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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개설
마태복음 5장 1~2절 (누가 6:17, 10 전반)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생애는 출생, 세례, 시험, 전도의 출발, 제자 선택, 전도 개관을 거쳐 5장부터 본격적인 전도 활동에 접어든다. 마태복음 5, 6, 7 세 장은 산상수훈으로 불리는 예수의 말씀, 특히 윤리·도덕적인 교훈이 대규모로 한데 수집되어 있다.
예수의 생애는 크게 말씀, 행적, 죽음으로 삼분 되는데, 마가복음은 로마인을 대상으로 한 로마적인 복음답게 예수의 생애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기사가 행적 중심으로 전체 빠른 속도로, 동적으로 진행된다. 한편 누가복음은 희랍인 상대의 복음으로 희랍적이며 필법이 대단히 정교하면서도 정적이어서, 보통 인도적인 복음서로 불린다.
이에 비해 마태복음은 로고스적이다. 즉 말씀에 기반한다. 사상적, 신학적인 복음으로 불린다. 마태가 연대순으로 첫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누르고 4복음서의 첫머리에 놓여 고래로 복음서의 왕자로 불리는 이유다. 기독교 미술에서 마태는 날개 달린 천사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천지를 관통하는 말씀, 신의의 계시, 전달자의 지위를 표시한다. 마태복음이 말씀의 복음서가 되는 이유다. 유대인 상대의 복음으로서 바울의 말처럼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로써 하는 예수의 메시아성의 변증이자 주장이요, 호교적인 투쟁서이자 논쟁서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복음서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면 요한복음을 택하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로 요한복음에 기적이 적고, 전체가 말씀 중심으로 진리로써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른바 기적교가 아니다. 말씀 즉 진리의 종교다. 우리는 기적 때문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 그의 진리성 때문에 이를 믿는다.
그와 2천 년을 격한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물론 하나님의 아들인 그에게 모든 기적이 가능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훗날 자기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더욱 행복하다고 했는데, 역시 이 말씀의 진리성에 의한 믿음을 말한 것이다(요한 20:29).
예수 당시 그의 기적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은 건 절대 아니다. 도리어 이 때문에 그는 죽었다. 요한복음은 나사로의 부활이 그의 십자가 죽음의 서곡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1:53). 기적이란 사람의 양심보다 욕심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예수 당시 군중은 그의 기적을 세속적인 행복의 수단으로 이용했으며, 종교가들은 이를 질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렇다 진리만이 양심을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는 양심 이상으로 영혼의 종교이며, 이것이 또한 기독교가 진리의 종교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다. 그리고 말씀 중심인 요한복음의 위대가 여기에 있다.
사람의 생명, 진리로서의 예수의 말씀은 이후 개인과 민족,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무한히 확대, 전개될 성질의 것이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독교사의 진정, 특히 종교개혁자들의 활동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초대 교회에서 사도행전 초기 이후 벌써 기적은 사라지고, 바울에 의해 순 말씀 중심의 선교가 시작되었으며, 이어 순 말씀 중심의 선교가 시작되었고, 뒤이어 또한 순 영적인, 로고스적인 요한복음서가 배출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뱅, 우치무라 등 위대한 개혁자들에 의한 방대한 성서 연구, 주석 등 저작 사업이 있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기독교 출발 및 이의 서방 세계 진입과 더불어 인류사, 각별히 서양 역사는 이 하나님의 말씀과 흥망성쇠를 같이 했다.
헤겔은 국민의 신에 대한 사상으로 국가, 민족의 위대가 결정된다고 했다. 근대의 영국과 독일 양국의 철학, 문학 등에 대한 공헌과 더불어, 성서적·신학적 노력에서도 이들이 인류의 중심이 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이 또한 그들의 현실 역사의 지위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상 프로테스탄트적인 성서 운동에 대하여 가톨릭주의의 조직과 교리와 의식 등에 의한 비진리성, 비신앙성을 지적할 수 있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양극적인 현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더욱이 소련의 무신론 과학 문명은 향후 역사에서 제2의 이슬람 문명 이상은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입교 1세기에 신앙 문학 하나, 똑똑한 성서 주석 하나 배출하지 못하는 우리의 기독교 현실을 생각할 때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적 무능, 진리에 대한 무력을 말해준다. 신앙의 진정한 외적 발현 역시 진리의 깊은 내적 이해와 생명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
이제 돌이켜 산상수훈을 돌아볼 때, 이것은 인류 최대의 교훈이자 사상이며, 최고의 윤리, 가장 깊은 도덕임을 부인할 수 없다. 고래로 산상수훈의 위대성은 인정하면서도 유교나 인도 사상 또는 유대교와 관련지으며 이의 독창성을 부정하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정확한 관찰이라고 할 수 없다. 아니 피상적 관찰임을 면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산상수훈의 황금률은 공자의 소극성에 대비되는 적극성을 보여주며, 그 본질과 결과에서 천양지차임을 많은 이들이 인정하고 있다. 또한 간디의 무저항주의가 인도 재래의 종교 사상 이상으로 이 예수의 산상수훈에 근거하고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예수의 내세관 또는 생사관은 그의 부활과 더불어 분명히 되었거니와, 이는 소크라테스가 독을 마시며 생과 사 어느 편이 행복한지 알 수 없다고 말한 것과도 분명히 대비된다. 예수의 신관이 얼마나 명확했는지는, 모든 종교와 철학이 신을 하나의 원리나 법칙으로, 또는 하늘 등 추상적으로 표시한 데 비해, 예수는 이를 단적으로 아버지라 표시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의 도덕·윤리와 여타 종교의 그것 사이에도 역시 절대적인 거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게 될 것을 명하는 마태 5장 48절을 많은 사람이 수훈의 중심이라고 하는데, 이는 과연 놀라운 가르침이다. 산상수훈은 모세 율법에서 보이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하는 식의 도덕이 절대 아니다. 인류 최고의 도덕이라고 하는 모세 율법 역시 행위율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산상수훈은 도덕을 깊이 인간의 심정 속으로, 동기의 순수로, 아니 절대적으로 하나님 상대로 끌어올렸다. 즉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라고, 음욕을 품은 자는 간음자라고,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그러면 이 수훈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첫째 양심이 예민한 자들은 이에 절망을 느낀다. 또는 이것은 사람에게 불가능한 요구라고 일축하는 자들도 있다. 또는 톨스토이 같이 이를 법제화하여 정치나 사회생활에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인도주의자들도 있다. 다른 한편 이것은 하나의 도덕으로서 예수의 복음과 이질적이므로 그의 종교의 본질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실천 여부를 떠나 이를 인류의 이상으로, 목표로, 아니 신이 창조하신 인간 본래의 자태로 받아들이고 싶다. 즉 나는 사람이란 이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믿고 싶다. 여기 인간의 존엄이 있고, 위대함과 고귀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서 먼 우리의 상태란 결국 타락한 상태요, 이대로 만족할 상태도 완전한 상태도 아니다. 더욱이 나는 인류의 모든 문제가 이 산상수훈으로써 해결 못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생각하면서 더욱 이를 절감한다. 원자탄을 믿고 정치가에 의지하는 오늘날의 인류란 스스로를 모독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 이런 인류에게 산상수훈이 절망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절망을 통해 우리에게 이를 명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이때 수훈은 우리의 부도덕과 죄악에 대한 회개의 촉구로써 우리를 신앙에 이끌어가는 세례 요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수훈은 예수에게 구원받은 자, 하나님의 자녀 된 자, 천국 백성, 그의 제자, 즉 신생한 기독자들의 생활 이상, 목표, 규범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믿음에 들어간 신앙인을 이끄는 성령에 의한 생활 방향이 된다. 이의 전적 완성은 신자의 부활을 통한 저의 영육 완전한 새로운 상태에서, 또는 예수의 재림에 의한 우주와 인류의 완성에서 종말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처럼 수훈을 기독교 신앙과 관계없는, 단지 자연인에 대한 최고의 도덕으로 보고, 이를 법적으로 국가와 사회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자고 주장하는 건 종교와 도덕의 관계를 그릇 판단한 것이며 용인될 수 없다. 수훈이 높으면 높을수록, 또한 모세율 이상으로 심의율이란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오직 깊이 신앙과 관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법적 강제란 수훈에 대한 모독이며 수훈의 정신을 죽이는 일이다.
선이면 선일수록 더욱 수단과 방법도 선에 의해야 한다. 믿음과 성령으로 양심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실현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진보다. 선을 법과 강제로써 이루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인류를 영원한 유아 상태, 야만 상태에 결박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불미한 국면을 극단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독일, 러시아 양 민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톨스토이와 니체, 히틀러와 스탈린, 공산주의와 게르만적 국수주의 사이에는 본질적인 유사점이 있다.
정치에 실망한 톨스토이의 종교가 말년에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떨어진 것 또한 그의 신앙이 기독교를 잘못 이해한 데서 온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런 점은 간디 사상과 기독교 사이에도, 아니 모든 종교, 도덕, 철학, 사상과 기독교 사이에 근본적으로 개재되고 있는 문제다. 오직 기독교만이 그리스도의 속죄로써 사람의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성령에 의해 사람의 도덕을 성화(聖化), 영화(靈化)할 수 있다. 정치와 금욕, 수양, 노력 등으로 실천되는 도덕, 특히 동양 도덕이란 조화(造花)나 화분에 심은 뿌리 없는 화초처럼 생명 없고 성장, 지속성이 없다. 심지어 정치에서도 통제란 저급한 체제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도덕과 종교에서 이는 언어도단이다.
끝으로, 그러면 복음과 수훈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는 결국 수훈이 도덕이냐, 복음이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것이 절대적으로 심의율인 점에서 모세의 율법과는 다르다. 수훈의 첫머리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이것이 복음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수훈은 율법의 요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인류 구원, 그의 의, 완성, 사랑을 보여준다. 김교신 선생은 산상수훈을 예수의 자서전이라고 했다. 과연 예수야말로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희생에 의한 사죄로써, 축복으로써, 복음으로써 우리에게 산상수훈의 생활을 가능케 하는 구주(救主)다. 이상으로 산상수훈에 대한 나의 견해를 말했다. 다음으로 서론 격인 5장 1, 2절로써 학문적인 몇 가지 논의를 소개하려 한다.
1 예수는 군중을 보시고 산에 오르셨다. 가르치려고 앉으시니 제자들이 다가왔다. 2 그러니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
1절에서 보이듯이 예수는 군중을 피해 산으로 가신 모양이다. 따라서 상대는 제자 중심의 접은 범위였을 것이다. 장소는 고래로 디베리아 서쪽 하틴 산이라는 설도 있으나, 대체로 가버나움 근방 백화 만발, 뭇 새 날고 미풍 스치는 작은 언덕 푸른 풀밭 위에서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누가복음에 장소가 평지로 되어 있지만 크게 모순은 없어 보인다(6:17). 설교의 시기는 내용상 마태의 전도 초기보다는 누가의 제자 선택 후로 보는 게 좋을 듯하다(6:12 이하).
공관복음인 마태, 누가, 마가 3복음서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장단, 배치, 분포를 보면, 마태는 5, 6, 7장 세 장 전체에 116절로 가장 길고, 누가는 30여 절로 6장에서 16장 사이에 분포되어 있으며, 마가는 15절 정도로 역시 각 장에 널려 있다. 여기서 마태와 누가 어느 쪽이 원형인가, 또 양자의 차이점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대체로 마태는 말씀, 기적, 전도의 교훈, 비유, 바리새인 비판, 종말 예언 등을 일괄 수집한 것으로, 원래의 산상수훈은 누가에 더 가까웠을 거라는 학설도 있다. 벨하우젠은 대체로 누가복음을 지지하고, 하르나크는 마태복음을 지지한다.
각 복음서 차이점의 이유로는 고래로 각기 다른 상황에서의 보고일 것이라(오지안델), 같은 날 두 장소에서 말씀한 것이라(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보고에 다른 자료를 넣거나 뺐을 것이라(B. 바이스), 많은 말씀을 적당히 편집했을 것이라(칼뱅), 경구적인 말씀을 따로 수집했을 것이라(슈트라우스) 등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최근에는 마태, 누가가 사용한 자료가 벌써 각기 달리 유포되었을 것이라, 또는 누가가 뺀 부분이 있다면 희랍인 상대로 유대적인 부분을 뺐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점은 앞으로 각 절 연구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2절에서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라고 했는데, 이는 산상수훈의 위대, 장엄, 무비(無比)를 말해준다. 몬테피오레가 지적한 대로, 시내산 상의 낡고 불완전하고 가변적인 모세 율법에 대해, 수훈은 평지의 새롭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님 아들의 구원과 복음의 선포로 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