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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 정보부장과 香谷선사의 운명적 만남
발설해 버려야 속이 시원해지는 화체(火體)의 기질. 화체의 성격은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좋게 말하면 머리가 명석하고 투명한 성격이지만 세간생활에서는 본인에게 불이익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고스톱을 칠 때 ‘고돌이’ 원단이 표에 들어오면 곧바로 얼굴 표정에 그 설레임이 반영되는 체질이라고 보면 쉽다. 화체는 도박에서 좀처럼 돈을 따기 어려운 체질이기도 하다.
박도사의 그러한 기질은 음지에서 은밀하게 활동해야 하는 직업적 도사에게는 치명적 약점이 되었지만, 무대 밖에서 관람하는 구경꾼들에게는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유신(維新)을 유신(幽神, 저승의 귀신)이라고 규정한 것이고, 그 외에도 본 지면에서는 차마 공개할 수 없는 수많은 정치인이나 재벌 회장들과의 ‘스파크’가 있었다.
박도사가 권력과 관련되어 곤욕을 치른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소위 윤필용 사건이다. 1973년 4월 당시 수경사령관이었던 윤필용 장군이 모반 기도 혐의로 보안사령부에 체포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31명의 군 수뇌부가 옷을 벗어야만 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유신 선포후 계엄령하 궁정동의 한 식당에서 윤필용 수경사령관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윤장군이 “각하가 노쇠하니 건강이 약해지기 전에 물러나시게 해서 우리가 모시고 후계자를 내세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이후락 중정부장에게 하였다. 그러자 이 부장이 “각하가 물러나면 다음에는 누가 되느냐?”고 묻자, 윤장군은 “형님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이 대화 내용이 박대통령에게 즉각 보고되었고, 이는 모반 사건으로 간주되어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과 강창성 보안사령관의 주도하에 수사가 시작되었다.
수사는 당시 부산에서 영업하고 있던 박도사에게까지 뻗쳤다. 평소 이후락 정보부장이 점쟁이들에게 무엇을 물어보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던 만큼, 이부장과 알고 지내는 박도사를 데려다 취조하면 어떤 정보가 나올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적어도 대권에 야심이 있다면 단골 점쟁이에게는 그 사실을 털어놓고 상의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했던 것이다. 자기 운명이 과연 대권을 잡을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보안사 수사팀은 이후락·윤필용과 평소 왕래가 있었던 부산의 박도사를 그 파트너 점쟁이로 찍었던 것 같다.
여기서 이후락의 이판사판(理判事判)에 관한 정보 수집 형태를 일별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후락씨를 한국의 장량으로 본다. 이렇게 말하면 필자를 비판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행했던 악업(惡業)과 선업(善業)의 차원을 떠나 한 개인이 명철보신(明哲保身)하는 데 관계되는 판단의 유형만 놓고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초한지’(楚漢誌)에서 보면 한신은 어물쩡거리다 타이밍을 놓쳐 유방에게 잡혀 죽었지만, 장량은 한건 챙긴 다음 미련없이 산으로 도망가 명철보신한 사례다.
이후락도 역시 10·26 이후 낌새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경기도 이천 도자기 공장으로 숨은 다음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그 명철보신의 판단 차원에서만 놓고 보면 그는 ‘초한지’에 등장하는 장량 만큼이나 노련한 판단을 보여주었다. 각종 정보채널에서 올라오는 정보 수집에서도 치밀하였지만 이판의 정보, 즉 본인이 이름난 고승이나 도인 그리고 술객들과의 접촉 과정에서도 필요한 정보라고 여겨지면 선입견 없이 수용하는 성향이었다.
그는 많은 술사들과 어울렸고, 숙명통(宿命通)이 열린 고승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인생의 진퇴를 수시로 상의하는 스타일이었다. 이들을 무시하지 않을 만큼 그는 노련한 인물이었다는 이야기 다. 필자는 최근 몇년간 그가 재임시절 만나고 다녔던 고승이나 술객들의 면면을 추적해 본 결과 그 범위가 의외로 다양하였다는 사실에 놀란 바 있다. 부산 기장의 묘관음사(妙觀音寺)에 계시던 향곡(香谷·1912~78)스님까지 만나고 다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야기가 샛길로 빠지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이 대목을 짚고 넘어가자. 향곡스님은 1960~70년대 한국 불교계를 풍미한 대선객(大禪客)이다. 그 우람하고 호탕한 풍모에 한방에 원숭이와 여우들을 날려버리는 선기(禪機)는 당대 제일이었다. 묘관음사에 가거들랑 향곡당의 영정을 한번 보시면 짐작이 갈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어느날 현직 정보부장이던 이후락이 묘관음사의 향곡스님을 방문했다.
이부장도 불교에 조예가 있어 ‘벽암록’ 정도는 읽었으므로 선사(禪師)를 만날 때는 첫 물음을 선문답(禪問答)으로 시작해야 하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후락은 대뜸 “어찌 이 골짜기에는 향기가 나지 않습니까?”하고 한 초식을 날렸다. 향곡스님의 이름이 향기 향(香)자에 골 곡(谷)자니 이렇게 빗대서 물은 것이다. 그러자 곧 바로 향곡당의 대답이 날아왔다. 선문답은 0.5초 내에 나와야 한다. 3초 후에 나오면 이는 선문답이 아니다. 향곡당 왈 “니, 이름이 후락이라꼬? 니, 후라이 잘 치게 생겼다.”
현직 정보부장의 이름을 ‘후라이’에 빗대 패러디한 것이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네가 와서 나불대느냐? 까불지 말라는 일갈이기도 하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유신 시절의 현직 정보부장을 향해 “후라이 잘 치게 생겼다”고 한방 날린 향곡당의 칼날은 역시 천하 명검이었다. 졸지에 한칼 맞은 이부장은 그 자리에서 큰절을 세번 올렸다. “큰 법문 들었습니다”하면서…. 만약 저질 같았으면 이런 모욕을 당하고 “저 - 영감탱이 당장 잡아 넣어. 남산 지하실에 가서 뜨거운 맛좀 보아야 하겠구만!”이라고 했을 텐데, 공손하게 삼배를 올릴 정도의 교양과 견문은 간직하고 있었던 셈이다. 아무튼 이후락은 사판의 정보 수집에도 열심이었지만 방외의 인물들을 만나면서 이판에 관한 정보 수집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윤필용 사건에 연루돼 고초 겪은 박도사
1973년 3월 무렵. 부산 동대신동 박도사의 2층집에 기관원들이 들이닥쳤다. 대문 밖에는 검정색 승용차가 대기해 온 동네 사람들은 기관원들이 간첩 잡으러 출동한 줄 알았다고 한다. 영문을 모른 채 기관원들에게 체포된 박도사는 집 밖에서 곧바로 헬기로 옮겨져 경남 마산지구의 정보부대인 해양공사 지하실로 끌려갔다. 정보부대 책임자였던 K소령은 박도사를 지하실에 꿇어 앉혀 놓고 “야! 너 도사야? 도사라면 네가 언제 여기서 나갈 수 있는지 알아 맞혀 봐?”하고 조롱하듯 내뱉었다. 너, 이제 죽었다는 뜻이었다. 이 말 끝에 박도사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더니 “오후 2시가 되면 나간다”고 대답하였다.
K소령은 “이 새끼, 여기가 어딘지 알아? 어디서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려”하면서 구둣발로 박도사의 정갱이를 걷어찼다. 그런데 2시가 되자 갑자기 사령부에서 전화가 왔다. “그 친구 지금 즉시 서울로 이송하라”는 오더였다. 깜짝 놀란 K소령은 박도사를 서울로 이송하면서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호칭도 ‘이 놈’‘저 놈’에서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호송 헬기 안에서 “제 팔자는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희 집 아들놈 사주도 한번 봐 주십시오?”하면서 정중하게 인생상담을 드려야만 하였다.
서울로 이송된 박도사는 다시 서빙고 지하실에 수감되었다. 보안사에서는 중앙정보부의 이후락 부장이 관련된 사건이라서 혹시 중앙정보부에 박도사를 뺏길까봐 취재원을 신속하게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서빙고에 구금된 박도사는 보안사 요원들의 취조를 받아야만 하였다. 취조의 내용은 ‘이후락과 윤필용이 너에게 와서 대권(大權)에 관한 점괘를 물어본 적이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시원한 대답이 안나오자 요원들은 박도사에게 고문을 가하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박도사를 데려온 K소령으로부터 박도사의 신통력을 전해들었던 까닭에 다른 사람같이 무작정 때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던 것 아닌가 싶다. 그 위기의 순간 박도사는 서빙고 지하실에 모여 있던 보안사 요원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너희들 지금 나를 때리려고 하는데, 나를 때리면 너희들 다 잡혀간다. 아마 사흘이면 잡혀갈 것이다.”
과연 사흘후 보안사 요원 17명이 뇌물수수 혐의로 모두 체포되었다. 박도사의 예언이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추측컨대 중앙정보부쪽에서 보안사에 대한 역공이 시작되는 과정에서 보안사 요원들이 뇌물 혐의를 받았던 것 같다.
서빙고 지하실에 있던 박도사는 다시 강원도 모처의 군부대로 이송돼 9개월간 연금상태로 지내야 했다. 군부대에 연금해 놓은 이유는 보안사에서 정보부에 박도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조처이기도 하였다. 만약 박도사가 정보부의 이후락 부장에게 넘어가면 수사하던 보안사에 불리한 증언을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9개월간 연금생활을 할 때 옆에서 박도사를 도와준 사람이 있었다. 최모라는 사람이었는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박도사에게 여러 가지 친절을 베풀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후일 최모라는 사람이 사업을 시작할 때 박도사가 그 보증을 서 주게 되었다.
그러나 최씨의 사업이 부도나는 바람에 그 보증이 두고 두고 박도사를 괴롭혔다. 천하의 박도사도 실수를 한 것이다. 이 보증건으로 인하여 박도사는 죽을 때까지 채권자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박도사 본인 이름으로는 부동산 등기를 해 놓을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어디에 하소연도 못하였다. 보통사람이 그런 실수를 하면 동정의 대상이 되지만, 앞일을 안다는 도사가 그런 실수를 하면 천하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박도사는 말도 못하고 끙끙 앓았다. 세상 살면서 식자층 노릇하기도 힘들지만 도사 노릇하기도 힘든 것이다.
박도사의 일생을 보면 돈은 상당히 벌었지만 풍족하게 돈을 쓰는 인생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돈은 쓰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있다. 돈을 버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사실은 재물복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박도사의 사주를 보면 재물복이 없는 팔자다. 필자가 입수한 그의 생년월일시는 음력으로 1935년 11월22일 유(酉)시다. 육십갑자로 환산하면 을해(乙亥)년 무자(戊子)월 정묘(丁卯)일 기유(己酉)시로 환산된다. 태어난 날은 정묘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주팔자상에 나타난 그의 주체는 일간인 정(丁)이다. ‘정’은 불이로되 태양과 같은 큰 불이 아닌, 화롯불과 같은 작은 불이다. 이 불이 태어난 계절이 음력으로 11월, 양력 12월의 추운 계절이다. 추운 겨울에 태어난 화롯불이니만큼 귀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불이라고 일단 간주한다. 그러나 불이 약하다. 약한 불을 보강하기 위해서는 인수가 되는 목(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박도사 팔자에서는 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목은 가족관계로 보면 어머니에 해당하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학문과 공부에 해당한다. 이럴 때 목을 용신이라고 말한다. 즉, 자신의 운명이 지닌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서는 공부하고 책 보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한다. 이런 형태의 사주팔자를 보통 전문용어로 ‘탐재괴인’(貪財壞印)의 사주라고 평한다. 탐재괴인이란 ‘재물을 탐하면 학문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사주의 역학관계에서 재물과 학문은 서로 반비례하는 관계에 놓여 있다. 재물이 많은 사주는 학문이 없고, 반대로 학문이 많은 사주는 재물이 없다. 학자가 지나치게 돈을 밝히면 공부를 못하게 된다는 이치와 같다. 그러므로 탐재괴인의 사주를 가진 사람이 재물을 쫓으면 몸을 상한다. 재물을 절대 쫓아서는 아니되며 어떤 상황에서든 책을 잡고 있어야 한다. 박도사의 사주가 그런 사주다. 박도사도 본인의 사주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재물복이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모든 재산을 부인 이름으로 해 놓았다. 그러나 막상 보증으로 인하여 본인 앞으로는 그렇게까지 재산을 전혀 가질 수 없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또 한가지 시달렸던 일은 고향인 서상면 옥산부락에 덕운정사를 짓게 된 일이다.
을해명당의 저수지 준설과 박도사의 중풍
덕운정사는 보통 가정집이 아니라 규모가 큰 목조건축이다. 단순한 살림살이 용도의 집이 아닌 수양을 하는 도관 겸 제자들을 가리키는 아카데미 용도로 지은 건축이다. 상당히 돈이 들어간 건축이다. 더구나 항간에 ‘50세 넘어서는 집을 짓지 말라’는 말이 있다. 집 짓는 일이 그만큼 사람의 진을 빼는 중노동이므로 50세 넘어 집을 짓다 잘못하면 건강을 다칠 수 있는 확률이 높다. 박도사가 상당한 건축비가 들어가는 덕운정사를 50세 넘어 시작한 것은 무리한 판단이었다. 탐재괴인의 팔자를 가진 사람이 많은 건축비가 들어가는 건물을 시작하였고, 더구나 보증 때문에 채권자들로부터 독촉을 받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50대 중반에 시작한 집 공사였다. 이 3가지는 모두 무리수였다고 보인다. 이 무리수로 인하여 박도사는 명을 재촉했다.
그것이 못내 아쉽다. 좀더 살아서 사주명리학에 관한 저술도 남기고 제자들도 양성하였으면 좋으련만, 그 일을 못하고 중도에 갔다. 이것도 결국 운명이겠지만 사주명리학에 애정이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없이 애석하기만 하다. 박도사 같은 인물은 10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박도사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시점은 1995년 을해년이었다. 그해에 경주 박혁거세 오릉에 가서 절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하게 울려왔다. 그때부터 중풍이 시작됐다. 흥미로운 점은 하필 그해에 박도사가 정기를 받고 태어난 극락산 밑 을해명당의 저수지를 포크레인으로 건드렸다는 사실이다.
동네 사람이 저수지를 준설하기 위해 저수지 바닥에 있는 돌들을 포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을자(乙字)의 목 부분에 잔뜩 쌓아 놓았다. 목이 눌린 상태였다. 대조해 보니 공교롭게도 저수지를 준설하던 그 시점에 중풍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까닭이 있는 것인가. 신비주의를 숭상하는 술사들은 이를 동기감응(同氣感應)으로 해석한다. 박도사 본인을 비롯하여 가족들은 그 저수지 준설공사와 중풍이 관련있다고 믿는다.
그 사람이 정기를 받고 태어난 지점을 인위적으로 훼손하면 그 해당인물 또한 훼손당한다는 것이 풍수의 동기감응 사상이다. 지령이 곧 인걸인데, 지령을 훼손했으니 어떻게 사람이 무사하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 동양의 풍수신앙이기도 하다. 박도사의 사망은 집을 짓는 무리수라고 하는 인간적인 실수와, 을해명당의 훼손이라고 하는 동기감응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사건의 배후를 캐 보면 대개 이처럼 복합적인 원인이 얽혀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박도사의 일생을 더듬어 보면서 생각나는 서양의 점괘(占卦)가 하나 있다. 국제화시대이니만큼 운명을 판단할 때도 국산품인 사주팔자만 애용할 것이 아니라 서양의 외제품도 이용해 주어야 한다. 박도사의 사주팔자에 대해 서양의 점괘로 크로스체크해 보면 그 점사(占辭)는 바로 ‘너 자신을 알라!’가 나온다.
이 말은 원래는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고 희랍의 유명한 델포이 신전 벽에 새겨 있는 금언이라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 가운데서도 최고의 신탁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 말은 원래 점괘였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점을 많이 보았다.
그리스 신화 자체가 수많은 점사와 혼합되어 있지 않던가. 왜냐하면 전쟁을 할 때는 민족 전체가 죽고 사는 전율할 만한 일이므로 신들에게 그 결과를 겸허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동서양이 마찬가지였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보다 품격이 약간 떨어지지만 서양 역사책의 원조로서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씌어진 헤로도토스의 ‘역사’(歷史)가 유명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첫 대목을 보면 델포이 신탁 이야기가 등장한다. 기게스라는 왕의 측근이 왕위를 찬탈하고 왕비와 결혼하였을 때 과연 그 일이 정당한가를 두고 델포이 신전에 가서 점을 쳐 보았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상 최고의 점괘는 바로 ‘너 자신을 알라!’
서양 역사책의 원조인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가장 첫 대목에 신탁 이야기가 나오고 델포이 신전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필자는 일찍부터 주목한 바 있다. 하고많은 신전 가운데 왜 하필 델포이 신전인가. 다른 책을 읽다 보니 델포이 신전의 신탁이 가장 영험하고 적중률이 높았다는 대목을 본 적이 있다. 델포이는 점발(占發)이 잘 받는 곳이었던 모양이다. 필자는 아직 델포이를 현장답사해 보지 못해 뭐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추측컨대 바위와 암벽으로 이루어진 지형이고 약간 언덕처럼 주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동양의 점발 잘 받는 곳들이 대개 바위로 이루어진 지형이고 높은 곳이라는 점에 비추어볼 때 그렇다.
특히 단단한 바위가 신전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거나 뒤쪽에 벽이 있을 공산이 높다. 단단한 바위지대일수록 지기(地氣)가 강하게 올라오는 곳이고, 지기의 강도에 비례해 영발(靈發)이 강하고, 영발이 강할수록 점발이 잘 받는다는 원리를 필자는 15년의 방랑 끝에 발견하였다. 델포이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 기도발 잘 받는 델포이 신전의 기둥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역대 신들로부터 내려온 점사, 즉 신탁 가운데 최고의 신탁이었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객관으로 파악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통찰이다.
점의 궁극적 관심은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에 있다. 자기를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신탁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많은 술객, 도사들이 빠지는 함정이 이 통찰의 부족이다. 다른 사람 점은 잘 보아주는데 정작 자신의 점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뻔한 함정에 빠지고는 한다. 이 약점을 방지하기 위해 술사들은 크로스체크를 하기도 한다. 서로 상대방의 팔자를 보아주는 방법이다. 인간은 상대방의 눈에 든 티끌은 밝게 보지만 자신의 대들보 같은 허물은 못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고난도의 고행을 겪어야만 얻어지는 경지이지 함부로 얻을 수 있는 급수가 아니다. 박도사가 말년에 빠졌던 함정도 바로 자신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천하의 박도사도 자기를 아는 데는 실패했다. 자기를 안다고 장담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계율과 스승이 필요하다. 스스로 계율에 의지해 자신을 체크해 보고, 스승으로부터 끊임없는 경책을 받아야만 스스로 반성할 수 있다. 박도사의 일생을 보면서 왠지 델포이 신전의 기둥이 자꾸 생각난다. ‘너 자신을 알라’를 음미하면서 불교의 ‘나는 없다’는 무아(無我)의 법문을 연상하는 것은 현학적인 취미일까.
옮겨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