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목사인 그Charles R. Swindol는 “삶에 있어서 객관적 사실은 인생을 통틀어 겨우 10%에 불과하고, 나머지 90%는 그 일들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반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철학자인 그John Homer Mills는 “삶이란, 우리의 인생 앞에 어떤 일이 생기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곧 반응)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고해와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온간 종류의 상황들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이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정신과 의사로서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던 그Victor Frankl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간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있지만, 한 가지 자유는 빼앗아 갈 수 없다. 바로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삶에 대한 태도(곧 반응)만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상황에 따른 반응 곧 태도만큼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상황은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 일방적으로 주어집니다. 맞닥뜨린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반응해야합니다. 그 반응 곧 태도에 따라서 인생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편, “감사”는 은혜를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기까지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 보여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반응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자기 행실을 바르게 하는 자에게 내가 구원의 길을 보이리라.”(시50:23)라는 증거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가져야할 지극히 바른 태도입니다. 지극히 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온갖 부정적인 상황으로부터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는 더 큰 감사를 낳습니다. 삶을 아름답고, 기름지고, 윤택하고, 풍요롭게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시118:1),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8)라고 외쳤던 이유입니다. 이 감사와 관련하여 그朴勞解는 “감사한 죄”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새벽녘 팔순 어머니가 흐느끼신다
젊어서 홀몸이 되어 온갖 노동을 하며
다섯 자녀를 키워낸 장하신 어머니
눈도 귀도 어두워져 홀로 사는 어머니가
새벽기도 중에 나직이 흐느끼신다
그의 어머니는 젊어서 혼자되셨습니다. 온갖 노동일을 하며 다섯 자녀를 키워내셨습니다. 그동안 어머니는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어두워지셨습니다. 그렇게 장한 어머니가 새벽기도 중에 나직이 흐느끼십니다.
나는 한평생 기도로 살아 왔느니라
어머니는 힘든 노동일을 하면서도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거친 세파에 부딪쳐 깨어지고 넘어지면서도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한평생 기도로 살아오셨습니다.
낯선 서울 땅에 올라와 노점상으로 쫒기고
여자 몸으로 공사판을 뛰어다니면서도
남보다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음에
늘 감사하며 기도했느니라
아비도 없이 가난 속에 연좌제에 묶인 내 새끼들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경우 바르게 자라나서
큰아들과 막내는 성직자로 하나님께 바치고
너희 내외는 민주 운동가로 나라에 바치고
나는 감사기도를 바치며 살아 왔느니라
어머니는 연좌제에 묶여 있던 새끼들이 환경 때문에 좌절하지 않도록 키우기 위해서, 경우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 노점상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공사판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파출부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할 수 있는 온갖 노동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불철주야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감사 기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키운 큰 아들과 막내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시인내외는 노동자를 위해 일하는 운동가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감사 기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내 나이 팔십이 넘으니 오늘에야
내 숨은 죄가 보이기 시작하는 구나
이제 팔십이 넘은 어머니가 말씀하십니다. 평생 죽을 만큼 힘들게 일하면서도, 거친 세파에 부딪쳐 깨어지고 넘어지면서도 한평생 감사기도를 바치며 살아오신 팔순의 어머니가 말씀하십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숨겨져 있었던 죄가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리에서 리어카 노점상을 하다 잡혀온
내 처지를 아는 단속반들이 나를 많이 봐주고
공사판 십장들이 몸 약한 나를 많이 배려해주고
파출부 일자리도 나는 끊이지 않았느니라
나는 어리석게도 그것에 감사만하면서
긴 세월을 다 보내고 말았구나
단속 반원들은 리어카 노점상을 하다 잡혀온 어머니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주었습니다. 공사판 십장들은 몸 약한 어머니를 많이 배려해주었습니다. 파출부 자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감사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감사 기도를 드리지 않을 도리가 없으셨습니다. 팔십이 넘어 뒤를 돌아보니 감사 기도가 밟힙니다. 감사 기도만 하다 세월을 다 허비하고 말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단속반에 끌려가 벌금을 물고
일거리를 못 얻어 힘없이 돌아설 때도,
민주화 운동 하던 다른 어머니 아들딸들은
정권 교체가 돼서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도
사형을 받고도 몸 성히 살아서 돌아온
불쌍하고 장한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나는 바보처럼 감사기도만 바치고 살아왔구나
나는 감사한 죄를 짓고 살아왔구나
다른 사람들은 단속반에 끌려가 벌금을 물었습니다. 일거리를 얻지 못해서 힘들어했습니다.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들의 아들딸들은 여전히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사형선고를 받았던 어머니 아들은 살아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불쌍하고 장한 내 새끼, 불쌍하고 장한 내 새끼”라고 외치며 기뻐하셨습니다.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팔십이 넘으니 그 기쁨과 감사 기도가 눈에 밟힙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아파하고 있는 이웃을 돌아보지 못하고, 함께 연대하여 힘이 되어주지 못한 채 바보처럼 감사 기도만 바치는 죄를 지으며 살아왔다며 흐느끼셨습니다.
새벽녘 팔순 어머니가 흐느끼신다
묵주를 손에 쥐고 흐느끼신다
감사한 죄
감사한 죄
아아 감사한 죄
어머니의 흐느낌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웃들이야 어찌되든 말든 나만, 내 자식들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감사만 하며 살아왔던 죄를 고백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20세기 최고의 변증가로 알려진 그C. S. Lewis는 자신의 책The Four Loves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부러(의도적으로) 기생물들을 창조하셨다. 그 기생물은 바로 우리들이다. (하나님은) 기생물인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이용해 먹을 수 있게’ 하시는 ‘숙주’이시다. 여기에 사랑이 있다. 이는 모든 사랑의 발명자이자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그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담 이후, 인류는 허물과 죄로 이미 죽었습니다. 살아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에 빌붙어 살 수밖에 없는 기생충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을 숙주로 내놓으셨습니다. 당신께 빌붙을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물론 영원히 살 수 있는 은혜까지 허락해 주셨습니다. 지금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만 누릴 수 있는 은혜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도 예외 없이 모두 다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은혜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아프시던 날 곧 육신으로는 도무지 견디기 힘든 모진 핍박과 조롱과 멸시를 다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 태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자원하여 당하셨던 고통에 함께 동참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되었다는 엄청난 사실 앞에서 감사 기도만 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합니다. 혹 풍성하게 누리고 있는 축복에 감사 기도만 드리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회개해야합니다.
흐느껴 울고 또 울어야합니다. 특히, 어떤 경우에도 게토Ghetto화 되지는 말아야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지 말아야합니다. 고립을 자초하지 말아야합니다. 오히려 세상과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세상이 당하고 있는 아픔과 고통과 눈물에 기꺼이 동참해야합니다. 세상이 어떤 모습을 보여 주든지 상관없이, 교회를 비웃고 조롱하며 핍박하든지 상관없이, 입에 담기 부끄럽지만 개독교 취급을 하더라도 상관없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빌붙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합니다. 힘에 지나도록, 무제한적으로 제공해 주어야합니다.
세상을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 안내하는 거룩한 통로가 되기를 마다하지 말아야합니다. 거룩한 숙주가 되기를 마다하지 말아야합니다. 엄청난 희생이 요구된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2021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은혜를 돌아보며 추수 감사 주일 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풍성하게 받아 누린 온갖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 기도만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세상을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 안내하는 거룩한 통로 곧 거룩한 숙주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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