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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기행]“1도개 2당촌 3박실 4강골 順”
보성지역 음·양택 명당(상)
남도일보 2007년 04월 02일 00시 00분 입력
보성지역의 양택명당을 살펴보기 위해 순천을 거쳐 벌교에 들어섰다.
벌교를 지나면서 벌교읍 옛 부사군의 진산인 부용산을 바라보며 문득 풍수기행과는 거리가 먼 이른바 ‘땅에 새겨진 문화유산’을 떠올렸다.
부용산에 서리어 세세연연 전해져오고 있는 현대판 ‘제망매가’ 즉, 부용산의 은은한 멜로디가 귓전을 울리면서 그 노래에 깊이 배어 있는 애절함을 느끼게 했다.
‘부용산 오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벌교출신 박기동 시인이 1947년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결핵으로 죽은 누이의 주검을 뭍고 와 쓴 시에 당시 목포 항도여중에서 함께 근무하던 안성현이 1948년 곡을 붙인 이 노래를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떠 있는 뗏목다리’, 이른바 벌교는 물위에 떠 있는 연꽃의 부용산과 상호 연관된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러니 떠 있는 뗏목다리 벌교(부사)와 부용산이 좋은 짝이 되고 여기에 부용산 노래의 애절한 가락이 소설 ‘태맥산맥’속 민족의 비극을 담고 있는 듯, 마치 하나의 운명처럼 연결 돼 보인다면 필자의 비약적인 연상일까.
이러한 일련의 문화적 유산과 지명에 얽힌 사연을 풍수지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또 다른 이야기 거리가 나올수 있을 것만 같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언뜻 뒤돌아 보니 부용산이 산 모퉁이로 그 모습을 숨기고 만다.
보성지역에는 유명하다는 집터가 인구에 회자되면서 그 서열마저 매겨져 전해오고 있다. 즉, 1도개, 2당촌, 3박실, 4강골이 그 것이다.
다시말해 보성지역에서 으뜸가는 양택길지는 미력면에 소재한 도개마을이고 그 다음이 복내면 비봉산하의 당촌이며 세번째는 득량면의 박실(박곡), 네번째가 강골(강곡)마을이라는 뜻이다.
필자는 이상에 열거된 네곳 마을을 모두 답사하고 또 그 마을의 텃기운으로 배출된 인물을 살펴보고 나서 ‘그 양택의 서열을 정하게 된 연유나 준거가 어디에 있었는가’가 몹시 궁금했다. 또 필자 나름대로의 관측과 기준에 따라 그 궁금증을 풀어보고 싶었다.
우선 그 마을터를 이루기 위해 내룡한 용맥의 본원을 따라가면서 주룡의 대소경중을 따져 보고 터를 형성하는 용맥의 교도가 지기를 공급해 마무리되는 상태를 분석했다.
그리고 풍수지리의 4과에 속하는 물의 형세도 함께 비교해 봤다.
마을터를 만들기 위해 내룡한 보성지역의 중심 간룡은 분명 무등산을 발조로 해서 계당산을 거쳐 봉화산, 군치산을 타고 넘어 장흥군에 소재한 제암산으로 부터 그 충만한 땅기운을 이어온 사자산에 연결돼 이어져온 일림산에서 한껏 지기를 응결시킨 후 기복, 위이, 낙맥, 결인, 과협의 윤서를 밟아 그 용맥의 주요 분지점에서 큰 줄기의 한 가닥 내룡맥이 홀연 낙맥 우선해 살며시 내려와 마을터에 땅기운을 서리어 결작시킨 마을이 박실이다.
또 다시 큰 산맥이 동쪽으로 나아가다 방장산에 못미쳐 파정치를 만들기 전에 큰 성신을 개방시킨 다음 거기서 뚫고 나오듯 발달한 천심룡이 낙맥한 연후에 목포, 순천도로에서 결인하고는 이내 비룡한 산줄기가 영송과협을 형성하며 마치 살아 움직이며 용틀임치는 용마와 같이 바다를 향해 나아가다 127.5m의 주산을 우뚝 세우고 마무리의 낙맥, 결인, 비룡을 거친 후 천마사의 현무정을 앉히고는 싸 안듯이 포근히 결작시킨 마을터가 강곡마을이다.
<산도>에서 보듯이 도개마을을 짓기위한 용맥은 계당산에서 간룡을 타고 봉화산으로 나아가던 분지점에서 갈라져 내룡한 한 자락의 용맥이 517.9m의 성신을 일으켜 세우고 이내 위이, 기복, 과협의 질서를 지키며 명봉재를 거친 다음 도개마을 뒷 성신을 수봉으로 앉히고 마무리 된다.
그리고 당촌마을로 내룡한 용맥은 두봉산에서 계당산쪽으로 그 간룡이 내려서는 분지점에서 빠져나온 용맥을 우뚝 세우고는 용맥의 행도에 마침표를 찍고, 사뿐이 내려서는 분기점에서 빠져 나온 용맥이 장재봉을 세워놓고 우선하며 기복을 거듭하다가 337.9m의 비봉산을 우뚝 세우고는 용맥의 행도에 마침표를 찍고 내려앉은 곳이 당촌마을이다.
용맥의 본원이나 그 강세를 봐서는 박실과 강곡이 더 강하고 생기에 찬 지기를 받는다고 해서 크게 오류된 관점이라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다만 수세가 잘 구비된 점이 도개마을과 당촌마을의 우세한 보국이라 할수 있다. 난형난제의 양택길지 네 곳 중에서 배출된 인물에 관한 객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박실터와 강곡마을을 소개하고 도개마을과 당촌은 더 정확하고 근거 있는 인물목록이 수집되는 대로 다음기회에 다시 쓰기로 한다.
정보수집의 한계성에 부딪혀 네 곳 모두 간산기를 쓰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박실의 양택길지 간산에 큰 도움을 준 필자의 교직 선배이자 학식과 덕망이 두터워 사회로 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양동기 전 교장에게 이 지면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박실터는 장흥의 사자산으로 부터 발달해 힘차게 행룡해와 보성지역의 근간을 이루는 산맥에서 크게 낙맥, 결인한 뒤에 별도의 성신을 일으켜 준봉 깃대봉과 덕암산, 국사봉을 차례로 세운 후 우선룡으로 낙맥, 입수하면서 생기에 찬 내룡맥이 마치 날던 기러기가 평지로 내려 앉듯이 마을터로 내려서 자리를 잡는다. 물론 깃대봉으로 분지시킨 간룡은 동쪽으로 내달아 또 다른 산봉을 거쳐 파청치를 지나 540m의 방장산을 세우고 이내 높고 낮은 성신을 세우며 과협의 과정을 통해 북방으로 나아가 보성지역의 제일봉인 존제산을 우뚝 세우고는 그 행룡의 진행을 멈추지 않고 조계산으로 이어져서 한가닥은 북진해 석곡의 아미산을 세운다. 다른 한 가닥은 동남으로 진행하며 송치재를 지나 광양땅의 백운산으로 통한다.
존제산에 못미쳐 분지된 또 한 자락의 용맥은 동남쪽으로 머리를 틀어 고흥땅의 발조가 되는 봉두산으로 이어 달린다.
다시 박실마을터의 진산 깃대봉으로 말머리를 돌려 보자.
깃대봉은 350m가 넘는 드높은 준봉으로서 박실터를 양택명당으로 있게 한 조산이다. 사진에서 보듯, 그 빼어난 기상은 탐랑성으로 솟아 대지명당을 결작시키려는 진산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깃대봉에서 낙맥, 결인, 비룡의 행룡을 거쳐 또 하나의 준봉 덕암산을 수려하게 세우고 덕암산에서 또 다시 주룡의 윤서를 밟아 박실터의 주산이자 현무봉이 되는 국사봉을 세워 앉힌다. 이른바 목성체이다.
국사봉에서 양 날개처럼 개장한 다음 마을의 우백호 자락은 구슬을 꿰어 이어지듯 취기처를 만들며 연주룡맥을 형성하면서 크게 우선해 그 유명한 음택명혈 ‘장군대좌형’을 결작하고는 여기를 남겨 마을을 포옹하며, 왼편으로 뻗어내린 또 하나의 개장맥은 여러가닥의 청룡사를 만들어 마을을 옹위한다.
옥에 티라고나 할까. 청룡사가 튼실하게 발달해 마을을 옹위하지 못한 점이 눈에 띄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박실터는 이렇게 형성됐다.
용진혈적의 양택명당으로 손꼽힐만 하다. 인걸은 지령이라는 풍수지리의 오묘한 이치는 박실터에서도 어김없이 입증되고 있다. 양동기 선생이 애써 수집해 필자에게 넘겨준 박실마을의 인물편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보성지역 양택명당 중 강골은 조선시대 문무과에 등제한 인물이 모두 5명이고 음직(蔭職)에 나아간 사람도 2명에 달한다.
음직이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부모나 조부의 공으로 벼슬길에 오른 것을 뜻한다.
과거에 등과된 사람은 무과에 4명, 문과에 1명이다. 이는 양택이나 음택명당이 우선작국인 경우, 무부(武富)가 성하다는 풍수지리의 이치와 무관하지 않다.
박실마을에서 현대에 배출된 인물은 조사된 자료만으로 37명에 이른다. 이를 영역별로 분석하면 고시합격자 6명(행시 2명, 사시 4명), 교수 10명, 의사 13명, 관계진출 13명이다.
왕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인물이 배출되고 있는 점에 비춰 박실은 양택명당으로 손꼽힐 만한 승지가 분명하다.
조선시대 명종조 영해부사를 지낸 양산항과 만경의 현령을 지낸 양철진은 음직이었다.
인조, 영조, 숙종조에 걸쳐 무과에 급제해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오른 양우급, 군자감정을 지낸 양경남, 부사를 지낸후 사후에 병조판서에 오른 양익표, 북부참군(한양경내수비대장)을 역임한 양두환 등은 모두 무인이다.
그리고 문과에 급제한 후 담양부사를 지낸 조정우가 유일하게 문인으로 기록된다.
현대에 이르러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한 인물이 무려 37명에 달한다. 1급공무원으로 재무부 이사관으로 재직한 양보승은 여수, 마산, 김포세관장을 역임했다. 양동관은 사법고시에 합격해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역임했으며 역시 사시에 합격한 후 현재 연수중인 양지현은 앞으로 여성법관으로서 역량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역시 여성관료로 환경부에 재직중인 양한나는 기술고시 출신이다. 이들은 제주 양씨 문중이다.
그리고 진원박씨 문중에서도 사법고시에 합격해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지낸 박형관을 비롯 사시합격 후 연수중인 박형만, 외무고시에 합격해 미국, 이란대사관에 근무한 박윤주, 전남경찰청 경무과장으로 재직했던 박승주, 전남도교육연구원장과 교육위원을 역임한 박정주도 이 마을 출신이다.
이밖에 서울대 교수직에 오른 양동휘, 양동찬, 양동범과 전남대 교수 박형욱 등 12명이 교수로 활동하거나 퇴직했다.
부자간 의사인 박형근, 박규현을 비롯해 양근영, 양금열 등 8명이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공인회계사인 양동표 등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인물사를 종합해보면 박실 마을은 제주양씨와 진원박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서 인물이 끊임없이 배출된 것은 풍수지리의 이치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인걸은 지령’에 근거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제 강골을 소개할 차례다.
강골을 방문하면서 광주이씨인 이태용선생의 안내를 받았다.
<산도>에서 보듯 강골의 양택지는 작혈의 윤서(체계적인 순서)를 잘 형성하고 있다.
박실터를 만들기 위해 분지된 간룡에서 방장산(535.9m)으로 행룡해 나아가는 용맥이 파청치에 못 미쳐 350m가 넘는 성신을 세우고 그 개정처에서 홀연 낙맥한 생기맥이 순천-목포간 고속화도로에서 결인처를 만든가 하면 거기서 줄곧 비룡한 용맥이 덕산제를 끼고는 송곡리와 예당리의 경계를 이루면서 위이, 기복, 과협을 거듭하다 우선으로 회룡해 127.5m의 성신을 세운다.
이 산봉이 강골터를 짓기 위한 주산이자 이 부근의 진산에 속한다.
주산에서 크게 낙맥 결인하기를 두번, 조산에서 공급된 지기를 마무리해 마을터로 인입시키는 현무봉이 천마사의 형세를 띠며 단정히 자리잡고는 봉의 날개처럼 양쪽으로 개장해 내청룡과 내백호사를 만들어 마을터를 감싸 안는다.
전해지는 양택길지의 물형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날던 봉황이 둥지에 들어 알을 품는 비봉포란형과 흡사하고 힘차게 달려오던 천마가 물을 만나 갈증을 씻고 심기일전하는 갈마음수형 같기도 했다.
물형이야 어떻듯 간에 대지명당을 만들기 위해 내룡한 주룡으로써 그 행룡의 과정이 명당결작의 순차성을 잘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먼저 마을터의 근원이 되는 조산의 시발이 분명하고 낙맥 생기가 확실하며 행룡해온 과협이 뚜렷하고 내룡맥이 광·협을 이루면서 음양이 반복되며 결인처가 세곡해 제살과 청기를 여과하는데 이상이 없다. 또 마무리의 취기를 이루는 마을 뒷편의 봉(현무봉)만이 곱고 충실하며 그 과정을 거쳐온 땅기운을 오롯이 마을터에 서리게 하는 입수 용맥이 제대로 법칙성을 갖추는 등 주룡의 8개 윤서를 잘 갖췄다.
특히 마을 앞을 감돌아 흐르는 냇물은 마을터에 감도는 서기에 찬 땅의 기운을 한점도 설기시키지 않으려는 듯 장금장치를 하고 있으니, 비록 내룡맥이 장원해서 발복이 더디게 올지라도 양택길지로서 손색이 없다 하겠다.
주룡의 주요 강령이 되는 동정의 요건도 갖췄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처럼 생기 넘치게 용트림치면서 내룡한 맥은 다이나믹하지만 정작 내룡맥에 실려온 땅기운을 서리게 하는 마을터는 고요하기 이를데 없다는 얘기다.
일제시대 득량만 방조제를 막아 드넓은 들녁이 마을앞에 펼쳐지기전에는 마을앞까지 바닷물이 넘실거려 강골(江谷)이라 이름 붙에게 됐다고 한다.
지금은 마을전체 34호의 가구중 세대주가 타성인 경우가 8개세대에 불과한 광주이씨 세거촌이지만 강골마을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11세기 중엽 전주이씨가 터를 잡아 정착해 오다 그뒤 죽산안씨를 거쳐 16세기말에 광주이씨 일족의 이세정(1461-1528)이 호남관찰사를 지내고 셋째아들 이유번이 지방의 유력가문의 안씨에게 장가들어 강골마을 일대의 재산을 물려 받으면서 광주이씨 집성촌이 시작됐다고 한다.
잘못된 내용 : 광주이씨로 호남관찰사를 지낸 이세정의 다섯째 아들인 광주이씨 보성 입향조 보성 한실 마을(현 보성군 조성면 대곡리)에 살던 이수완의 아들 이유번이 지방의 보성 지방의 유력가문인 죽산안씨 안수잠의 외동딸에 장가들어 강골마을(현 보성 득량면 오봉리) 일대의 재산을 무려받아, 보성 한실에서 강골마을로 이주하면서 광주이씨 집성촌이 시작되었다.
죽산안씨 / 제학공파 / 보성 주부공종중 / 죽산8세 안수잠(安秀岑,1486~미상)은 7세 안범(安範, 1460~1523)의 둘째 아들로, 중종2년(1507) 생원진사(生員進士)양시 합격 후, 중종17년(1522) 문과에 급제하여 합천군수를 지낸 분인데, 선부인(先夫人)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태종(太宗)의 12남17녀 중 14번째(태종의 6남)로 숙의(淑儀) 최씨(崔氏)의 소생인 이정공(夷靖公) 희령군(熙寧君) 이타(李袉)의 장남 화성군(花城君) 이감(李堪)의 따님을 부인으로 뒀고, 슬하에 외동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따님이 광주이씨(廣州李氏) 6세 광원군파(廣原君派)로 보성(寶城) 입향조(入鄕祖)인 내청시 판관(判官)을 지낸 이수완(李秀莞)의 아들 이유번(李惟蕃)과 혼인하여 이응남(李應男, 현감), 이명남(李命男, 찰방), 이제남(李梯男), 이현남(李顯男, 무과, 부사)의 네 아들을 슬하에 두고 외손봉사(外孫奉祀)를 하며 보성읍 담안에서 살게된다.
광주이씨 5세 이세정(李世貞, 1461∼1528)은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광주이씨 4세 광원군(廣原君)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의 셋째 아들로 호남관찰사를 지낼 때 고을을 순시하던 중 보성 한실(현 보성군 조성면 대곡리 한실마을)에 살던 부호로 전주이씨(全州李氏) 종실(宗室) 임성부수를 지낸 이언정(李彦廷)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는 아들 두지 못하고 외동딸 만 두고 있어, 그의 다섯째 아들 이수완(李秀莞)이 미혼이어서 혼인을 하게 된 인연으로, 전주이씨 집안의 외손봉사(外孫奉祀)를 하며 보성 한실과 강골마을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두 대에 걸쳐 한실의 전주이씨와 보성 담안의 죽산안씨 외손봉사를 통해 광주이씨는 보성에서 반명한 가문으로 자리 잡게된다.
광주이씨의 최초 입향 후 현재까지 4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의 맥을 이어온데다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명당의 양택길지요건을 갖춰서 그런지 몰라도 배출된 인물 또한 계승되고 있다.
이태용 선생에 따르면 중요민속자료 157호로 지정된 이금재 가옥과 159호로 지정된 이용욱 가옥, 중요민속자료 160호로 지정된 이식래 가옥 등으로 미뤄보면 만석지기의 재력가가 배출되고 왕조시대 명문가로 자리잡은 유적을 엿볼수가 있다.
조선 현종때 이재 이진만 선생이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해 현재 중요민속자료 162호로 지정받은 ‘열화정’은 이진만 선생의 손자 이방희가 당대 석학 이건창과 학문을 논했던 곳으로 한말의 의병으로 유명한 이관회, 이양래, 이웅래 등을 배출했다.
현대들어 한국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이중재 4선 국회의원과 그의 장남 이종구는 국회의원으로 활약중이다. 차남 이종욱은 외국어대 학장을 역임하고 그의 아들은 사법고시에 합격해 연수중이라고 한다.
이중재 전 의원의 3남 이종오는 사시에 합격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역시 서울대 법대에 재학중이다.
최근 대법원장에 오른 이용훈도 강골 태생이다. 이용도 의학박사는 서울대병원에서 의술을 펼치고 있으며 그외 정계, 경제계에서도 고루 활약하는 인물이 상당수에 이른다.
이런 인물 배출은 강골터의 명당 기운을 타고 났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교육계의 인사중 안용백 전 전남교육감, 안준 전 광주시교육감, 안순일 광주시교육감도 보성출신이다.
보성지역도 산세의 기운이 중후하고 아름다워 크고 작은 음택명당이 많기로 소문난 지역이다.
그런데 보성도 고흥과 마찬가지로 호남대지 56대 혈에 드는 음택대지는 한 곳도 기록되지 않아 의아심을 떨칠 수 없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 영역에 큰 획을 그었다고 알려진 일지스님이나 일이스님이 엮어 전해오는 활산활수의 결록에는 3개혈의 대혈이 실려 있고, 또 다른 결록에도 보성지역에 결지된 음택명당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히 삼우당에서 펴낸 장택결의 갈형장에 소개된 명혈만도 60여곳에 달한다.
보성읍을 중심으로 10리 거리의 안치(기러기재) 인근에 맺혀 있다는 비학상천형을 비롯, 보성읍에서 동쪽 50리에 소재한 열개치 부근 갈마촌 윗쪽에 몸을 감춘 단봉함서형, 낙안 서쪽 20리 거리에 자리잡은 금계두월형 등 대지에서 부터 작은 혈에 이르기까지 널리 자리잡고 있다.
필자는 이런 수없이 많은 명혈을 모두 간산하고 싶은 충동이 일지만 몇몇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음택명당을 간산하고 그 소감을 쓸까 한다.
특히 박실터를 자상하게 일러준 양동기 선생의 안내로, 겸백면 수남리에 소재한 광주이씨 입향조인 이수완의 유택인 비오탁시형(飛烏琢屍形)을 둘러봤다.
이 산소의 발음에 의해 보성땅에 들어온 광주이씨가 번성해 이른바 향반으로 근거를 확보하게 된 명당이라고 회자되고 있어 이미 검증된 명혈대지로 여겨진점이 필자의 발걸음을 유혹했다.
목포-순천간 고속화도로를 타고 보성읍을 지나 순천방향으로 10여분을 달리다 보면 기러기재를 넘게 된다. 기러기 휴게소를 왼편에 두고 곧바로 오른쪽에 쇠실 쉼터를 지나면 기러기재의 내리막길이 끝나고 겸백면으로 통하는 845번 지방도로를 따라 좌회전해 나아가면 박실터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있고, 얼마되지 않은 곳에 호남권에서 가장 오래된 보성강수력발전소가 보인다.
이곳에서 약 4㎞를 달려가면 겸백천을 건너는 교량이 나오는데 수남리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거기서 우회도로를 타고 산골길을 2~3분 달려가면 마을이 왼쪽에 보이고 그 마을에서 500m를 더 나아가다 오른쪽 산 모퉁이를 돌아가면 예의 그 산소와 제실이 나타난다.
필자가 전에 없이 간산코스를 자세히 소개한 이유는 풍수지리에 관심이 있거나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동호인들에게 한번쯤 답산해 보기를 권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산소는 필자가 늘상 강조해온 용진혈적은 말할 것 없고 혈 주위의 보국과 수세 또한 조화롭다.
<산도>에서 보듯 이 명당을 결작하기 위한 내룡맥부터 주룡(혈을 짓기 위해 내룡한 맥)의 윤서와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
장흥땅의 제암산, 사자산의 정기를 가득 품고 달려온 보성지역의 간룡이 줄기차게 이어져 해발 667.5m의 일림산을 거친 후 활성과 봉화산, 미력면의 배각산과 반성산을 뛰어 넘어 방장산을 추켜 세우고는 이내 556.9m의 우람한 주월산을 세운다.
주월산에서 한자락 대지룡맥이 크게 우선으로 회두해 수남리의 원수남마을쪽으로 주룡맥을 이룬다. 이 산이 곧 비오탁시형의 음택명당을 결작시키기 위해 한껏 정기를 응축하고 세워진 진산이자 본원이 되는 태조산이다.
500고지와 400고지, 그리고 300고지의 조종산을 차례로 세우면서 기복과 위이를 거듭하며 행룡하는 기세는 가히 대지명혈을 짓기 위한 용맥임을 예측하게 한다. 큰 자리를 만들려는 용맥은 언제나 그 연원이 확실하고 매조지되는 끌탱이가 분명한 법이다.
이 묘터도 마찬가지다.
주월산으로 부터 내려오는 용맥과 성신은 작혈의 연원으로서 손색이 없고, 그렇듯 역동적인 내룡맥은 마치 소명을 완수하려는 듯 마무리의 기지맥지의 혈장에 청기를 오롯이 응결시키고 있다.
움직임이 있으면 고요함에 이르러 땅의 기운을 서리게 하는 이치가 간산의 9대 강령의 하나인 동·정임을 일깨워 주려는 듯 영락없는 그 본보기를 간직하고 있다.
혈장에 이르는 마무리 용맥의 교도(용맥이 박환하며 각도를 이루는 형세)는 굽이 굽이 내룡한 생기맥의 결과를 헛되지 않게 하려는 자연산세의 본태성에서 일까.
시계바늘 반대방향으로 선회하는 이른바 우선 작국에 따라 남남서의 용맥에서 남맥의 용맥으로 머리를 틀어 행룡해 오는가 싶더니, 이내 동동남의 용맥으로 살며시 내려 앉아 100여평 남짓한 당판을 만들고는 남은 기운이 내려서는 여기(餘氣)를 끝으로 비탈을 만든 뒤 그 강세룡의 일생을 마감한다.
풍수지리학의 24산 설리결(24 방위별로 혈장에 이르는 마무리 내입수룡의 성정에 따라 물형의 형상을 설정하는 이치)에 손맥이나 그 좌는 교룡(도룡룡)으로 비교됐듯이 산소를 쓰기 위해 마무리된 혈장은 마치 도룡이의 몸통처럼 두텁고 풍부하며 길게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우선룡의 진맥이 매조지를 했으니 지기를 갈무리 하듯 와형(땅기운을 깊게 갈무리 하듯 도두룩하게 짜인 형세)으로 작혈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리잡은 혈장에 쓰여진 산소의 배치를 보고, 맨 윗쪽 외조모 산소와 중간의 이수완 입향조 산소가 납득하기 어려운 거리의 간격을 두고 쓰여진 점이 의아스러웠고, 풀어야 할 궁금증으로 떠올랐다.
상단의 산소와 중단의 산소사이에 족히 두 봉분의 산소를 쓸 수 있는 공간이 드넓게 비어있는데, 왜 그곳을 남겨두고 아래로 치우쳐 중대의 묘소를 재혈했을까.
필자가 이 음택의 간산을 권하는 한 가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난해하고도 깊은 학리적 요인을 여기에 모두 적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유를 어렴풋이 깨우친 필자는, 이곳에 소점해준 그 당시 어떤 지사는 도선국사가 명당요건 마디마디에 “호리의 오차(떨끝 만큼의 잘못된 차이)를 범하면 멸문지화를 면키 어렵다”는 깊은 뜻을 헤아리기라도 했을까.
오묘하고 심오한 풍수지리학의 진수가 재혈(산소를 쓸 자리를 정확하게 정함)에 있음을 실제적으로 제시해준 하나의 표본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간산을 권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산소를 옹위해 주는 국세의 짜임새와 안산과 조산의 어울림, 그리고 그 수려함이 넋을 잃게 한다는 점이다.
혈전에서 합수된 물이 구곡수를 이루며 교쇄된 내외 청룡 백호사이로 빠져나가는 수세도 그렇거니와 도지목(나무를 눕혀놓은 형국)의 안산은 마치 시신이 누워있는 모습이며 그 높이도 알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