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톨릭문인협회, ‘내 삶의 뿌리, 문학이라는 영성’ 가을 문학 세미나 개최
허형만 시인, 시와 신앙의 만남 조명… 빛·소리·만남·은총의 신비 속에서 문학의 본질 성찰
“시를 쓴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고, 삶 속에 깃든 희망과 은총을 발견하는 일”
(사)한국가톨릭문인협회는 10월 10일 오후 2시부터 5시 30분까지 서강대학교 마테오관 204호와 성 이냐시오 성당에서 ‘2026년 가을 문학 세미나’를 개최했다.
‘내 삶의 뿌리, 문학이라는 영성’을 주제로 열린 이번 세미나는 성경 말씀인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오 복음 22장 10절)를 중심으로 문학과 신앙의 관계를 되짚고, 시를 통해 인간의 삶과 사랑, 고통과 희망, 하느님의 은총을 성찰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세미나는 시작 기도로 문을 열었으며, 최영규 예로니모 이사장의 인사말에 이어 김치헌 바오로 신부의 축하 인사가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문학이 단순히 언어를 다루는 예술을 넘어 인간의 내면을 비추고, 신앙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발견하게 하는 통로라는 데 의미를 나눴다.
이날 강연은 허형만 가브리엘 시인이 맡아 ‘시와 문학에 관한 명상’을 주제로 진행했다. 허 시인은 오랜 창작 활동과 문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시의 본질과 시인의 자세, 일상에서 발견하는 신비와 은총의 의미를 전했다.
■ 빛과 소리·만남·은총… 시인의 눈으로 발견하는 세 가지 신비
허형만 시인은 문학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 신비로 ‘빛과 소리의 신비’, ‘만남의 신비’, ‘은총의 신비’를 제시했다.
빛과 소리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듣게 하는 감각의 출발점이며, 만남은 타인과 사물,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하는 계기다. 은총은 그렇게 발견한 삶의 의미를 감사와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는 익숙한 일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무심히 지나쳤던 존재의 아픔과 기쁨에 귀 기울이게 한다. 특히 가톨릭 문학에서 시적 성찰은 인간의 유한한 삶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희망과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허 시인의 문학적 성찰은 그의 대표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자식의 회한을 담은 시 ‘문 열어라’는 세상을 향한 눈과 마음을 열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가수 장사익이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바꿔 노래하면서 문학과 음악의 경계를 넘어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시에는 낯선 땅에 아버지를 모셔 드리고 돌아온 뒤, 잠결에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잠긴 문을 열고 찬 바람 속에서 밤을 지새우는 자식의 모습이 그려진다. 반복되는 “얘야 문 열어라”라는 구절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그리고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게 되는 내면의 변화를 함께 담아낸다.
시인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을 향한 눈의 문을 열게 됐다고 노래한다. 이는 한 개인의 가족사에 머물지 않고, 타인의 아픔을 바라보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장된다.
■ 파도 속에서 발견한 눈물과 희망… 삶을 위로하는 서정의 힘
허 시인의 시 ‘파도’ 역시 고단한 삶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시인의 시선을 보여준다.
“파도를 보면 / 내 안에 불이 붙는다”로 시작하는 작품은 거센 파도와 부딪치며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을 바다의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파도는 쓸쓸함과 고통을 안고 부서지면서도 끝내 눈물꽃을 피워 낸다.
시인은 파도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우리 삶이 지닌 의미를 되새긴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면 눈물은 절망의 상징에 머물지 않고, 따뜻한 희망을 품은 존재로 거듭난다.
이처럼 허 시인의 시는 슬픔을 외면하거나 고통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아픔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인간적인 온기와 희망을 길어 올린다. 장사익의 노래로도 불린 이 작품은 시와 음악이 만나 서정의 울림을 확장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문학과 신앙이 만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인간의 눈물과 고독을 진솔하게 바라보는 일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며, 그 이해는 사랑과 위로, 나눔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반세기를 이어 온 창작의 길… 우리말과 서정의 가치를 지키다
1945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허형만 시인은 1973년 『월간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1978년에는 『아동문예』를 통해 동시로도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첫 시집 『청명』을 비롯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해 왔다.
1979년 광주에서 ‘목요시’ 동인회를 결성해 활동했으며, 1981년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문집 『이 땅에 살기 위하여』에 ‘산 하나’ 외 3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 갔다.
그의 시 세계는 삶의 고통과 인간에 대한 연민, 자연에 대한 섬세한 관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중심으로 전개돼 왔다. 199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제9시집 『비 잠시 그친 뒤』의 시인의 말에서는 ‘시인이 죽고 시가 살아야 한다’는 취지의 문학적 지향을 밝혔다. 이는 시인의 명성보다 작품 자체의 생명력과 독자에게 남는 울림을 중시하는 태도로 읽힌다.
당시 문학평론가 김재홍 교수는 허 시인의 시에 대해 시란 무엇이며 서정시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성찰하게 한다는 취지로 평가했다. 허 시인은 이러한 창작의 고민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호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