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식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육지 식물도 될 수 없는 풀이다.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살 수 없으면서 살아있는 것이 나문재이다. 새순이 나면 부드러운 잎을 잘라서 나물로 먹었는데 먹어도 남았다 하여 그렇게 불려왔다. 물속에 있으면 물고기들이, 물 밖으로 나오면 나비와 벌들이 세상 소식을 들려준다. 썰물이 되어 스르르 드러난 몸체를 곧추세워 힘껏 기지개를 켜며 바람 따라 춤을 추는 물과 물에서 버티는 양생식물이다.
마음 따로 몸 따로 살아야 했던 자들이 있었다. 남편은 집사로 약재 구입 등 바깥일을 맡고 아내는 한약방 식솔들의 안살림을 맡는 찬모였다. 만삭의 몸으로 산통을 꾹꾹 참고 일손을 멈추지 않았던 그녀는 출산이 너무 급하여 염치를 차릴 경황이 아니었다. 엉금엉금 주인의 안방으로 기어가서 아이를 낳았다. 여아였지만 주인의 방에서 태어났다 하여 대방(大房)이라 주인마님이 지어주었다.
대방은 가난했지만 잘 웃고 맏딸로 동생을 잘 건사하였다.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세워두고 우리들을 간섭하고 감시 감독했었다. 이민자 가족, 하녀, 상인들로 조선 땅과 사람들은 왜국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예쁘고 부지런한 그녀를 일본인들이 더 탐을 냈다. 일본인 미곡상이 본국으로 들어가며 양녀로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대방의, 시련의 삶이 그랬다. 같은 해에 태어난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도 금지옥엽의 몸이지만 겪었던 고초가 만만치 않았거늘, 이름 없는 백성들의 억울함은 어떻게 모두 말할 수 있겠는가?
아손이라는 독일 기자가 쓴 『100년 전의 한국』이란 책에서 기자라는 신분을 숨기고 사업한다며 한국으로 돌아와서 경성까지 달리는 기차의 시승식에 타게 되어, 며칠 동안 보게 된 경치와 풍습이 기록되어 있었다. 굉음을 내며 달리는 기차를 처음 본 사람들이 놀라서 도망치는 보습, 일본인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큰 흰옷 입은 조선인들의 선량한 눈, 순박한 모습들이 세세히 쓰여 있었다. 그와 동행한 일본 순사 간부는 미개한 조선을 이만큼 발전시켰다는 자부심으로 친절히 설명을하며 자랑을 했었다고 하였다.
미곡상의 아들은 대방의 오라비와 함께 공부한 학교 친구였다. 대방은 일본인 아들의 아내가 되어 두 아들을 낳고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지만, 일본에서 그녀는 이방인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일본인으로 호적을 바꾸어 오라며 작은 아이만 데려가게 하였다. 큰아이의 사진을 갖고, 보고 싶었던 부모도 만날 겸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설상가상 업고 온 아이가 앓다가 죽었다. 호적 정리 불가함과 자초지종을 편지로 알렸더니 답장 대신 소지품들이 소포로 보내졌었다. 그 일은 돌아오지 말라는 결별 통보였다. 죽기 살기로 이국땅에서 버텨낸 십수 년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졌다.
두분불출 눈물의 세월을 보낸 대방은 서른 살이 넘어 부모의 설득을 받아들여 재혼을 했다. (동생들의 앞날을 막아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으로) 바뀐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일본에 두고 온 아이가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 반은 그리움으로 비어 있었다. 데려오지 못한 후회와 갈 수 없는, 아니, 가서는 안 되는 절망에 빠져 웃음마저 잃었다. 먼 수평선을 자유롭게 나는 새들만 넋 놓고 보고 있었다.
재혼한 후 딸을 낳았다. 아이는 그녀의 서른여섯에 낳은 띠 동갑이 되었다. 외할머니는 “아가, 고맙다. 네가 어미를 살렸다.”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자주 했다. 사람 좋다는 소문만 듣고 애달픈 대방을 재취로 딸려 보낼 때, 잘 살아주기를 빌고 빌었다고 했다.
이이는 커가면서 몇 가지 의문이 생겼다. 멀쩡한 언니는 조카를 업고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서 왜? 자신을 중학교를 못 가게 방해 했는지, 어미는 낡은 사진 한 장을 왜? 몰래 보고 있었는지, 갓 시집온 숙모가 족두리 못 썼다고 구박해도 왜? 대방 엄마는 아무 말도 못 하는지, 너무 답답했다. 기분 좋은 저녁 어느 날 용기 내어 부탁했다.
“아버지 엄마 족두리 하나 사주지요”
“맨 날 싸워요.”
많이 비싼가? 아버지는 빈손이었다. 대방은 일흔둘에 연감과 딸의 배웅을 받으며 편안히 삶을 마쳤다. 그제야 바라만 봤던 현해탄 수평선을 마음껏 넘나들겠다.
내가 살고 있는 대연동에 일제 강제동원역사 관이 세워졌다. 늦었지만 잊지 말자는 취지로 건립된 것이다. 그곳에는 까까머리 소년들과 단발머리 소녀들을 매섭게 감시하는 일본 순사들이 서 있고, 탈취 물들인 쌀가마니와 짐 뭉치들이 배에 가득 실린 사진이 있다. 남자들은 노역장이나 전쟁터로 강제로 끌려갔고 여자들은 군인들의 위안부로 농락당했다. 좁은 숙소가 실물로 만들어져 있었다. 토 다른 조형물에는 공습을 피하는 반공호를 만들고 있는 소년들이 있고, 대피소 입구에 ‘조선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마당에서부터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은 힘들었던 삼십육 년을 버텨온 삶인 듯 가파르다. 전시실 4·5층의 한 면을 피해자들의 이름과 사진들로 꽉 채워져, 내 동포, 내 가족임을 상기시켜준다. TV에서 소녀상을 버스에 태우고 운행하는 영상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얼마나 가슴 깊이 새겨졌으면 세월이 지나도 잊혀질 수 없다고 저렇게 항거하는가.
일본에는 깨어진 도자기를 금으로 떼우고 붙여 값비싼 항아리를 만들어 명품으로 바꾸는 ‘힌주끼’라는 기술이 있다고 한다. 한 맺힌 자들에게는 상처를 아물게 하는 진정한 사과를, 지금까지 살아남은 자들을 위해서라도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힌주끼 처럼!
여름이 되면 갯물이 드나드는 그 땅에 붉은 나문재 꽃이 넓게 군락지어 핀다. 한 송이 꽃이 지면 그 꽃받침 하나가 떨어진다. 그것이 종자가 되어 짠 물과 모래밭을 둔덕삼아 벌떡 일어선다. 살아야 하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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