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른 일어나 눈물 닦고 깨진 무릎에 빨간 약 발라 놓던 봉순 이처럼 재빨리 상처를 꽃으로 감싸 놓는 봉숭아
하양 보라 다홍 그늘진 담 밑이 화사하다 작고 여리고 소박해도 뙤약볕처럼 뜨거운 봉숭아 구두를 들고 맨발로 뛰어가던 봉순이 같은 꽃
다홍물 흠뻑 들어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녀가 봉숭아로 피어 한들거린다 영 글러버린 이번 생의 손톱에 꽃물을 들이고 있다
긴 끈
전 영 숙
제라늄 화분 속에 지렁이 한 마리 뿌리처럼 박혀
나올까 나올까 수없이 들여다보는 불안한 동거
꽃을 묶는 끈 같은 지렁이 죽 늘이면 끝없이 길어지는 길
나갈까 나갈까 캄캄한 어둠을 접었다 폈다 기어 간 길 모두 밀어 올려
허공에 불쑥 붉은 꽃 한 다발 묶어 놓았다
봄볕에 탄 말
전 영 숙
끊는다는 말은 봄날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사리 독 같은 말
주먹 꼭 쥐고 올라온 고사리 끊는 재미는 세상에 둘도 없는 재미
끊는 것에 재미라는 말은 봄날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사리 주먹 같은 말
아무런 요령 없어 누구라도 한 바구니 꺾어 담을 수 있다는 말은 봄철에 잠깐 고사리 밭 같은 말
말린 고사리 같은 그녀가 내 뱉는 봄볕에 탄 말은 삶을 이긴 손놀림 같은 말
꽃모가지를 부러뜨렸다
전 영 숙
봄볕 속에 쭈그리고 앉아 부러진 제비 다리를 고치 듯 떨어진 꽃모가지를 붙였다 흠잡을 데 없이 만들어 내 놓은 햇볕의 작품에 금이 갔다 금간 힘으로 마저 피어라 투명 테이프를 꼼꼼히 감았다 줄기에 푸른 물이 오르고 꽃이 점점 벌어졌다 망가졌다고 함부로 버린 것 보란 듯이 활짝 피었다 다 망가진 나를 버리지 않고 아직도 박음질 중인 햇볕 햇볕 한 줄기가 하는 일을 알아채는데 한 봄이 다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