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어떤 유기체가 새로운 환경에 놓이면 중추신경계에서 새로운 유전자들이 활성화된다. 이 새 유전자들은 새로운 단백질들이 유전 암호와 연결되고, 이 단백질들이 구성단위가 되어 새로운 암호 유전자와 연결되고 이 단백질들이 구성단위가 되어 뇌에 새로운 구조를 형성한다."
뇌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많은 부분은 아직도 생물학적으로 여전히 발생기의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사람은 언제나 정체상태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정체상태는 미완의 상태이어서 인간의 성장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의지, 모르는 것을 탐구하고 "왜?"라는 질문을 삶의 가장 깊은 곳에 두고 성찰하는 삶, 이 모든 것은 변화가능성을 전제한 실천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 안에서 인간을 구해주는 것은 변화가능성에 대한 믿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이어질 때 사람은 하느님 상태로의 진화가 가능할 것입니다.
밀턴은 말합니다. "실수하고도 변화하지 않는 완고함은 천국으로부터의 추방과 점점 깊어지는 추락을 뜻할 뿐만 아니라, 구원에서도 배제되는 것이다."
변화의 전제는 직시입니다. 직시는 현재에 안주하려는 나를 일으켜세웁니다. 직시는 현재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의지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직시 혹은 직면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회를 새롭게 만드는 힘으로서 작용합니다.
어려운 시기입니다.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로 조선인을 학살했던 자들이 지금 여기에서 드러내놓고 세계의 우물에 독을 타려고 합니다. 생존이 걸린 문제를 놓고 정치질을 하는 자들의 언어가 사회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현실을 마주합니다. 생존의 피해를 고스란히 당해야 하는 우리, 그런데 우리는 알려고 하지 않고 정확한 사실을 찾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점, 자신이 경험하고 원하는 행복이 자손대대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미친 자만이 똑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합니다. 지금 우리는 집단적으로 미쳐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왜 신부, 수녀들은 침묵하느냐고? 그런데 사제와 수도자들, 그들은 남겨놓을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하거나 기대하지 마십시오. 기도하고 착하게 살으라는 말만하고 있어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사제, 수도자들이 그렇게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현실입니다. 그렇게 못사는 사제, 수도자들이 문제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핵안전에 대한 과목이 없는 대학에서 공부한 핵전문가라는 자들의 주장은 지겹습니다. 특히나 일본의 후원과 주최로 이뤄지는 발표회에 참여하는 그들 모습은 정말 안타까움을 넘어서 역겨움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을 버젓이 방송하는 언론도!
첫댓글 많은 생각이 드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