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25. 간화선과 묵조선
‘사회적 중생교화’냐 ‘개인적 순수수행’이냐
깨침 강조 않는 ‘좌선지상’의 묵조선 비판
① 간화선의 성립의 배경
간화선은 화두를 통한 선수행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승이 화두를 제기하여 제자로 하여금 화두를 보게끔 하는 선수행이다. 반면 제자가 스승에게 화두를 들어 질문하는 형식을 통하여 그 답변행위에서 스스로 어떤 의미와 행위를 터득하는 선수행이다.
중국 영파시에 자리잡고 있는 천동사의 모습. 천동사는 묵조선 수행을 하고 있는 조동종 사찰이다. 사진제공=도서출판 민족문화
이런 의미에서 화두의 작용은 수행에 임하는 제자에게는 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스승에게는 화두가 제자를 제접하는 도구이고 수단적인 의미이지만 제자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부여된다. 곧 화두는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부여받아 해결해야 하는 과업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제자 스스로가 맛보고 도달하고자 설정한 의문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화두는 깨침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이면서 스스로가 타파해야 하는 도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곧 화두는 한편으로 도구로서 유지해야 하는 것이면서 한편으로 그 자체를 타파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것이 화두가 지니고 있는 양면성이다. 이 양면성은 선종교단의 자체에서 일어나는 변질 내지 변혁의 과정과 그것에 대응하기 위한 방식으로 표출되어 갔다. 곧 수행과 깨침에 대한 입장 내지 견해와 자체내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한 모색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당 말기의 선풍의 흐름에서 나타났고, 자체내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한 것은 송대에 선수행법의 차이와 당시 선종계의 폐풍에서 나타났다. 전자가 종적인 이유라면 후자는 횡적인 이유이다.
대혜가 간화선을 주창하게 된 그 종적인 원인은 전통의 무사선에 대한 송대선풍계의 오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횡적인 원인으로는 당시에 행해지고 있던 묵조선법에 대한 대혜의 견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대혜는 묵조선법에서 깨침을 강조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서 좌선만 행하는 태도를 부정하였다. 그것은 무자공안에 의해서 자기의 망상을 제거하는 것을 강조했던 대혜에게 있어 공안을 참구하지 않는 그것이야말로 모든 번뇌망상의 근원이었다.
이에 대하여 대혜는 크게 세 가지 유형에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곧 우선 좌(坐)의 형태에 대한 것 곧 좌선지상주의에 대한 것이고, 다음은 화두의 무시에 대한 것 곧 화두선과는 다른 수행방식에 대한 것이며, 그 다음은 깨침에 대한 착각 곧 좌선 자체를 깨침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한 비판 등이었다.
묵조선법에 대한 이와 같은 대혜의 입장은 이미 그 비판속에 필연적으로 그에 상대한 새로운 선법의 도래를 잉태하고 있었다. 그것은 수행과 깨침에 대하여 그것을 즉시대적(卽時代的)인 것으로 보려는 대혜의 입장과 딱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거기에서 순수하게 진리에 입각한 초시대적(超時代的)인 것으로 보려는 묵조선법의 개인적인 입장 곧 순수수행이라는 입장과 깨침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이고 종교적인 입장이 대사회적인 중생교화라는 대혜의 입장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무사선에 대한 오해 씻고 순수선으로 회귀
② 묵조선의 성립배경
당대 말기에 형성된 선종오가 가운데 청원계통에서 시기적으로 처음 성립한 것은 조동종이었다. 조동선에서는 깨침의 세계에 안주하는 것마저 경계할만큼 철저하였다. 대표적인 가르침으로는 대상을 공하게 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는 향상의 자기완성과 또한 사회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서의 향하의 타인의 구제가 있다. 이것이 조도(鳥道).현로(玄路).전수(展手)로서 동산의 삼로(三路)이다. 이와 같은 종풍은 대오철저한 사람의 자유무애한 행위인 몰종적의 선풍을 자기에게서 실현하여 그 깨침을 친밀하게 수용해 나아가는 주도면밀한 가풍으로 정립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당대에 형성된 순수한 조사선의 가풍을 회복하기 위한 방식이 요구되었다. 그 하나는 번뇌로 찌들어 있는 현실을 통찰하고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인간속에 내재하는 본래의 자성 내지 불성에 대한 자각이다. 곧 하나는 무사선의 오해를 벗어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진정으로 무사선의 본래성에 뛰어들어 그 본질을 다시 확인시켜 나아가는 경우의 방법이 있다. 이 가운데 전자가 간화선의 출현을 이끌어낸 방식이었다면 후자는 묵조선의 출현을 이끌어낸 방식이었다. 그만큼 묵조선의 출현방식에서 그 사상적인 배경은 철저한 무사선, 나아가서 무사선을 순수선으로 거듭나게 하는 철저한 자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묵조선의 사상적인 배경에 자리잡고 있는 이와 같이 순수선으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은 초기선종 그대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무사선에 대한 오해를 벗고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무사선의 참정신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순수선이란 전통적인 수행을 계승하면서 당시 송대의 선종동향에서 새롭게 수행의 의의를 다지는 행위로 거듭난다는 의미로 묵조선이 겨냥한 수행풍토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중심에 진헐청료와 굉지정각이 있었다.
禪수행 같지만 공안관 좌선관 심리관 달라
③ 간화선과 묵조선
송대에 간화선이 등장한 근거는 올곧은 수행을 진행시키기 위한 모색에서 찾을 수 있다. 곧 수행에서 겪는 망상으로 인한 산란심과 적적공무에 떨어지는 혼침을 다스리고 화두일념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그 첫째 이유였다. 화두일념이란 화두를 들어 통째로 간파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 전체를 체험하여 자신이 화두 자체가 되는 과정이다. 이런 까닭에 고봉원묘는 간화선 수행에 대하여 대신근(大信根).대의문(大疑問).대분지(大憤志)의 세 가지를 필수적인 요소로 언급하였다.
묵조선의 의미는 묵조의 수행으로서 묵은 몸의 좌선이고 입의 침묵이라면 조는 마음의 관조이고 본래성불에 대한 자각이다. 이에 대하여 그 방식은 우선 지관타좌(只管打坐)로서 좌선을 중시한다. 좌선의 모습은 몸의 자세이고 수행이 완전하게 드러나 있는 깨침으로 부각되어 있다. 곧 좌선은 깨침의 수단을 넘어 깨침의 본질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모든 존재가 본래부터 깨침을 구비하고 있어 그것에 대한 자각을 의미하는 본증자각(本證自覺)을 강조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몸과 마음과 감각과 언설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것을 신심탈락(身心脫落)이라 한다. 신심탈락의 경지는 분별심이 없는 올곧은 사유작용을 의미하는 비사량(非思量)으로서 그것이 몸과 마음에 두루 구족되어 있는 경우를 현성공안(現成公案)이라 한다. 곧 일상의 생활에서 진리가 드러나 있고 작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점에서 간화선과 묵조선은 몇 가지 점에서 대비된다.
첫째 공안관이다. 대혜의 간화선에서의 일상행위는 곧 화두일념으로 이루어지는 생생한 자신에 대한 자각이었다. 그러나 묵조선에서의 공안관은 현성공안을 중시하여 어떤 하나의 대상에 대한 참구가 아니다. 일상의 모든 행위를 본증의 현현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모든 존재가 그 진리를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체중생 실유공안의 입장에 서 있다.
둘째는 좌선관이다. 간화선에서는 좌선을 수행의 원칙으로 중요시하면서도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묵조선에서는 좌선이 그대로 깨침이고 진리로 간주된다. 따라서 불법은 좌선의 모습 그대로를 의미하는 위의즉불법(威儀卽佛法)으로 통한다.
셋째는 심리관이다. 간화선의 공안참구과 묵조선의 좌선일여 속에서의 심리적인 차이를 말한다.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에서의 심리는 오로지 화두일념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의식은 공안참구에 있어 하나의 의단을 필요로 한다. 그 의단이 결국은 공안 자체로 의식화되는 데에 이르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바로 공안참구의 의의이면서 동시에 효용이다. 그러나 묵조선의 심리는 비사량이라는 무분별의 사량으로서 단순한 사량의 부정이 아니라 절대무심의 작용이다.
김 호 귀/ 동국대 강사
[출처 : 불교신문]
☞'불교사 명장면' 목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