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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4일!
금번 전라북도 가족여행이 시나브로 마무리되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석탑을 나서 인근 왕궁리유적전시관(서적 제408호.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궁성로 666. 063-859-4631. http://wg.iksan.go.kr)을 들린다.
익산 왕궁리유적은 백제 제30대 무왕(AD.600~641)대에 조성된 왕궁으로서 석축 궁궐 담장의 규모는 남북 490여m, 동서 240여m의 대규모의 궁성 내부에 경사면을 따라 단(段)이 지도록 석축을 쌓아 평탄대지를 조성, 대형 건물지, 대형 화장실, 정원, 와적기단(瓦積基壇) 건물지, 공방폐기지(工房廢棄址) 등 다양한 형태의 건물을 축조하여 궁성관련시설로 활용되다가, 탑-금당-강당의 1탑1금당의 가람배치구조를 한 사찰관련시설로 변화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인장와(印章瓦)
인장와는 기와 제작과정에서 특별한 의미를 표시하기 위하여 평기와(수키와, 암키와)의 표면에 도장을 찍은 기와로서 인각와, 인명와, 명문와 등으로도 불리운다.
도장의 형태는 장방형, 타원형, 원형으로 하나의 도장에는 글자 1자에서 4자까지 새기고 있는데, 한자씩 새긴 도장 두 개를 연결하여 사용한 것도 있다.
기와에 도장을 찍은 목적은 기와 생산과정 또는 검수과정에서 생산지나 생산자, 생산연대, 기와의 사용처 등을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장와는 공주지역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나 대부분 부여와 익산지역의 백제시대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백제 후기의 특징적인 기와로서 최근에는 청주, 대전, 금산, 논산, 정읍, 임실, 여수 지역에서도 몇 점 씩 확인되고 있다.
익산지역에서는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에서 많은 수의 인장와가 출토되었으며, 제석사지와 익산토성, 금마도토성, 석불사지 등에서는 소량만 수습되었다.
복원된 왕궁리유적 화장실
왕궁리유적 출토기와
이 기와는 1989년부터 왕궁리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기와로서 건물이나 담장 지붕에 사용된 것이다.
기와는 다른 유물에 비해 출토되는 양이 많고 시대별로 기와를 만드는 모양이나 방법을 쉽게 구분할 수 있어서 유적의 연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유물이다.
왕궁리는 예로부터 왕궁평, 왕검이, 왕검성으로 불려,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지역의 유적은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왕궁 유적과 사찰 유적이 함께 남아있다.
발굴ㆍ조사 결과 백제 무왕(600~641) 때 왕궁으로 조성된 이후 백제 말에서 신라 초기에 사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은 규모가 동서 약 240m, 남북 약 490m이다.
성벽을 쌓고나서 내부 경사면을 따라 석축으로 단을 만들어 대지를 조성하고 건물을 지었는데, 왕궁 내에서 물과 조경석을 이용한 조경 시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유적지 내에는 왕궁 건물터와 금당(金堂) 등의 사찰 건물터가 여럿 남아있다.
대형 건물터
이 건물터는 왕궁리 유적 건물터 중 가장 크다.
건물은 정면 7칸31m, 측면 4칸15m의 크기로 남문과 같이 왕궁의 남북 중심축에 있다.
규모나 건축 기법, 위치로 볼 때 대규모 집회나 연회 등에 사용한 건물로 추정된다.
이 건물터에는 대형 건물의 기둥을 받치기 위한 독특한 건축 기법이 사용되었다.
즉,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그 속에 점토를 단단히 다져넣고 기둥을 세운 토심(土心) 구조를 말한다.
부여 관북리 백제 유적에서도 이와 규모와 건축 기법이 비슷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사찰 유적 중 국보로 지정된 왕궁리오층석탑(王宮里五層石塔, 국보 제289호)은 조형미가 뛰어나 백제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왕궁리유적에는 마한의 기준(箕準) 도읍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 등 다양한 견해가 얽혀 있는데, 최근의 연구로 백제 궁성의 구조와 기능 등 역사 속 비밀이 하나 둘 씩 밝혀지고 있어 왕궁리유적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지평이 열리고 있다.
남북 방향 석축
석축은 경사면에 돌을 쌓아 대지(臺地)를 평탄하게 만들기 위한 시설이다.
현재는 길이 약 30m, 높이 0.55m2단 정도가 남아있다.
궁궐 관련 건물에서 사용된 석부재(石部材)가 포함되어 있어 금당을 비롯한 사찰의 대지를 조성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된다.
금당지(金堂址)
왕궁리의 사찰은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궁궐터에 들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터의 동쪽으로 약간 기운 남북 축에 오층석탑, 금당터, 강당터가 있어 '1탑1금당'이라는 사찰 배치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를 모시는 금당은 사찰의 중심 건물로, 정면 5칸19.3m, 측면 4칸14.5m으로 된 통간 구조이다.
그 밖의 사찰 유적으로는 오층석탑 동편의 기와 가마터와 강당터 서편의 건물터 두 자리가 있다.
배수로
동서방향의 석축과 나란하게 위치하고 있다.
남아있는 배수로는 0.7~0.8m의 폭에, 길이가 약 28m 정도이다.
배수로 가장자리는 잘 다듬은 석재를 1단 높이로 잇대어 연결해 만들었다.
배수로 남쪽에 건물터가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궁궐 건물 주변의 물 빠짐을 위한 배수시설로 추정된다.
남측 궁궐 담장(南城壁)
궁궐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으로 동서 길이가 약 240m, 남북이 약 490m의 직사각형이다.
담장의 폭은 3m 정도로, 잘 다듬은 석재를 쌓아 올려 만들었다.
담장의 안팎으로 돌을 깔아 보도(부석시설敷石施設)을 만들고, 담장 경계인 석렬시설(石列施設)을 설치하였다.
부석시설로는 물 빠짐을 위한 수구와 배수로가 있고, 동ㆍ서ㆍ북측에 각 1개소, 남측에 3개소의 궁궐문터가 발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