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워라 (신 14:22-29)
가을들판을 보면 말 그대로 황금물결입니다. 그리고 과일들도 얼마나 풍성하게 잘 익고 많이 열렸는지 대풍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풍년으로 농부들은 농산물 값이 떨어져서 걱정이라고 합니다. 풍년을 기뻐할 수 없는 이상한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거저 수출이 많아져서 달러를 많이 벌어들여야 경제가 좋아진다고 하는 세상에서 농산물의 풍성함은 관심 밖의 일로 취급되는 세상입니다. 정작 먹고사는 일은 땅에서 나는 것들인데도 사람들의 탐욕은 끝이 없기에 자꾸만 없는 물건도 만들어내어서 욕망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수 천 년 전의 성경말씀을 보면서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하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거저 십일조를 잘 하면 복을 받는 것이라고 하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가장 자연스럽게 연결이 됩니다. 23절을 보시면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합니다. 그것은 십일조를 하는 것을 말하며 또 28절을 보시면 매년 십일조 외에 매 삼년마다 또 십일조를 하여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줄 것이라고 합니다.
우선 본문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착하면서 살게 되면 토지소산의 십일조만이 아니라 가축도 십일조로 계산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는 곳에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십일조만이 아니라 화목제와 감사제도 있습니다. 그런 제물은 하나님 앞에서 드리고서 가족과 함께 먹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통하여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면서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운다는 것은 모든 수확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전하기에 온 가족이 기뻐하는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24절을 봅니다. ‘그 풍부히 주신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토지소산이나 우양이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풍부하게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주신 것이 너무 많아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에 가지고 가기가 힘이 들면 돈으로 바꾸어 가서 그 곳에서 네가 좋아하는 것을 사서 여호와 앞에서 권속과 함께 먹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또한 그러할 때에 네 성읍에 있는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분깃이 없기 때문에 그들도 기억하라고 합니다. 또한 매 3년마다 십일조를 하여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면 네 하나님께 범사에 복을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운다는 것은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 이전에 이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침으로 복이 어떻게 주어지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군사 318명을 데리고 자기 조카 롯만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 성의 사람과 재물까지 몽땅 약탈해간 네 명의 왕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이기고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아 올 때에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고서 십일조를 드립니다.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그의 승리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를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의 십일조 이야기도 결국 모든 것이 누구로부터 주어지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풍부히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주어지는 것은 이미 노아의 언약에서도 약속된 것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도 땅이 있을 동안에 계절의 변화와 심고 거두게 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도 주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는 그렇게 되어 질 것을 눈앞에 보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항상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이런 율법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 말씀을 제대로 순종하였습니까? 결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앞장서서 가나안을 정복하고 사사시대가 되는데 사사시대동안 제대로 십일조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이 먹고 살길이 없어서 뿔뿔이 흩어져서 개인 가정집에 우상을 세워놓고 복이나 빌어주는 그런 신세가 되어버린 것을 미가의 집을 통하여 보게 됩니다. 사사시대를 지나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성전이 완성되고 중앙 성소가 완성되면서 십일조가 시행되지만 되었지만 그러나 왕들에 따라서 성전보다 우상숭배가 더 심하여 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일조가 제대로 시행이 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각 지역에 있는 레위 인들은 더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분명히 네 성읍에 있는 레위 인들을 돌보고 또한 매 3년마다 십일조를 저축하여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렇게 시행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정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들이 일어나면 잠간 성전을 수리하고 십일조가 제대로 시행되도록 정비를 하지만 그런 왕이 죽고 나면 또다시 악한 왕들은 우상숭배에 열중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객과 고아와 과부와 레위 인들은 더 어려운 형편에 처하게 됩니다. 성전에서 제사가 끊어지니 속죄의 길도 끊어집니다.
이렇게 됨으로 이스라엘은 범사에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가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제야 이들은 회개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살면서 여호와의 전에 십일조를 드리며 가족과 가난한 이웃과 함께 지내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 생활 가운데서 나온 노래가 이런 노래입니다.
시편 137:1-6절을 봅니다.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찌로다” 이 노래의 심정이 느껴집니까?
하나님께서 이러한 바벨론 포로에서 돌이켜 주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70년 만에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새롭게 율법을 잘 지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서를 보면 성전을 재건하고 십일조 제도를 회복해 놓고 바벨론에 잠시 다녀온 동안에 또다시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 레위인이 흩어져 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레위인이 흩어진다는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는 더 말할 것도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어 사는 것임을 잊어버린 우상숭배자의 모습입니다. 모든 소득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여호와 경외함을 잊어버리면 그들이 저주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런 와중에 바리새 운동이 일어납니다. 철저하게 십일조를 계산합니다. 텃밭에 가꾼 향신료까지 십일조를 다 계산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제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범사에 복을 받는다는 모세의 율법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여호와를 공경하여도 그 마음을 멀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또 다시 나타나는 것이 십일조가 많아서 성전까지 가져오기 힘들면 돈을 바꾸어 와서 성전 가까이서 사면된다는 것을 이용합니다.
24-26절의 말씀을 이용하는 모습이 요한복음 2:13-17절입니다.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우라고 십일조의 규례와 매 삼년마다 십일조를 더 하면서 레위인과 객과 고아과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였는데 오히려 이런 율법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의를 쌓고 종교계급을 특권화 하여 자기들의 잇속이나 채웠던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십일조를 하여서 복을 받으라고 하는 것을 복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아래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0절을 봅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십일조를 하여도 복을 받겠다는 것은 율법 행위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아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의 복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 복입니다. 예수님께 무릎을 꿇은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2장에서 방금 본 말씀의 나머지 부분이 이렇습니다.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성전에 나아와서 십일조를 해야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행위로는 결코 여호와를 경외할 수가 없음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전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이 되실 뿐만 아니라 온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전과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여호와 경외하기를 사람이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특정 건물을 성소라고 여기고 십일조를 율법을 따라 드리면서 복을 받겠다는 것은 저주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3:11-14절을 봅니다.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것 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이 어떻게 받습니까?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다 받으셨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운다는 것은 이제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믿습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약의 성도는 십일조를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 복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4:7-9절입니다.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모든 것이 주의 것이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 경외하는 법을 항상 배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