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우리가 흔히 '조선왕조실록'이라 부르는 기록물은 이를
편찬한 조선시대 당대의 개념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앞선 왕이 죽으면 그 뒤를 이은 왕이 선대 왕대에 일어난 일들을 편년체로 정리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런 '실록'을 합칭한 현대적 개념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 제1대 왕은 태조 이성계이고,
그의 시호(죽은 뒤에 올린 이름)는 강헌대왕(康獻大王)이므로,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 시대에 완성된 실록은 정식 명칭이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이다.
조선왕은 모두 27명이 재위했으므로 27가지 실록이 존재함이 '정상'이다. 다만, 우리가
흔히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면 26대 고종과 27대 순종실록의 두 가지는 빼버린다. 마지막 두 왕에 대한 실록이 엄연히 있음에도 고의로 누락시키는 까닭은 이 두 실록이 일본 제국주의시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코너에는 이 두 실록을 지칭해 "이들은 조선시대의 엄격한 실록 편찬
규례에 맞게 편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의 왜곡이 심하여 실록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고 그 성격도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민족주의적 감정에 기댄 '역사관'일 뿐이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조선왕조실록에 포함시켜야 한다. 고종 이전 실록이 조선사람에 의해 편찬되었다고 해서, 그런 실록이 고종-순종실록에
견주어 특별히 역사적 객관성에 입각해 작성됐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선조실록과 현종실록, 경종실록의 경우, 실록 판본이 복수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권력을 농단한 당쟁 세력들이 서로 자기 입맛에 맞게 역사를
난도질하는 바람에 빚어진 촌극이다.
통상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그 기록의 방대함과 세밀함을 무기로 들어 조선이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기록문화를 이룩했다고 자랑하곤 한다. 하지만 조선에 실록이 만들어지던 그 시기에 유럽에서는 이미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조선왕조실록은 엄밀한 의미에서 동아시아 전통적인 의미의 사서(史書)가 아니라, 그 초본이나 원고본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웃 중국이나 일본 역대 왕조가 조선왕조보다 특별히 못나서 우리의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은 난삽함을 면치 못하는 구석이 허다하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는 객관주의적이며 상대주의적인 시각에서
보아야지, 무턱대고 실록을 무기로 내세워 우리 민족은 세계 최고의 기록문화를 구가했다고 자랑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실록은 대체로
목활자로 인쇄한다. 조선초기에 실록은 2벌씩 인쇄되어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사고(忠州史庫)에 분산 소장됐다. 그러다가 세종 21년(1439)에는
사헌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2벌씩을 더 인출해 전주와 성주에 사고(史庫)를 신설해서 그곳에도 봉안하니 이를 조선초 사대사고(四大史庫)라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나머지 사고는 불타고 오직 전주사고만이 살아남았다. 이는 오로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전라도가 왜적의 침입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이를 교훈 삼아 임란 이후 조선왕조는 사고를 깊숙한 산중으로 옮기니,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 강화도 사고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 사고는 조선왕조 패망과 함께 생명을 다했으며 이 와중에 상당한 실록이 훼손되거나
멸실됐다.
현재는 남한에 강화 정족산본 실록 1천707권 1천187책과 오대산본 27책 등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고,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보센터에 태백산본 1천707권 848책이 보관돼 있으며 모두 국보 151호로 일괄 지정돼 있다. 1997년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북한 사회과학원에서도 적상산본 실록을 보관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북한은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의 주도로 남한보다 먼저 실록 국역사업을 완료함으로써 남한 역사학계를 일대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남한에서 부랴부랴 실록 완간을
밀어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국외에는 조선총독부 시대에 일본에 반출된 오대산본 47책이 있다. 오대산본은 관동대지진 때 거의
소실되었으나 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30책, 선조실록 8책이 살아남아 도쿄대 총합도서관에 들어갔다.
이번에 서울대가 도쿄대에서 기증 형식으로 반환받기로
합의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오대산 사고본이다. 이 실록은 한일병합 이후인 1913년, 데라우치 당시 조선총독 재임 시절 도쿄대로 옮겨졌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통치한 시대에 일본으로
나간 우리의 문화재는 덮어놓고 '약탈' 혹은 '강탈'당한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은 물론이고 학계에도 팽배해 있다. 하지만 정작 약탈 혹은 강탈을
입증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소수에 해당한다. 1876년 병인양요 때 외규장각 고문서를 가져간 프랑스 군대의 행위는 명백히 약탈이다.
그러나 해외 반출 문화유산 상당수는 돈을 주고 구입하거나
기증이라는 형식을 빌려 가져갔다. 일부가 지난 96년에 경남대에 기증된 데라우치 고문서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나아가 식민지시대
당시에 조선은 '대일본제국'의 일부였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우리는 못내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문화재가 간
행위는 '해외 반출'이 아니라 '국내 이동'이었다.
해외 소재 우리 문화재의 반출 경위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분석이 있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서 그것을 국내로 반환받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탈' 혹은 '강탈'한 우리 문화재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방식은 외려 우리의 문화유산을 영영 우리 손에서 떼어놓게 된다.
그래서 이런 해외 소재 문화유산 귀환에 대해 요즘은 '기증'이라는 형식을 많이 빌린다. 주는 사람도 기분 좋아야 하고, 받는 사람도 기분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 조선왕조가 월정사 주지에 줬다는 ‘밀부’는 조선왕조실록의 관리자가 월정사라는 확실한
증거다.밀부란 사고를 지키려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표시를 담은 패로 조선 예조(육조의 하나. 고려 이래 예의·제사·조회·외교·학교·과거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중앙행정기관)가 월정사 주지를 실록수호총섭으로 임명했다는 사실을 증거로 보여주고 있다.
▲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이 보관되어 있던 월정사의
전경
오대산 사고지로 가는
길
사고와 영감사로 오르는 길은 상원사에서부터 오대천을 따라 4㎞ 남짓
월정사 방향으로 내려와야 만날 수 있다.
길 오른쪽으로 이정표가 있으며 큰 길에서 0.9㎞, 느린 걸음이라도
20분이 걸리지 않는다.
경사가 급하지도 않으며 자동차 한 대가 너끈히 다닐 만큼 넓어서
걷기에는 더없이 훌륭하다. 더구나 골짜기로 접어드는 순간 큰길의 기억은 금세 잊어버릴 만큼 계곡이 깊어 매력적인 길이다.
본디 사고는 물과 불, 그리고 바람의 삼재(三災)로부터 안전한 곳을
택하게 마련이니 그곳으로 가는 길 또한 더할 나위 없지 않겠는가.
오대산사고는 세인들의 관심에서 까마득히 잊혀 있다가 최근 들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곳에 봉안되었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47책이
최근 돌아왔기 때문이다.
오대산에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하려던 움직임은 1605년 10월부터였다.
처음에는 상원사를 봉안 장소로 정했다가 남호암골에 사각(史閣)을 짓기로
변경한 것이다. 다음해인 1606년 지금의 자리에 사고가 지어졌으며 당시에는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초고본을 봉안했다고 한다.
그 후, 1616년에는 ‘선조실록’, 1653년에는 ‘인조실록’, 1657년에는 ‘선조수정실록’, 1661년에는 ‘효종실록’, 1678년에는 ‘광해군일기’, 1728년에는 ‘경종실록’ 그리고
1805년에는 ‘정조실록’을 봉안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사고를 관리하던 최고책임자인 실록수호총섭(實錄守護總攝)은 월정사 주지가 맡았으며 수호군 60여명에 승군 20여명이 사고를 지켰다.
지금의 영감사를 당시에는 사고사(史庫寺)로 불렀으며 사고를 지키는
승군들이 묵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3년 10월, 총독이었던 데라우치에 의해 도쿄제국대학도서관으로 강탈된 후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대출되었던 47책만이 화를 면했던 것이다.
93년만에
돌아온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사고본
日서 환수… 서울대 규장각 돌려받아
93년동안이나 일본에게 강탈당했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드디어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서울대는 14일 규장각에서 인도·인수식을 열고 도쿄대로부터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47책을 공식 돌려받았다. 지난
7일 국내로 들어와 규장각에 보관돼 오던 오대산 사고본의 소유권은 이날부터 한국으로 넘어왔고 앞으로 문화재청이 관리주체 등을 결정하게
되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우리가 흔히 '조선왕조실록'이라 부르는 기록물은 이를
편찬한 조선시대 당대의 개념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앞선 왕이 죽으면 그 뒤를 이은 왕이 선대 왕대에 일어난 일들을 편년체로 정리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런 '실록'을 합칭한 현대적 개념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 제1대 왕은 태조 이성계이고,
그의 시호(죽은 뒤에 올린 이름)는 강헌대왕(康獻大王)이므로,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 시대에 완성된 실록은 정식 명칭이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이다.
조선왕은 모두 27명이 재위했으므로 27가지 실록이 존재함이 '정상'이다. 다만, 우리가
흔히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면 26대 고종과 27대 순종실록의 두 가지는 빼버린다. 마지막 두 왕에 대한 실록이 엄연히 있음에도 고의로 누락시키는 까닭은 이 두 실록이 일본 제국주의시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코너에는 이 두 실록을 지칭해 "이들은 조선시대의 엄격한 실록 편찬
규례에 맞게 편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의 왜곡이 심하여 실록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고 그 성격도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민족주의적 감정에 기댄 '역사관'일 뿐이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조선왕조실록에 포함시켜야 한다. 고종 이전 실록이 조선사람에 의해 편찬되었다고 해서, 그런 실록이 고종-순종실록에
견주어 특별히 역사적 객관성에 입각해 작성됐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선조실록과 현종실록, 경종실록의 경우, 실록 판본이 복수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권력을 농단한 당쟁 세력들이 서로 자기 입맛에 맞게 역사를
난도질하는 바람에 빚어진 촌극이다.
통상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그 기록의 방대함과 세밀함을 무기로 들어 조선이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기록문화를 이룩했다고 자랑하곤 한다. 하지만 조선에 실록이 만들어지던 그 시기에 유럽에서는 이미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조선왕조실록은 엄밀한 의미에서 동아시아 전통적인 의미의 사서(史書)가 아니라, 그 초본이나 원고본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웃 중국이나 일본 역대 왕조가 조선왕조보다 특별히 못나서 우리의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은 난삽함을 면치 못하는 구석이 허다하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는 객관주의적이며 상대주의적인 시각에서
보아야지, 무턱대고 실록을 무기로 내세워 우리 민족은 세계 최고의 기록문화를 구가했다고 자랑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실록은 대체로
목활자로 인쇄한다. 조선초기에 실록은 2벌씩 인쇄되어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사고(忠州史庫)에 분산 소장됐다. 그러다가 세종 21년(1439)에는
사헌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2벌씩을 더 인출해 전주와 성주에 사고(史庫)를 신설해서 그곳에도 봉안하니 이를 조선초 사대사고(四大史庫)라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나머지 사고는 불타고 오직 전주사고만이 살아남았다. 이는 오로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전라도가 왜적의 침입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이를 교훈 삼아 임란 이후 조선왕조는 사고를 깊숙한 산중으로 옮기니,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 강화도 사고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 사고는 조선왕조 패망과 함께 생명을 다했으며 이 와중에 상당한 실록이 훼손되거나
멸실됐다.
현재는 남한에 강화 정족산본 실록 1천707권 1천187책과 오대산본 27책 등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고,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보센터에 태백산본 1천707권 848책이 보관돼 있으며 모두 국보 151호로 일괄 지정돼 있다. 1997년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북한 사회과학원에서도 적상산본 실록을 보관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북한은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의 주도로 남한보다 먼저 실록 국역사업을 완료함으로써 남한 역사학계를 일대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남한에서 부랴부랴 실록 완간을
밀어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국외에는 조선총독부 시대에 일본에 반출된 오대산본 47책이 있다. 오대산본은 관동대지진 때 거의
소실되었으나 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30책, 선조실록 8책이 살아남아 도쿄대 총합도서관에 들어갔다.
이번에 서울대가 도쿄대에서 기증 형식으로 반환받기로
합의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오대산 사고본이다. 이 실록은 한일병합 이후인 1913년, 데라우치 당시 조선총독 재임 시절 도쿄대로 옮겨졌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통치한 시대에 일본으로
나간 우리의 문화재는 덮어놓고 '약탈' 혹은 '강탈'당한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은 물론이고 학계에도 팽배해 있다. 하지만 정작 약탈 혹은 강탈을
입증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소수에 해당한다. 1876년 병인양요 때 외규장각 고문서를 가져간 프랑스 군대의 행위는 명백히 약탈이다.
그러나 해외 반출 문화유산 상당수는 돈을 주고 구입하거나
기증이라는 형식을 빌려 가져갔다. 일부가 지난 96년에 경남대에 기증된 데라우치 고문서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나아가 식민지시대
당시에 조선은 '대일본제국'의 일부였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우리는 못내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문화재가 간
행위는 '해외 반출'이 아니라 '국내 이동'이었다.
해외 소재 우리 문화재의 반출 경위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분석이 있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서 그것을 국내로 반환받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탈' 혹은 '강탈'한 우리 문화재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방식은 외려 우리의 문화유산을 영영 우리 손에서 떼어놓게 된다.
그래서 이런 해외 소재 문화유산 귀환에 대해 요즘은 '기증'이라는 형식을 많이 빌린다. 주는 사람도 기분 좋아야 하고, 받는 사람도 기분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 조선왕조가 월정사 주지에 줬다는 ‘밀부’는 조선왕조실록의 관리자가 월정사라는 확실한
증거다.밀부란 사고를 지키려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표시를 담은 패로 조선 예조(육조의 하나. 고려 이래 예의·제사·조회·외교·학교·과거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중앙행정기관)가 월정사 주지를 실록수호총섭으로 임명했다는 사실을 증거로 보여주고 있다.
▲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이 보관되어 있던 월정사의
전경
오대산 사고지로 가는
길
사고와 영감사로 오르는 길은 상원사에서부터 오대천을 따라 4㎞ 남짓
월정사 방향으로 내려와야 만날 수 있다.
길 오른쪽으로 이정표가 있으며 큰 길에서 0.9㎞, 느린 걸음이라도
20분이 걸리지 않는다.
경사가 급하지도 않으며 자동차 한 대가 너끈히 다닐 만큼 넓어서
걷기에는 더없이 훌륭하다. 더구나 골짜기로 접어드는 순간 큰길의 기억은 금세 잊어버릴 만큼 계곡이 깊어 매력적인 길이다.
본디 사고는 물과 불, 그리고 바람의 삼재(三災)로부터 안전한 곳을
택하게 마련이니 그곳으로 가는 길 또한 더할 나위 없지 않겠는가.
오대산사고는 세인들의 관심에서 까마득히 잊혀 있다가 최근 들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곳에 봉안되었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47책이
최근 돌아왔기 때문이다.
오대산에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하려던 움직임은 1605년 10월부터였다.
처음에는 상원사를 봉안 장소로 정했다가 남호암골에 사각(史閣)을 짓기로
변경한 것이다. 다음해인 1606년 지금의 자리에 사고가 지어졌으며 당시에는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초고본을 봉안했다고 한다.
그 후, 1616년에는 ‘선조실록’, 1653년에는 ‘인조실록’, 1657년에는 ‘선조수정실록’, 1661년에는 ‘효종실록’, 1678년에는 ‘광해군일기’, 1728년에는 ‘경종실록’ 그리고
1805년에는 ‘정조실록’을 봉안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사고를 관리하던 최고책임자인 실록수호총섭(實錄守護總攝)은 월정사 주지가 맡았으며 수호군 60여명에 승군 20여명이 사고를 지켰다.
지금의 영감사를 당시에는 사고사(史庫寺)로 불렀으며 사고를 지키는
승군들이 묵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3년 10월, 총독이었던 데라우치에 의해 도쿄제국대학도서관으로 강탈된 후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대출되었던 47책만이 화를 면했던 것이다.
93년만에
돌아온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사고본
日서 환수… 서울대 규장각 돌려받아
93년동안이나 일본에게 강탈당했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드디어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서울대는 14일 규장각에서 인도·인수식을 열고 도쿄대로부터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47책을 공식 돌려받았다. 지난
7일 국내로 들어와 규장각에 보관돼 오던 오대산 사고본의 소유권은 이날부터 한국으로 넘어왔고 앞으로 문화재청이 관리주체 등을 결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