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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성탄절 예배설교.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 중에 평화 (누가복음 2장 8~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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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기쁨과, 복음의 좋은 소식이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과, 삶의 일 터 위에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탄절에는 어김없이 거리마다 캐롤송이 울려 퍼집니다. '캐롤(carol)'이라는 영어는 '기쁘게 노래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캐롤의 유래는 노래가 아니고 춤이었습니다. 중세 프랑스 남부 사람들이 축제 때 둥글게 원을 만들어 추던 원무 (圓舞)를 일컬어 ’카롤르(carole)'라고 했습니다. 실제적인 캐롤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코라우리엔-choraulien’이라는 단어인데, 이는 피리(aulien)부는 소리에 맞추어 춤(choros)을 추는 동작을 말합니다. 결국 캐럴의 원형은 전라도의 민속놀이 ‘강강수월래’처럼, 축제 때 모여서 마을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함께 춤추던 집단 군무를 위한 노래나 음악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캐롤의 의미로, ‘노엘(Noel, 기쁨의 외침)’이라고 부르고, 독일에서는 ‘바이나흐트 리트-Weihnacht Lied’,(성탄 전야의 노래-Christmas Eve Song) 라고 부릅니다.
기네스북을 보면 지금까지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캐럴은 미국의 인기 영화배우 겸 가수였던 ‘빙 크로스비(Harry Lillis "Bing" Crosby, 1903-1977)’가 발표한 ‘화이트 크리스마스 (White Christmas)’입니다. 이 곡은 대중가요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고, 실제로 교회에서 가장 많이 부르는 곡은 아마도 이 곡일 텐데, 이 캐롤송의 유래를 말씀 드립니다.
1800년대 초 오스트리아의 음악도시 ‘잘츠부르크’에서 20km 정도 떨어진 ‘오베른도르프’라는 시골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의 ‘성 니콜라우스 교회’에 요제프 모어(Joseph Mohr)라는 가톨릭 사제가 있었고, 그 교회에는 초등학교 음악교사였던 ‘프란츠 그루버(Frantz Gruber)’라는 오르간 반주자도 있었습니다. 1818년 크리스마스 축제를 얼마 앞두고, 당시 26세였던 모어 신부는 반주자인 그루버에게, 성탄 전야에 모여들 마을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무엇인가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에 대해 그루버도 좋은 생각이라며 찬성을 했고 이 제안은 곧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모어 신부는 모든 사람들이 조용하게,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기로 생각하고, 그가 그 동안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느꼈던 감정을 토대로 노랫말을 만들었습니다. 모어 신부는 이 노랫말을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 그루버에게 전하면서 두 명의 솔로, 그리고 기타반주를 곁들인 합창에 맞도록 곡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노랫말을 받고 난, 그루버는 그의 탁월한 음악 소질을 발휘하여 그날 밤으로 곡을 만들었습니다. 이 곡은 성탄전일의 조용하고 거룩한 뜻을 담고 있는 가사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이 곡의 이름은 ‘스틸레 나흐트 하일리게 나흐트-Stille Nacht Heilige Nacht)’ ‘Silent night holy night-고요한밤 거룩한 밤’이었습니다.
미국'성공회, 뉴욕 삼위일체 교회의 프리먼 영 주교(Bishop John Freeman Young)가 1859년 노래를 영어로 번역하여 발표한 곡이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캐롤은 오늘날 약 140개의 언어로 불리워지고 있고, 2011년 3월에는 유네스코 선정 인류 무형문화유산(Intangible Cultral Heritage)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 캐롤송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명한 일화들이 있습니다. 전쟁 당시 시베리아의 어느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전쟁포로들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일제히 이 캐롤을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듣고 있던 소련군의 포로수용소장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서툰 독일어로 포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밤 나는 전쟁이 일어난 후 처음으로 당신네들과 내가 적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일화는, 1914년 프랑스, 영국, 독일 군이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서부전선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전쟁터에도 어김없이 성탄 전야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이날은 인류의 전쟁역사에서 가장 특별한 날로 기록될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날 독일군 참호 속은 춥고 축축한 장소였지만,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양초를 켜고 자그마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 독일군 진영에서 베일린 오페라 하우스 주역 테너 출신 병사가 캐롤송을 부릅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잔다”
노래가 울려 퍼지자 프랑스군, 스코틀랜드 연합군 지역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독일군 테너는 작은 크리스마스트리를 들고 참호 밖으로 나와 큰 소리로 노래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상대 진영에서 스코틀랜드 병사의 백파이프가 ‘경배하세’라는 찬양의 전주를 연주하자 독일군 테너는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테너의 독창은 대치하고 있던 양국 참호 속에서 합창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병사들은 참호 밖으로 나와 각국의 언어로 크리스마스인사를 합니다. 영어로, “메리 크리스 마스”, 프랑스어로, “주아유 노엘(joyeux Noel -joyful Christmas)”, 독일어로, “프뢸리히 베인아크텐(Frohliche Weinachten)” 서로서로 축복의 말을 건네면서, 총을 내려놓고 손으로 악수를 건넵니다. 욕설을 퍼붓던 입으로 행복한 크리스마스 인사를 하고, 서로 죽이려고 총을 쏘아대던 손으로 화해의 악수를 합니다. 물론 이 아름다운 장면은 단 하루 동안만 일어난 일입니다. 다시 전쟁으로 돌아간 군인들은 지루한 4년간의 전쟁을 더 지속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하늘에서는 영광으로, 땅에서는 평화로 나타난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탄절에는 단지 캐롤송 하나가 울려 퍼지기만 하여도 피를 흘리며 죽이고 죽어야 하는 끔찍한 전쟁까지도 즉각 멈출 수 있는 평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의 평화를 주시려고 오심이 분명합니다. 화해하고, 용서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따뜻한 나눔을 누리는 평등한 세상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가장 선결 조건은, 평화의 원천이신 우리 주님과 가장먼저 화목의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구속함으로 화목의 조건은 완전해 졌습니다. 우리가 마음만 열면, 우리는 평화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과 영원토록 화목의 관계, 샬롬의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낮고 천한 곳입니다. 상처와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낙심과 포기가 있는 곳입니다. 분쟁과 다툼이 있는 곳입니다. 불평등과 차별이 있는 곳입니다. 죽음과 공포가 있는 곳입니다. 세상의 이 모든 상황은 사실 인간이 만든 것들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변형되어, 대립과 갈등 속에서 나타나는 사회 현상입니다. 예수님은 깨지고, 어그러진, 이 세상 곳곳에 임하셔서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더럽고 추한 땅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우리가 그 나라의 주인공인 백성으로,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임보(林步, 본명 강홍기 1940-) 라는 시인이 쓴 ‘그런 세상’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읽어 드립니다.
“그런 세상” 『청소부의 월급봉투가 구청장의 것보다 더 두둑하고, 근로자의 승용차가 사장의 것보다 더 고급일 수도 있는 그런 세상 / 국회의원 입후보자가 없어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입후보자 모집 가두 캠페인을 벌이는 그런 세상 / 아침마다 신문이나 방송의 톱뉴스는 예술인들의 신작 발표 행사로 장식되는 그런 세상 / 노인이 되어도 서럽지 않은, 아니 노인이 빨리 되고 싶어 머리를 허옇게 탈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어른들이 대접받는 그런 세상 / 대통령의 연두교서, 법원의 판결문, 국회에서의 질의응답, 모든 법전들이 시로 이루어진 그런 세상. (시를 모르는 자들은 참 괴롭기도 하리) / 은행원들이 대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보너스를 걸고 선전하는 그런 세상 / 하루에 2시간 수업, 나머지는 여행으로 학점을 따는 그런 학교만 있는 세상 / 전철의 선반에 두고 내린 물건이 한 달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 있는 그런 세상 / 울타리가 없는 세상 / 경찰관들은 할 일이 없어 매일 낮잠이나 자고, 교도소는 여행자들을 위한 무료 국영호텔로 개조되어 가고 있는 그런 세상 / 그리고 참,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세상』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세상 풍경입니다. 우리 인간은 악하고 죄를 짓고 살아도 마음 한 구석에는 어떤 아름다운 세상을 동경하고 그리워합니다. 그 세상은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을 누비며, 함께 걷고, 대화하고, 웃고 지냈던 바로 그 시간의 세상입니다. 이제는 죄악으로 인해 그 세상이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지만,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다시 보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열어 주신 새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그 나라가 눈에 보이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시는 주인이요, 주권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고 싶어서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매일 같이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임보 시인이 “그런 세상”을 시로 표현 했듯이, 저도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지내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는 평화의 세상을 꿈꾸어 봤습니다. 제가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습니다.
『성경 말씀이 항상 재미있고 신비한 비밀을 알게 해주어, 읽을 때마다 눈이 번쩍 번쩍 뜨이는 짜릿한 감동을 느끼는 하나님의 나라 / 예배를 드리면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이 손을 흔들어 웃고 계시는 모습을 보고 감격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 / 기도를 하면 세상 근심 다 사라지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더욱 더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 / 찬양할 때 십자가의 은혜가 벅차올라 감사함의 눈물이 주룩 주룩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나라 / 교회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봉사하는 일이 늘 기쁘고 행복함을 느끼는 하나님의 나라 \ 구원 받지 못한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전도하기를 계속 시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 / 죽음을 준비하면서도 조금도 두렵거나 떨리지 않고 기대와 소망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 / 열매 없음을 늘 부끄럽게 여기고 예수님 앞에 섰을 때 흠이 없는 자로 서기를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하나님의 나라....』
어떻습니까? 성경 말씀, 예배, 기도, 찬양, 교회, 구원전도, 죽음, 열매... 이런 것들은 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신앙의 생활의 자세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데 있는 것도 아니요, 어렵게 들어가야 하는 시험을 봐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평화를 주시러 오신 예수님만 제대로 알면 됩니다. 그 분을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그 분이 내 안에, 내가 그 분 안에 거하면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게 되면,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한 능력과 풍성함을 가득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기본중의 기본도 지키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어떤 평화도 얻을 수 없습니다, 불행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실 때입니다.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많은 자들이 하루속히 예수님의 평화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 받은 것을 감사하고, 하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신자면, 예수님이 주신 평화를 절대로 깨트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없이, 듣는 것를 너무나도 싫어하고, 귀찮아합니다. 아무리 말해도 우리들은 또 걸려 넘어지고 참 바보처럼 후회만 하는 시간을 보내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가면 실패, 실패, 또 실패의 상처만 남게 됩니다. 그런데도 돌이키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시겠습니까? 이 성탄절에,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며 눈물 흘리시며 하나님 아버지께 중조자로 일하시는 우리 예수님을 다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임보 시인의 한 편의 시를 더 소개하고 마치려 합니다. 시의 제목은, “마누라 음식 간보기” 라는 시입니다.
“마누라 음식 간보기”, 『아내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 때마다 내 앞에 가져와 한 숟갈 내밀며 간을 보라한다 / 그러면 “음 맞구먼 맛있구먼” 이것이 요즈음 내가 터득한 정답이다 / 물론 때로는 좀 간간하기도 하고 좀 싱겁기도 할 때가 없지 않지만 만일 “좀 간간한 것 같은데” 하면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나서 “뭣이 간간허요 밥에다 자시면 딱 쓰것구만” 하신다 / 만일 “좀 삼삼헌디” 하면 또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나서 “짜면 건강에 해롭다요 싱겁게 드시시오”하시니 할 말이 없다 / 내가 얼마나 멍청한고 아내 음식 간맞추는데 평생이 걸렸으니 정답은 “참 맛있네”인데 그 쉬운 것도 모르고』
시를 참 재미있게 쓰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도 그 쉬운 것도 모르고 참 바보처럼 살아갑니다. 우리 입맛에 딱 맞게 매일 같이 고급스런 음식을 가져다주시는 예수님을 외면만 합니다. 평생 무료 배달 해주시는데도 그 좋은 음식을 받아먹지 않고 세상에 나가 이것저것 불량식품들을 마구 마구 먹어댑니다. 배탈 나고, 몸이 허약해진 인생 막판에 와서야, “예수님이 주신 것만 먹을 껄, 그 맛있는 것도 모르고, 정답은,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 참~맛있네 인데 그 쉬운 것도 몰랐구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눈에 좋은 것이 많아 보이지만 그것들은 다 우리를 속이는 허상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 가려는 유혹과 시험이 판치는 악의 소굴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돈이면 인생 한방 일 것 같지만, 돈이 우리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도 명심 하십시오.
우리는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는 기쁨과 소망으로 채워 주십니다. 기쁨의 좋은 소식, 복음을 들은 성탄의 아침에 우리 모두가, 우리 예수님과 영원히 손잡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이 땅에서 평화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천국 백성,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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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영원토록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도록 도와 주셔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살아가도록 새 마음을 가득하게 채워 주옵소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