛이 진하면 굳이 조미료를 과다하게 넣지 않아도 된다.
주문이 들어오면 미리 익혀 썰어둔 머리 고기, 부산물, 별도로 삶은 내장, 순대에 육수를 붓고 끓여 내간다. 이 과정에서 콩나물을 넣는다. 육수를 내면서 돼지기름도 말끔하게 걷어낸다. 손님이 주문한 메뉴에 따라 국밥에 들어가는 재료가 달라진다. 모듬국밥, 머리국밥, 내장국밥, 순대국밥이 모두 한 그릇에 6000원씩이다.
가장 많이 나가는 것은 순대국밥과 모듬국밥이다. 순대국밥은 머리 고기와 부산물에 순대가 들어갔다. 여기에 내장까지 가세한 메뉴가 모듬국밥이다. 미질 좋은 쌀로 지은 밥과 함께 국밥이 나오는데 내용물이 푸짐하다. 역시 국물은 기름이 쪽 빠져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다. 잡내가 전혀 없고 구수한 고기의 풍미가 깊고 진하다. 프림이나 조미료 맛이 과다한 순댓국들과 그 맛의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다. 기호에 따라 부추, 양념장(다데기), 새우젓, 들깨 가루를 넣어서 먹는다.
남도 맛 물씬 나는 김치, 달고 아삭한 깍두기
국밥 맛은 아무래도 김치와 깍두기 맛이 좌우한다. 이 집은 반찬 맛도 탁월하다. 특히 김치는 정성을 들여 담갔다. 먼저 황태 대가리와 다시마, 대파, 양파, 배, 사과, 무로 육수를 낸다. 이 육수로 찹쌀 풀을 쑤어, 새우젓과 멸치젓을 조금 넣고 김치를 담갔다. 나주시 노안면의 저온 저장고에 1년치를 보관해두고 조금씩 꺼내 쓴다. 광주 인근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향수에 젖을 맛이다. 깍두기는 남편 최씨가 수시로 담그는데, 무가 달고 아삭하면서 국밥에 적당한 크기다.
김씨의 이모가 보내주는 ‘묵은 깻잎’ 또한 귀한 반찬이다. 1년간 장에 담갔다가 양념해서 또 1년을 묵힌 장아찌다. 그러나 양이 많지 않아 상에 내놓지 못할 때도 있다. 저녁에는 술 손님들을 위해 안주용 메뉴도 준비했다. 감자탕(중 2만원, 대 2만5000원), 내장전골(중 2만원, 대 2만5000원), 머리고기(1만2000원) 등이다. 내장과 머리에 순대를 더한 모듬(1만5000원)도 있다.
수줍음 많은 최씨 부부는 한사코 취재를 만류했다. “식당이 작고 초라해 부끄럽고, 뭐 맛있거나 대단한 음식도 아닌데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이 정도 국밥 먹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정작 두 사람만 모르고 있었다. 광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직원을 쓰지 않고 부부 둘이 운영한다. 절감한 인건비는 음식의 질을 높이는데 쓴다. 연중무휴로 오전 8시에 문 열어 밤 10시까지 밥장사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부부는 20년 넘게 그런 생활을 해서 특별히 힘들지는 않다고 한다. 자신들의 건강이나 식당의 성패보다 아들의 장래가 훤히 트이길 더 바라고 있었다.
<전라도 창평국밥>서울 동대문구 천호대로 15(신설동 102-12), 02-929-0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