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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어머니 10장 신(神)세계를 향한 위대한 도전 3. 짙푸른 현해탄의 징검다리가 되어 1 "오느라고 고생스럽지는 않았나요?" "고생은 하지 않았는데 ····· 비행기표를 구하는 일이 더 고생스러웠습니다." 한국에서 행사가 열리면 일본에서 많은 식구들이 한꺼번에 옵니다. 나는 그들이 걱정되어 늘 안부를 묻습니다. 적게는 3천 명, 많게는 6천 명이 하루 이틀 간격으로 믿음의 본향 땅 청평에 오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어떤 식구는 인천이나 김포의 공항으로 , 어떤 식구는 부산으로 건너와 버스를 타고 청평으로 옵니다. 2 일본 식구들에게는 신앙의 조국인 한국을 방문해 통일교회 출발지인 부산 범냇골 성지를 비롯해 청파동 교회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성지를 순례하며 기도를 올리는 일이 평생의 영광이자 소망입니다. 수천 명의 식구들이 믿음을 안고 한국으로 오는 모습은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는 장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것은 아시아의 앞날을 바꿀 모습이기도 합니다. 3 아시아가 미래의 대륙으로 각광받는 이유는 통일교회의 부흥이 가장 왕성하기 때문입니다. 통일교회를 첫 번째로 받아들인 곳은 일본입니다. 1958년 7월, 최봉춘 선교사가 부산에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극적인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선교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밀항과 투옥, 입원과 탈출로 이어지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일본 땅을 개척해 1959년 10월 2일 금요일 오후 7시 15분, 네 명이 도쿄의 허름한 60여 년의 세월 동안 일본의 통일교회는 일본 전역에서 들불처럼 번져 성장했습니다. 4 그러나 그 노정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단 시비가 끊이지 않았고, 승공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일본 공산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순교자가 계속 나오는 등 아픔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문 총재에게 입국 비자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유명인사들이 점차 축복결혼에 참여하자 교세 확장에 위협을 느껴 언론을 통해 맹렬히 반대했습니다. 통일교회에 나가는 자녀를 감금해 큰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통일교회는 무럭무럭 성장해 일본 사회의 큰 등불이 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일본 식구들이 세계 각지로 떠나 선교와 봉사를 통해 원리말씀을 전하는 데 온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5 1990년대 이전만 해도 민단과 조총련은 같은 한민족이면서도 사상적 배경이 달라 서로를 배척했습니다. 같은 민족이 마치 물과 기름처럼 따로따로 겉도는 것은 큰 불행이었습니다. 우리는 승공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조총련을 참을성 있게 인도했습니다. 조총련 교포들의 고국방문을 추진하자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진정 어린 권유에 점차 마음을 돌이켜 고국방문단에 참가했습니다. 한 번 다녀간 많은 조총련 교포가 공산주의를 버렸습니다. 6 2018년 여름, 일본 도쿄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선교 60주년 기념 '2018 신(神)일본가정연합 희망전진 결의대회'가 열렸습니다. 나는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래를 위해 한국과 하나 되어 손잡고 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이 한마음으로 한일해저터널을 연결해 전 세계를 잇는 평화고속도로를 만들 것을 다시 제창했습니다. 7 나는 1960년대부터 틈이 날 때마다 일본을 찾아 식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선교사들을 격려했습니다. 도쿄, 나고야, 훗카이도 등 여러 도시에서 수백 번 넘게 대회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중 나가노는 동계올림픽이 열린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8 이곳의 통일교회는 처음에 식구 수가 수십 명에 불과하고 교회도 작았으나 나의 격려에 힘입어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아름답고 아담하게 지어진 교회 옆에는 '화랑'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수련소도 있습니다. 신라시대 화랑도의 뜻을 높이 받들어 그들 스스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나는 이 교회를 찾아 식구들을 격려하고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결실 맺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뒤편에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몇 년 후 다시 갔을 때 사과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탐스러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사과나무처럼 일본에 뿌려진 말씀이 싹이 트고 번성해 튼실한 열매를 많이 맺고 있습니다. 9 나는 일본을 신(神)일본으로 축복했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일본은 사회와 문화가 근본적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 수만 명이 새 삶을 시작했으며, 매년 수만 수십만 명의 식구가 현해탄을 건너 신앙의 조국인 한국을 찾아옵니다. 그 발걸음이 과거 한때 원수지간이었던 한국과 일본의 화합에 징검다리가 되고 있습니다. 10 나는 일본이 천재지변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도호쿠 대지진, 구마모토 지진, 오카야마현의 수해를 비롯해 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위로를 표해 왔습니다. 하늘 섭리를 놓고 참부모는 일본을 어머니의 나라로 축복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줍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밤잠을 설치듯, 일본은 전 세계를 위해 어머니의 심정으로 희생의 길을 가야 합니다. 어머니의 나라로서 세계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
平和の母 第十章 神世界に向かう偉大な挑戦 3. 真っ青な玄界灘の架け橋となって 「ここまで来るのに、大変だったでしょう」 「来ること自体はそうでもありませんでしたが、飛行機のチケットを手に入れるのに苦労しました」 韓国で行事が開かれると、日本から多くの信徒が大挙して押し寄せます。私は彼らのことが心配で、いつもその状況を尋ねます。少ないときで三千人、多いときは六千人が、一日か二日の間に信仰の本郷の地である孝情天苑(京畿道加平郡所在)に集まるのです。仁川空港、金浦空港から来る人もいれば、中には釜山から入って、バスを乗り継いで孝情天苑まで来る信徒もいます。 日本の信徒にとって、信仰の祖国である韓国を訪問し、家庭連合の出発地である釜山のボムネッコル聖地をはじめ、青坡洞教会など各地に散らばっている聖地を巡礼して祈りを捧げることは、生涯にわたる栄光であり、願いなのです。数千人の信徒が信仰を抱いて韓国を訪れる様子は、あたかも巨大な波が迫ってくるかのようです。それはアジアの未来を変える光景でもあるのです。 天の摂理において、アジアが未来の大陸として脚光を浴びている理由は、家庭連合の勢いが最も盛んだからです。最初に家庭連合(統一教会)を受け入れた所は日本です。一九五八年七月、崔奉春(日本名、西川勝)宣教師が釜山から密航船に乗って日本に渡り、宣教を始めました。 宣教の路程は苦難の連続でしたが、凄絶な闘いを通して日本の地を開拓し、ようやく一九五九年十月二日金曜日の午後七時十五分、東京の古い建物の二階に四人が集まって、日本の家庭連合史における最初の礼拝を捧げたのです。その後、六十年以上の歳月をかけ、家庭連合は日本全国で着実に成長を遂げてきました。 しかしその路程は、ほかに類を見ないほど険しいものでした。キリスト教会からは異端だと絶えず非難され、勝共運動をしているという理由で、共産主義者からは激しい迫害を受けました。殉教する人も出るなど、苦しみはとどまることを知りませんでした。 さらに日本政府は、ダンベリー刑務所での収監期間のゆえに、夫の文総裁に入国ビザを出すこともしなくなったのです。また、有名人が次第に祝福結婚式に参加するようになると、反対している人々は教会が大きくなっていくことに脅威を感じ、マスコミを通して猛烈に批判してきました。家庭連合に通う息子、娘を親が拉致監禁し、大きな社会問題にもなりまし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日本家庭連合は成長を続け、日本社会の大きな灯火となったのです。これまでに数万人の日本人信徒が世界各地に向かい、宣教と奉仕を通して、「原理」のみ言を伝えるために精誠の限りを尽くしてきました。 一方、日本には韓民族の多くの同胞も住んでいます。しかし一九九○年代に入るまで、在日大韓民国民団 (民団)と在日朝鮮人総聯合会 (朝鮮総連)は、同じ韓民族でありながらも思想的背景を異にするため、互いに排斥し合っていました。同じ民族がまるで水と油のように交わらずにいるというのは、 大きな不幸でした。私たちは勝共活動をしながらも、その一方で、朝鮮総連と忍耐強く関係を築いてきました。 朝鮮総連の同胞の韓国訪問を推進すると、彼らは最初、疑いの眼差しを向けてきましたが、真摯に向き合って誘っていく中で、次第に気持ちに変化が起こり、韓国訪問団に参加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一度韓国に足を運んだある朝鮮総連の同胞は、共産主義を捨てました。 私は一九六〇年代から、時間ができるたびに日本を訪ね、信徒に会って話をし、宣教師たちを励ましてきました。 東京、名古屋、北海道など、様々な都市で百数十回も大会を開き、神様のみ言を伝えました。 中でも長野は、冬季オリンピックが開かれたこともある中心都市です。この地域の家庭連合は当初、信徒の数が少なく、教会の建物も小さかったのですが、私の励ましに勇気づけられ、成長を重ねてきました。美しく建てられた教会の隣には、「花郎徒」という名前が付いた小さな修練所もあります。新羅時代の花郎徒の精神を高く掲げ、自分たちでそのように名付けたということです。 私はこの教会を訪れて信徒たちを励まし、ここから神様のみ旨を結実させなければならないと伝えました。そうして、教会の裏手にリンゴの木を一本、植えたのです。それからしばらくして再び行ってみると、リンゴの木はすくすくと育ち、立派な実を実らせていました。そのリンゴの木のように、日本に蒔かれたみ言は芽を出して大きく成長し、多くの実を結んでいます。 また、日本が天災地変や困難に遭うたびに、私は心を傾けてきました。近年では、数多くの命を奪った東日本大震災をはじめ、熊本地震、岡山県の水害 (西日本豪雨)など、災害が起こるたびに慰労しました。 二〇一八年の夏、日本のさいたまスーパーアリーナで宣教六十周年記念「二〇一八神日本家庭連合希望前進決意大会」が開かれました。私は、日本は過去の過ちを認め、未来のために韓国と一つになり、手を取り合って進まなければならないと話しました。そして、私はその場で日本と韓国が一丸となって日韓トンネルを開通させ、世界中を結ぶ国際ハイウェイを建設することを改めて提唱したのです。 私は、日本を「神日本」として祝福しました。それ以降、新しく生まれ変わった日本は、社会と文化が根本的に変化してきています。 神様の懐に抱かれて何万人もの人が新しい人生を出発しており、毎年数万、数十万人の信徒が玄界灘を渡って、信仰の祖国である韓国を訪れています。その足取りが、一時は恩讐関係にあった韓国と日本の和合に向けた、架け橋となっているのです。 天の摂理のために、真の父母は日本を母の国として祝福しましたが、母親は子供のためならば、すべてを惜しまずに捧げます。子供の世話をするために、母親が夜を明かすこともあるように、日本は全世界のために、自ら進んで犠牲の道を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のです。母の国として、世界のために献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
MOTHER of PEACE CHAPTER 10. The Challenge Of Realizing A Heavenly World 3. The mother nation Whenever we hold an event at our Cheongpyeong complex in Korea, thousands of Japanese Unificationists participate. I am always concerned, because incredible logistical support is necessary to welcome and host anywhere from 3,000 to more than 6,000 members at this site, our original spiritual homeland. But from their side, Japanese family members feel it is a joy to visit their spiritual homeland of Korea. They treasure prayer at holy grounds, such as Bomnaetgol, where Father Moon built his first church out of discarded military ration boxes and mud. They value the Cheongpa-dong Headquarters Church. For many, it is a once-in-a-lifetime opportunity and honor. The sight of thousands of devout Japanese members coming to Korea provides a glimpse of a great spiritual wave that I believe will bring positive change to Asia. Asia is considered the continent of the future for many reasons, one of which is that it is where the Unification movement's revival and expansion are most dynamic. Japan was the second country in which the Unification movement developed. Mission work began in dramatic fashion when, in July 1958, missionary Choi Bong-choon boarded a ship in Busan headed for Japan. His mission work was an endless marathon of hardships. Entering the country without a proper visa, missionary Choi was arrested and incarcerated, then hospitalized. Finally gaining freedom, Mr. Choi broke through when, at 7:15 p.m. on October 2, 1959 in a crumbling attic in Tokyo, he led the first public Unification Church of Japan Sunday Service. Over the 60 years since then, the Unification Church has expanded throughout Japan. Nonetheless, theirs has been a tortuous course. Accusations of being a cult never abated, and ferocious opposition from Japanese communists arose in reaction to our Victory Over Communism activities. When several celebrities participated in our marriage Blessing Ceremony, some in Japan felt threatened by the expansion of our movement, and they fiercely opposed us in the media. For decades, my husband could not enter Japan. Some of our beloved members even lost their lives. A major assault on religious liberty was allowed when Japanese authorities turned a blind eye to people kidnapping our members, holding them captive until they renounced their faith, and even committing them to mental hospitals. Despite such hardships, the Unification movement has grown steadily, and the society now is recognizing the wrongness of such treatment. Our movement is a shining light for Japanese society. It also has sent thousands of missionaries throughout the world. They have invested themselves wholeheartedly in teaching the Divine Principle and serving local communities. Prior to the 1990s, two groups of Korean immigrants living in Japan shunned each other over ideological differences. They coalesced into two organizations, Mindan, the pro-democracy Korean Residents Union in Japan, and Chongryon, the pro-Pyongyang General Association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The fact that citizens belonging to the same “Korean people” separate themselves from each other like water and oil was a great shame. As we engaged in Victory Over Communism activities, we forged ties even with Chongryon and invited its members to visit South Korea. Initially they viewed us with suspicion, but when they saw the sincerity of our offer, they joined the tours. Many among them eventually distanced themselves from communism. In the summer of 2018, at the Saitama Super Arena in Tokyo, we held the Rally of Hope and Resolve to Advance God's Providence in Heavenly Japan, to celebrate the 60th anniversary of the Japanese movement. During my address, I called Japan and Korea to go forward hand in hand, for the sake of the future. I exhorted the two nations to unite as one in heart and complete the Korea-Japan undersea tunnel linking the two nations and the world through the International Peace Highway. Since the 1960s, I have visited Japan whenever possible to meet members, share personal stories and encourage missionaries. I have spoken publicly at hundreds of gatherings in various cities, including Tokyo, Nagoya, and Hokkaido, sharing God's word. Nagano, which once hosted the Winter Olympics, is a Japanese city that has touched me in a special way. The Nagano Unification Church initially consisted of a small church with a few dozen members. Through my constant encouragement, the church grew steadily. Next to the beautiful, cozy church building is a small training center that they named “Hwarang.” The local members gave this name in honor of the noble spirit that guided elite young leaders of Korea's Silla Dynasty. Moved by the members' dedication, I visited the church, encouraged the members and asked them to bring God's will to fruition there. I also planted an apple tree in their backyard, and when I visited the church again a few years later, the tree had grown magnificently and was bearing delicious apples. Just like the apple tree, the words I have sown in Japan have multiplied and are now bearing many beautiful fruits. I blessed Japan to now arise as “Heavenly Japan,” a Japan in which society and culture are reborn. Tens of thousands of Japanese men and women have found new life in the bosom of God through True Parents. Every year, many of them cross the Korea Strait to visit the homeland of their faith. This convergence of members makes our HJ Cheonwon campus a bridge of harmony between two former enemy nations. My heart is especially with Japan during natural disasters and other difficult times. During the great earthquake of Tohoku, the Kumamoto earthquakes and the floods in Okayama Prefecture, countless lives were lost and the damage was overwhelming. When such calamities occur, I offer my condolences and wholehearted support. In the context of God's global providence, True Parents blessed Japan as the mother nation. A mother gives everything to her children unconditionally. Just as a mother goes without sleep to take care of her children, Japan is walking the path of sacrifice with the heart of a mother for the sake of the world. As the mother nation, Japan is dedicated to living for the sake of the world.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