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계 강화 (26)
무살계 강화 각주집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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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제취(諸趣)의 식시(食時)
제취(諸趣)의 식시(食時)란
천상(天上) 인간(人間)
귀취(鬼趣) 축생(畜生) 등
네 종류가
음식을 섭취하는
시각이라는 뜻이다.
이미 중음신(中陰身)이나
혼령(魂靈)을 중심으로
조상님들의 제사,
즉 천도를
어떻게 준비해야 좋을까에
관하여 이야기했으니,
이제는 제사를
지내는 시각을 이야기할 차례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취(諸趣)의 부류마다
음식을 섭취하는 방법이 다르듯이
음식을 섭취하는 시각도
부류에 따라 달라서
네 식시(食時)로 나눈다는 것이다.
이를
사분식시(四分食時)라 하니,
제일분(第一分)은
인(寅) 묘(卯) 진시(辰時)니,
하늘 무리들의 밥 때[諸天食時]요,
제이분(第二分)은
사(巳) 오(午) 미시(未時)니,
인간들의 밥 때[人法食時]니,
사시는
부처님의 공양 때요,
오시는 비구(比丘)등
수행자들의 밥 때요,
미시는
평민들의 밥 때이다.
제삼분(第三分)은
신(申)유(酉)술시(戌時)니,
이른바 포분(晡分)이라 하여,
귀신들의 밥 때요,
제사분(第四分)은
이른바 야분(夜分)이라 하여
해(亥)자(子)축시(丑時)니,
축생(畜生)들의 밥 때이다.
특히,
인법식시(人法食時)인
제이분(第二分)에는
한 시각단위로
부처님과 비구들과
서민들의 식시가
나뉜 것이 특색이다.
그러기에
능엄경(楞嚴經)에서
부처님께서
아난(阿難)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미
공양(供養)을 마쳤다마는
너는 이 비구들을 보라
이제 바야흐로
공양을 하고 있지 않느냐.”
하셨으니,
부처님은 사시(巳時)에
이미 공양을 드셨고,
비구들은 그 뒤를 이어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법도대로라면
영가님께 드리는 제사는
일모(日暮)에서
땅거미가 질
초저녁[晡時]이라야
적시(適時)가 된다.
그래서 지금도
구병시식(救病施食)이나
온황제(瘟黃祭)나
국사당제(局司堂祭) 같은 것을
주로 초저녁에 시행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렇다면
옛날(지금도 간혹)부터
절에서 사십구재 등
큰 재식(齋式)을 올리거나,
세속에서 제사를 지낼 때,
꼭 자시(子時)를 지나
새벽닭이 울기까지 사이에
지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세속에 전래하는
또 하나의 설(說)로서
신형자야(神亨子夜)
즉 신(神)은
자시(子時)에 흠향(歆饗)하신다는
풍속(風俗)과
혼동(混同)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절에서 재를 올리려면
미리미리 모든 준비를 해 놓고,
전일 초저녁부터
대령관욕등(對靈灌浴等)
사전의식(事前儀式)을 봉행하다가
자시가 막 넘으면 제사를 지내고,
이어 봉송(奉送)으로
날이 밝기에 이르렀었는데
이것이 잘못 이해되어
승속간(僧俗間)에
제사는 입적(入寂) 전일(前日)에
모시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잘못이다.
그렇다고
모든 제사를 법대로
당일 초저녁에만
지내라는 것은 아니다.
일단 원칙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준수하도록 노력할 것이나
부득이한 경우는
현실에 맞게 편한 시간,
편한 장소에서
편한 방법으로 봉행할 수 있어야
제사를 받으시는
조상님도 마음이 편하실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죽은 이를
살아있는 사람처럼
섬긴다는 한 방법일 것이다.
끝으로
옛사람이 천도재를 지낸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중국 양무제(梁武帝)의 부인
치씨(絺氏)는
질투심(嫉妬心)이 강해
많은 궁녀들을
이런저런 탈을 잡아
자기자리를
넘본다는 이유로 죽였다.
그리고는
끝내는 자기도 죽었다.
그의 장사를 지낸 지
얼마 뒤인 어느 여름날 밤,
무제는 대청(大廳)에 앉아
비오는 뜰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기에 살펴보니,
죽은 치황후(絺皇后)의 소리였다.
소리가 차츰 가까워지면서
검은 괴영(怪影)이 보이더니,
마침내 치황후가
계하(階下)에 나타나
꿇어앉아 아뢰는데 그 내용은,
자신이 항상 폐하의
총애(寵愛)를 빼앗길까 걱정되어
앞에 나서는
아무 궁인은 어디서 죽였고,
누구는 어떻게 처치하는 등
많은 궁녀들을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이어, 이제
그 원결(怨結)들이 앞을 막아
아직껏 옥고(獄苦)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자기를 위해
천도재를 지내달라는 내용과
어디어디에는
은전(銀錢)이 얼마,
어디에는
금전(金錢)이 얼마 묻혀있으니,
그것을 파다가
경비에 써 달라하고는
인홀불견(因忽不見)이 되었다.
황제가
처음에는 건성으로 들었는데
사람을 시켜
금은전이 있다는 곳을 추심해 보니
과연 들은 사실과
추호의 차이도 없는지라
비로소 믿음을 내어
당대의 고승
보지공(寶誌公)선사를 비롯하여
승우(僧祐) 보창(寶唱)
지장(智藏) 혜약(慧約) 등
대덕들을 청해 도량을 차리고
재의(齋儀)를 만들어
궁중에서 크게 재를 봉행하였다.
그후 어느날
초소(初宵)에
황후가 다시 나타나서
자기의 옥고를 풀어주어 고맙다고
백배사례(百拜謝禮)
하고 물러갔다 하니,
이것이
불교에 재가 생긴 시초이다.
그리고
조선조(朝鮮朝)
태종(太宗) 연간(年間)에는
서울 신흥사(神興寺)에서
지난날 왕자(王子)의 난(難)으로
희생(犠牲)된
옹주(翁主)의 사십구재를 모셨는데,
그 후
하륜(河淪)이 상소(上疏)하기를
미천한 중들이
감히 지존하신
옹주(翁主)의 위패를 만들어
부처 앞에 부복(俯伏)시켜
절을 하시게 하고,
왕생을 발원하시라 하니,
강상(綱常)의 도를 어김이
이보다 심함이 없으니,
앞으로는
왕족의
불전(佛前)천도재(薦度齋)를
일절(一切) 금지(禁止)시키소서
하여
윤허(允許)를 받아내고 있다.
이것은
이 강화의 주제에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지만 말
나온 김에
재를 지낸 모습이
얼마나 산 사람 다루듯
진지(眞摯)했던가를
소개하려는 뜻과
한 때에는
영가천도(靈駕薦度)라는
교화방편(敎化方便)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이승에는 인왕(人王)이,
저승에는 법왕(法王)인
부처님이 계시다는 인식이
보편화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사례라 할 것이다.
나의 스승이신
운허노사(耘虛老師)께서는
평소 말씀하시기를
“사바하(娑婆訶)노스님께서
재장(齋場)에 나오시면
가끔 말씀하시기를
‘이놈들아,
중놈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밥에다 숟가락을 꽂다니,
자교상위(自敎相違)야
자교상위, 알겠느냐’
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매우 옳은 말씀이시다.
당대뿐 아니라
영원히 그렇게
소탈하시고 밝으신
도인이 다시는 못나올 것 같다”
고 입이 마르도록
찬탄하시는 것을 늘 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사바하(娑婆訶)스님이란
노사(老師)께서
독립활동 중
중대한 사명을 띄고
비밀리에 입국하셔서
공작을 진행하시다가
서기1921년2월15일
왜경(倭警)에게 발각되어
동지 한 분이
체포되는 변이 생겼다.
급히 서울을 탈출,
17일에 강원도(江原道)
회양군(淮陽郡) 난곡면(蘭谷面)
봉일사(鳳逸寺)로 숨어드셨고,
이듬해 봄,
눈이 녹고 길이 뚫려,
암주 경송(慶松)스님이 돌아오시자
그의 제자가 되고,
이어 봉일사의 본산인
유점사(楡岾寺)로 가셔서
경원(經院)에 입방(入房)하신다.
이때 산중의 어른이셨던
당대의 생불,
일운노사(一耘老師
=사바하는그어른의別號)께서
재장(齋場)에 들어오시면
늘 이렇게
제자들을
꾸짖으셨다는 것이다.
ㅡ월운스님 강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