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연정사는 중요민속자료 제88호로,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20번지에 위치하며, 서애 류성룡(柳成龍)이 예조판서에서 물러난 1586년(선조 19) 45세 때에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조성하였다.
류성룡은 하늘이 내린 재상이라 칭송받은 인물이자,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는 성리학자이자, 의서를 집필한 의학자이기도 했다. 명종19년(1564) 사마시를 거쳐 고향에서의 모친 병간호를 위해 상주 목사를 자청하여 부임하였었고, 이후 예조, 형조,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거쳐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했고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선조31년(1598) 명나라 장수 병부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을 끌여들여 명을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러 보내는 진주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정인홍을 비롯한 북인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된 후 이듬해 복권되었으나 다시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이후 고향인 하회에 칩거하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징비록을 집필하였다. 또한, 학문적으로는 개방적인 학문 태도로 양명학의 장점을 수용했고, 관리로서는 기존의 관행이나 직무에 얽매이지 않고 현안에 유연한 대처능력을 보여주었으며, 특히 임란 중에 전시 행정과 군무를 총괄하는 영의정이자 도체찰사의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하였다. 1573년 부용대가 바라보이는 곳에 원지정사를 지었고, 1586년에는 원지정사의 맞은편에 옥연정사를 지어 학문수양과 강학을 하였다. 옥연서당기에 그 자세한 유래를 기록하였다.
玉淵書堂記
옥연서당기
余旣作遠志精舍。猶恨其村墟近。未愜幽期。
내가 이미 원지정사(遠志精舍)를 지어놓고 아직도 한이 되는 것은 촌락이 머지않아 그윽한 맛을 누리기가 만족스럽지 못하여서다.
渡北潭。於石崖東。得異處焉。前挹湖光。後負高阜。丹壁峙其右。白沙縈其左。
북쪽 못을 건너서 돌벼랑 동쪽에 특이한 자리를 얻었는데, 앞에는 호수의 풍광을 끼었고 뒤로는 높은 언덕을 업었으며 오른쪽은 붉은 벼랑이 치솟고, 왼쪽은 흰모래가 띠를 두른 듯한 곳이다.
南望則羣峯錯立。拱揖如畫。漁村數點。隱映烟樹間。花山自北而南。
남쪽으로 바라보면 멀리 뭇 산봉우리들이 들쭉날쭉 서서 두 손을 마주 잡고 읍하는 것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이요, 어촌 두어 점이 나무 사이로 강물이 어리어 보일락 말락 하며, 화산(花山)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달려오다 강에 닿아 멈추었다.
隔江相對。每月出東峯。寒影倒垂。半浸湖水。纖波不起。金璧相涵。殊可玩也。
매양 달이 동쪽 산봉우리에서 떠올 라 차가운 간 그림자를 거꾸로 반쯤 호수에 드리우고 잔잔한 물결 하나 일어나지 않아 금빛과 구슬 그림자가 서로 머금은 듯한 풍경이야말로 유달리 즐길 만한 것이었다.
地去人烟不甚遠。而前阻深潭。人欲至者。非舟莫通。舟艤北岸則客來坐沙中。招呼無應者。良久乃去。亦遁世幽棲之一助也。
그 자리가 인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앞에는 깊은 못이 막혀 있어 사람이 오고자 해도 배가 아니면 통할 수 없다. 그래서 배를 북쪽 강기슭에 매어두면 객이 와서 모래밭에 앉아 소리쳐 부르다가 오래도록 응답이 없으면 스스로 돌아가게 되니, 이것 또한 세상을 피해 그윽이 들어앉아 사는일에 일조가 된다.
於是。余心樂之。欲作小宇。爲靜居終老之所。顧家貧無計。
이에 내가 마음속으로 이것을 즐겨 조그만 집을 지어서 늙도록 조용히 거처하는 곳으로 삼고자 하나, 다만 집이 가난하여 도무지 계획을 세울 수 없었다.
有山僧誕弘者。自薦幹其役。資以粟帛。
마침 산승(山僧) 탄홍(誕弘)이란 자가 그 건축을 주관하고 속백(粟帛)으로 물자를 대겠다고 자천하였다.
自丙子始。越十年丙戌粗成。可棲息。其制爲堂者二間。名曰瞰綠。取王羲之仰眺碧天際。俯瞰綠水隈之語也。
일을 시작한 병자년(1576, 선조 9)으로부터 10년이 지난 병술년(1586, 선조19)에 겨우 완성되어 깃들고 쉴만하게 되었다. 집 구조는 당(堂)이 2칸인데 감록(瞰綠)이라고 부르니, 왕희지(王羲之)의,‘우러러 푸른 하늘가를 보며 / 아래로 푸른 물 구비를 내려다본다‘는 말에서 취하였다.
堂之東。爲燕居之室二間。名曰洗心。取易繫辭中語。意或從事於斯。以庶幾萬一爾。
이 당의 동쪽에는 한가할 때에 거처하는 집이 2칸 있는데 이름을 세심(洗心)이라고 지었으니, 『주역』 계사(繫辭) 가운데의 말뜻을 취한 것으로 혹 여기에 종사하여 만에 하나라도 이루고자 함이다.
又齋在北者三間。以舍守僧。取禪家說名曰玩寂。
또 재실 북쪽에 집이 3칸인데 지키는 스님을 두고 불가의 학설을 취하여 완적(玩寂)이라 하였다.
東爲齋二間。以待朋友之來訪者。名遠樂。取自遠樂乎之語。
동쪽에 서재 2칸을 지어 찾아오는 친구를 대비한다는 뜻으로 원락(遠樂)이라고 하였으니, “먼곳으로부터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다.”라는 뜻에서 취하였다.
由齋西出爲小軒二間。與洗心齋相比。名曰愛吾。取淵明吾亦愛吾廬之語。
이 서재에서 서쪽으로 나가 조그만 다락 2칸을 만들어 세심재(세심재)와 더불어 나란히 앉혔는데 애오(愛吾)라고 이름하니, 도연명의 시에 ’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함이라.“라는 말에서 취한 것이며,
合而扁之曰玉淵書堂。盖江水至此。匯爲深潭。其色潔淨如玉故名。
모두 합해서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대개 강물이 흐르다가 이곳에 이르러서는 깊은 못이 되었고, 그 물빛이 깨끗하고 맑아 옥과 같은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
人苟體其意。則玉之潔淵之澄。皆君子之所貴乎道者也。
사람이 진실로 그 뜻을 본받고자 한다면 구슬의 깨끗함과 못의 맑음은 모두 군자가 귀하게 여길 도(道)인 것이다.
余嘗觀古人之言曰。人生貴適意。富貴何爲。余以鄙拙。素無行世之願。譬如麋鹿之性。山野其適。非城市間物。
내가 일찍이 옛사람들의 말을 살펴보 건데, ‘인생은 스스로 뜻에 맞는 것이 귀한 것이지 부귀가 무슨 귀함이 되리요.’하였거니와, 내가 비루하고 옹졸하여서 평소부터 행세하기를 원하지 않은 것이 ‘미록(麋鹿)의 성품은 산야(山野)에 알맞지 성시(城市)에 맞는 동물은 아니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而中年妄出宦途。汨沒聲利之塲二十餘年矣。擧足搖手。動成駭觸。當其時。大悶無聊。未嘗不悵然思茂林豐草之爲樂也。
중년에 망령되이 벼슬길에 나아가 명성과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골몰하기를 20년이었다. 발을 들고 손을 놀릴 때마다 걸핏하면 놀라서 부딪힐 뿐이었으니, 당시에 크게 답답하고 슬퍼하면서 이곳의 무성한 숲 우거진 덤불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今幸蒙恩。解綬南歸。軒冕之榮。過耳鳥音。
지금의 임금의 은혜를 입고 관직에서 물러나 남쪽으로 돌아와 있으니 벼슬살이의 영화는 귓가에 지나가는 새소리가 되었고,
而一丘一壑。樂意方深。是時而吾堂適成。將杜門卻掃。潛深伏奧。俛仰乎一室之內。放浪乎山谿之間。圖書足以供玩索之樂。疏糲足以忘蒭豢之美。
아름다운 한 언덕 한 골짜기의 즐거움이 깊어가는 이때에 나의 집이 마침 이뤄졌으므로 장차 문을 걸고 싹 물리쳐 쓸은 듯 깊이 방안에 틀어박혀 지내며, 산의 계곡 사이를 이리저리 거닐기도 하고 도서(圖書)는 즐겨 찾아 읽을 정도로 만족하며, 성긴 밥이나 추환(芻豢, 맛있는 음식을 뜻함)의 기름짐을 잊기에 족하니,
佳辰美景。情朋偶集。則與之竆回溪坐巖石。望靑天歌白雲。蕩狎魚鳥。皆足以自樂而忘憂。
좋은 때 아름다운 경치에 정겨운 벗들이 우연히 모여들면 그들과 굽이진 계곡을 거슬러 찾기도 하며 암석에 앉아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흰 구름을 읊기도 하면서 호탕히 놀아 물고기와 새들까지 모두 흠뻑 즐겁게 하면서 시름을 잊어 보리라.
嗚呼。斯亦人生適意之大者。外慕何爲。懼斯言之不固。聊書壁而自警。丙戌季夏。主人西厓居士記。
아! 이것 또한 인생이 스스로의 뜻에 맞는 큰 것이니 밖으로 달리 그 무엇을 그리워할 것인가? 내 이 말이 굳지 못할까 두려운 나머지 문득 벽에 써서 붙이니 스스로 경계하고자 하는 뜻에서다. 병술년 늦여름, 주인 서애거사(西涯居士)는 적는다.
옥연정사는 하회마을 화천을 건너 부용대 쪽 나루터 바로 위에 위치한다. 부용대를 사이에 두고 동쪽에 옥연정사, 서쪽에 겸암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하회마을에 인접하여 건립한 원지정사의 경우 1573년 부친상으로 잠시 낙향해 있거나 서재의 용도로 빈번하게 사용되었었던 반면, 옥연정사의 경우 학문수양 뿐 만 아니라, 제자 양성과 강학을 염두에 두고, 마을과 조금 떨어진 경승지를 택하여 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체 배치는 수장고 역할을 하는 대문간채, 생활공간이자 지원공간인 안채, 류성룡의 학문수양공간인 별당, 강학공간인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는 건물이 옥연정사(옥연서당)이다. 그리고, 사랑채의 독립성을 염두에 두고 사랑채로의 진입은 서쪽, 안채로의 진입은 동쪽으로 나뉘어 있으며, 별당채 앞마당으로 인해 정사의 독립성이 유지된다. 옥연정사의 위계를 강조하고 시각적 조망이 용이하도록 정사건축을 전면에 배치하였다. 마을에 인접하여 별도의 지원공간이나 생활공간이 필요치 않아 단독으로 3칸 정도의 단촐한 평면 형태로 배치된 원지정사와는 달리 옥연정사는 시각적으로는 하회마을과 같은 영역권이지만, 비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생활공간과 지원공간이 별도로 필요하고, 이에 따라 정사는 사랑채의 형식으로 건축되었고, 강학을 위해 4칸의 넓은 대청이 구비되었고, 필요시 온돌방의 분합문을 열어 공간을 통할 수 있도록 유기적으로 평면을 구성한 특징이 있다.
화천이 마을을 시계방향으로 휘감아 돌다가 방향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바꾸는 곳에 옥소(玉沼)가 있는데, 옥연정사는 이 소의 남쪽에 있어 소의 맑고 푸른 물빛을 따서 옥연정이라고 이름 붙였다. 옥연정사에서 류성룡은 임진왜란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게 후세를 경계하도록 하기 위해 ‘과거를 징계하고 앞날을 삼간다’는 취지의「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였다.
옥연정사는 문간채와 바깥채 외에 안채와 별당까지 구성되어 있다. 문간채는 왼편 남쪽부터 차례로 측간과 대문을 두고, 대문 오른편에 광을 3칸 둔 ㅡ자형이다. 하회 쪽으로 통하는 문으로 옥연정의 출입은 바깥채 쪽의 작은 문을 주로 이용한다. 일반적으로 바깥채는 대문간과 마주해 있는데, 옥연정사는 오히려 뒷문이 대문 역할을 한다. 바깥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정방형의 4칸짜리 대청 좌우로 1칸 반의 방을 대청을 이루어 배치해있다. 이 대청에 오르면 산 아래로 흐르는 화천의 흐름과 모래밭들을 볼 수 있다. 정자 옆에는 서애가 이름 붙인 능허대와 보허대가 있다. 안채는 부엌이 중앙에 있고 방이 부엌을 중심으로 가로로 또는 세로로 2칸씩 좌우에 배치되어 있어 예사 집과 약간 다른 구조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