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로운 체험 의례, ‘연등 축제’
통도사 연등.
내 등(燈)은 내가 지킨다
이삼십 년 전만 해도 부처님오신날이면 목욕재계한 신도들이 하루 전날 절에 와서 밤새워 기도하는 문화가 있었다. 당시에는 전기로 등을 밝히던 시절이 아니었고, 등 안에 초를 꽂아 불을 켰으니 화재의 위험 때문에 ‘법당 등’의 개념도 없었다. 따라서 전날 밤부터 대웅전 앞마당에 등을 달았는데, 그들은 법당에서 기도하지 않고 돗자리를 펼쳐놓은 등 아래서 밤을 새웠다. 바람이 불면 두 손으로 불이 꺼지지 않도록 보듬어, 밤새 자신의 소망이 담긴 등을 지키며 기도한 것이다.
인근 부석사에서도 철야기도를 하며 부처님오신날을 맞았다. 2009년의 경우, 초칠일 저녁부터 수백 명의 신도가 무량수전에서 저녁예불을 올리고 기도에 들어 3시에 새벽예불로 부처님과 만났다. 봉축법요식과 법문을 들으며 산사의 하루를 보낸 뒤, 황혼이 찾아들 무렵 경내를 뒤덮은 등에 일제히 불이 켜졌다. 자신의 발원에 불을 밝힌 듯, 환희로운 탄성과 함께 범종루와 안양루 아래까지 빼곡히 자리한 신도들의 ‘석가모니불’ 소리가 봉황산에 울려 퍼졌다.
이어 저마다 등을 든 이들이 기도하며 무량수전 앞마당의 팔각석등을 돌기 시작했다. 이 석등은 창건 당시의 것으로, “부석사 석등을 백 번 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담론과 함께 ‘등(燈)을 들고 석등(石燈)을 도는’ 아름다운 행렬이 이어졌다. 이윽고 사자좌에 오른 조실스님의 법문을 마음에 새기며 늦은 밤에야 신도들은 산문을 나섰다.
봉정사와 부석사의 부처님오신날 맞이는 신앙공동체의 지극한 정성과 환희로운 축제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렇듯 깨어있는 몸과 마음으로 경건하게 부처님을 맞는 모습은 한국 불자들의 전통이었다. 이러한 축제 속에 등을 밝히는 연등(燃燈)이 정점을 이루어, 부처님오신날의 의식을 ‘연등회’라 부르는 것이 참으로 타당하게 여겨진다.
등을 밝히는 시간은 해가 지면서부터이다. 봉정사는 전날 저녁에, 부석사는 당일 저녁에 불을 밝혔듯이 어둠과 함께 점등(點燈)이 이루어지면서 종교적 체험은 고조되게 마련이다. 신라 탑돌이가 밤늦도록 이어졌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전통적으로 축제적 탑돌이 또한 날이 어두워지면서 본격화되었다. 탑돌이가 밤에 행해졌다는 사실은 연등과 짝을 이룬 것임을 말해준다.
신도들은 밤새워 기도하는 시간 중에, 등을 든 채 포행을 겸하여 경내를 돌거나 탑을 돌기도 한다. 어둠이 뒤덮인 가람에 오롯이 깨어 자신의 소망을 밝히며 걷는 일은 성스러운 시공간에 놓이는 의식이다. 그러한 체험은 삶의 가장 소중한 순간의 하나로 각인되어, 언제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빛이 될 법하다.
봉황산을 환히 밝힌 부석사 연등.
연등과 민간축제의 결합
인간이 불을 다루기 시작한 이래, 의식이나 놀이로써 불을 밝히는 문화가 동서고금 없이 상징적 행위로 전승되어왔다. 불은 태양ㆍ밝음과 연결되는 강력한 상징물이기에 ‘불의 문화’는 그만큼 뿌리가 깊고 광범위하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 권위와 파괴력을 지닌 원시적 상징성이 크다면, 인간은 등(燈)이라는 ‘문화화된 불’을 통해 불의 또 다른 상징성을 공유해왔다.
특히 등을 밝히는 의식은 불교와 짝을 이루어 전승되어온 역사가 깊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면서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는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의 가르침을 남겼듯이, 등은 무명을 밝히는 지혜를 상징한다. 이에 이른 시기부터 연등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행이자 중요한 공양으로 정착되었고, 초기 경전인 〈증일아함경〉을 비롯해 수많은 경전에서 등 공양의 공덕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이처럼 부처님께 일상적으로 올리는 연등 공양이, 중요한 불교행사에서 축제적 연등회(燃燈會)로 확장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5세기 초 구법 순례에 나선 중국 동진의 법현(法顯) 스님은 당시 인도의 부처님오신날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에 따르면 장엄하게 꾸민 거대한 행상(行像) 수레에 불상을 모신 채 가두행렬이 펼쳐졌고, 왕과 백성들은 부처님께 꽃과 향을 바치며 밤새 연등과 기악ㆍ연희로 공양했다는 것이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정월보름에 불을 밝히는 민간의 풍습과 불교의 연등이 깊이 결합하게 된다. 중국의 경우 6~7세기에 인도의 영향을 받은 행상 공양의 기록이 등장하고, 정월 보름날 대로에 등을 밝히며 연등축제를 즐겼다. 이때 ‘등수(燈樹)’라 하여 거대한 나무에 가지마다 수백 개의 등을 밝혔는데, 부처님을 찬탄하는 돈황 벽화에 이 모습이 그려져 있어 불교와 깊이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연등회의 역사는 고려 초부터 정월보름에 이어온 국가의 연례행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민간과 사찰에서는 훨씬 이전부터 연등 풍습이 성행하고 있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866년에 신라 경문왕이 대보름날 황룡사로 행차하여 등을 구경하고 백관에게 잔치를 열어주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진성여왕 때의 연등 기록도 있어, 고려의 국가행사로 정착하기 전부터 이미 사찰에 대보름 연등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신라의 사찰은 물론, 고려 연등회를 불교력(佛敎曆)과 무관한 정월보름에 연 것은 민간의 ‘대보름 불문화’와 관련이 깊다. 농경사회의 정월보름은 대축제의 날로, 일련의 불놀이를 하며 풍농을 기원하고 삿된 것을 물리치는 풍습이 광범위하였다. 대보름 연등은 가장 밝고 풍요로운 보름달 아래 불을 환히 밝힘으로써, 만월의 풍요와 재생을 지상으로 옮겨놓기 위한 공동체의 기원을 담고 있다.
그 뒤 1010년에 현종은 2월 보름으로 연등회의 날짜를 바꾸어 고려왕조의 마지막까지 이어가게 된다. 이날은 부처님 열반일이자, 2월이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는 농경축제의 기간이라는 점도 중요했을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연등이 민간의 축제와 결합하는가 하면, 조선시대에는 사월 초파일이 ‘연등’을 기반으로 온 백성이 공감하는 축제의 날로 자리 잡게 되었다.
부처님오신날 제등행렬의 탄생불.
부처님의 가르침 새기는 연등의 축제성
“수많은 등불이 하늘에 이어져 마치 대낮처럼 밝구나.” 고려의 문신 최자(崔滋)가 연등회를 노래한 글이다. 고려 연등회는 소회일ㆍ대회일로 나누어 이틀간 이어졌는데, 도성에 통금을 해제하고 밤새 등을 밝혀두어 이를 즐기는 관등(觀燈) 행사가 곳곳에서 펼쳐졌다. 〈고려사〉에 “선비와 부녀자들이 거리가 미어지게 나와 서로 축하했다”고 했듯이, 백성들은 밤늦도록 야산에 올라 불야성의 축제를 즐겼다. 조명이 열악하고 통금이 철저하던 시대에 환한 밤이 열렸으니 연등회는 그야말로 비일상의 축제일이었을 것이다.
임금은 궁궐에서 일련의 의식과 무대공연을 마치고 나면, 수천 명을 대동한 행렬을 이루어 개경 봉은사(奉恩寺)로 행차하였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세상을 떠나기 전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연등회와 팔관회를 이어가도록 당부하면서, ‘연등은 부처님을 섬기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에 태조의 진영을 모신 사찰에서 불공을 올리며 나라의 평안을 기원한 것이다.
행렬은 동서고금 없이 축제의 백미이다. 당시 의례공간으로 연결된 궁궐과 사찰 간의 거리는 3km 정도로, 개경에서 향읍에 이르기까지 환한 등이 거리를 밝힌 가운데 대규모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다. 행렬을 따라 풍악과 연희 가무가 따르며 도성 전체가 연행공간이 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축제의 주요요소를 행렬에 집약시킨 다채로운 길놀이 문화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준다.
오늘날의 연등회에서도 행렬이 핵심을 이루듯, 고려 연등회 또한 축제에 가장 부합하는 의식이 바로 행렬이었다. 풍부한 시청각 요소와 함께 이어지는 행렬은 공동체 전체를 축제 분위기로 조성해주며, 백성들도 그 뒤를 따르며 행렬은 더욱 길어지게 마련이다. 특히 법왕(法王)인 부처님과 세간의 왕인 임금을 연결함으로써, 연등회가 나라와 백성을 위한 불교축제임을 깊이 체감했을 법하다.
고려의 국가 연등회는 정월ㆍ이월 보름에 봉행했지만, 사찰과 민간에서는 불교 명절인 부처님오신날에 집집이 등을 밝히는 ‘초파일 연등’ 또한 전승되고 있었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국가 연등회는 폐지되었으나, 초파일은 민간의 명절이 되어 연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놀이와 풍습이 전승되었고, 언젠가부터 ‘연등회’는 ‘초파일’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이처럼 등을 밝히는 문화가 불교의 연등과 결합하고, 부처님오신날을 중심으로 결집해온 역사를 살필 수 있다. 온 백성이 공감하는 기반 위에 전승되어왔기에 연등회의 의미는 더욱 소중하다. 따라서 근현대에 와서도 연등회는 종교를 초월해 감동을 주는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전통시대에 집집이 달던 등이 오늘날의 다종교사회에서는 사찰과 축제공간으로 나오고, 지역마다 연등 행렬이 이어지면서 공동체의 평안을 기원하는 전통축제의 환희로움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등회의 가치는 부석사ㆍ봉정사의 사례처럼, 사찰마다 등을 밝히며 이어온 불자들의 신심과 정성이 가장 튼튼한 기반을 이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지극한 마음이 모여, 세계를 감동케 하는 환희로운 불교축제의 동력이 되어온 것이다.
현대불교 구미래 소장 hyunbulnews@hyunbul.com 기자의 다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