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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그 끝없는 욕망을 보다
-캄보디아에서-
마음으로 그리던 곳을 다녀 온 후 여행기를 쓰려고 몇 번이나 컴 앞에 앉았다. 무언가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그냥 멍하니 있다가 나가길 반복하는 며칠이 흘렀다. 앙코르 왓트 라는 사원을 가진 나라 캄보디아, 그리고 킬링필드라는 악명으로 인간의 해골로 지도를 만들었다는 나라, 여행의 오랜 염원을 꿈꾼 그 나라의 첫 입성은 씨엔립 공항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입국수속에도 팁이 따라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가이드의 말이 기정사실인 듯 했다. 길게 늘어선 여행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그곳에서 운이 좋았는지 여행사 특권인지 귀빈 대접처럼 입국심사 없이 공항을 나왔다. 여권도 호텔로 경찰이 직접 가져다준다고 한다. 저녁식사 후 바로 취침 베트남을 경유한 4박6일간의 여정에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설렘이 앞선다.
열미리 아낙들의 모임 향모회, 장장 스무 해가 넘는 세월을 매달 만나 안부를 묻고 밥 먹으며 회비를 모아 일 년에 한 번씩 우리나라를 가던 여행이 격상돼 처음 떠난 해외여행이다. 을미년 설 명절을 낀 연휴라서 피곤하긴 했지만 남정네까지 낀 열일곱 명의 한국인이 제 각자의 상상으로 맞이하게 되는 이 나라의 길 위에서 무엇을 담아가게 될까 더위와 불면의 밤으로 날이 밝는다.
돌에 담아낸 인간의 영원불멸의 욕망
호텔을 나서며 40˚를 오르내린다는 무더위에 앙코르 왓을 다니려면 모자와 선크림 색안경이 필수고 사원 출입은 긴 옷과 운동화가 예의다. 앙코르는 옛날 캄보디아의 왕국도시고 왓은 사원이며 절이란다. 붉은 황톳길 호텔과 가까운 거리인데도 포장된 도로 외엔 어김없이 황토 흙의 농촌이다. 열대지방이지만 건기와 우기로 나뉜다는 이 나라가 지금은 건기여서 보이는 풍경조차 건조하다. 논에 심은 모가 푸른색으로 보이는 들판도 있지만 마른 풀밭에서 건초를 뜯는 회색 소의 등은 갈비가 다 드러나 보인다.
이 나라의 생활상이 우리나라 60년 대 라는 가이드의 말이 사실처럼 초라한 가구들 주민들 어린아이들 눈에 보이는 안타까움이 감탄보다 앞선다. 이 나라 국민으로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인구가 90%나 된다는 말도 집단 우울증에라도 감염된 듯 표정 없이 우울한 주민들도 잔혹한 역사의 산물일 것이다.
야자나무와 고무나무가 빽빽한 짙푸른 열대림으로 수십 미터 앞이 차단된 밀림 지대의 어느 지점인지 앙코르 사원에 왔다고 한다. 아침 8시가 안 된 시각인데도 뜨거운 열기와 미명의 아침을 여는 듯 신비한 안개에 둘러싸인 세 개의 돔 형태로 멀리보이는 검은 신전, 순간 전율이 일 듯 천년의 시공이 다가서며 심장이 멎는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아름이 넘는 둥근 뱀 모양의 지붕에 얹어 놓고 사원을 에워싼 돌담이 현대를 건너 고대의 신비한 풍경으로 들어가는 중세의 관문 같다. 이 사원의 넓이만 16만평이라는 가이드의 설명과 끝없이 이어진 석조 건물들 놀라움과 동시에 고대의 건축에 불가사의한 혼란까지 가중되는 신비로움이다. 돌담 안에서 신전으로 이어진 돌다리 양쪽으로는 해자라는 연못이 있다. 건기여서인지 물이 많지는 않았지만 이 신전을 보호하는데 일조를 하는 연못이다.
12세기 초에 수르야바르만 2세가 크메르제국의 도성으로 창건하였다는 이 사원은 힌두교의 3대신 중 하나인 비수뉴 신에게 봉헌하였다고 한다.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지배하던 시대 프랑스 식물학자에 의해 발견된 앙코르와트는 건물을 둘러싼 깊은 연못 (해자: 바다로 알려진)을 돌다리로 건너면서 신비의문을 연다. 1860년 프랑스 앙리무오 라는 식물학자는 우연히 식물을 조사하기위해 이곳에 왔다가 거대한 석조신전을 보고 책으로 펴내 그때부터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천 년 전의 건축물, 현대 박물학자들이 풀지 못한 미스터리한 건축기법은 실로 놀라움과 경탄을 저절로 연발하게 한다. 전혀 목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석조건축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자르고 깎고 새기며 아득한 상상봉까지 돌 지붕을 얹은 기술은 보는 것 외에 당시를 상상하기에도 아찔하다.
인간의 욕망이 세운 당대의 신전은 천년 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한곳이라는 찬사를 받지만 신전을 세울 당시의 그곳 사람들은 얼마나 억압과 노동의 착취에 고통스러웠을지 웅장한 돌 하나 새겨 넣은 문양하나마다 한과 고통에 일그러진 인류가 따라온다. 기계문명이 전무하던 시대 이런 건축물을 짓기 위해 60만 명이 죽었을 것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고 보니 한걸음 한걸음이 그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낸 거대한 신전에서 그들의 영혼을 밟고 있다는 자책감이 든다.
이 사원은 울창한 밀림 속에 수백 년간을 있었다고 한다. 앙코르제국이 멸망하면서 밀림을 뒤덮는 식물들에게서 온전히 보전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사방을 둘러싼 해자를 건너 올 식물이 없었던 게 다행이었다. 머리가 일곱 개 달린 뱀이 보호한다는 입구통로부터 당시의 모든 신에 대한 경배와 죄에 대한 응징이 돌에 새겨져있어서 섬뜩한 기분이다. 문마다 아치처럼 일곱 개의 타원형 기둥들이 장식품으로 서 있는데 안타깝게도 천둥벼락을 맞고 사원 지붕 윗부분에서 떨어진 석물들이 부지기수였다.
프랑스 건축학자들이 아무리 복원하려고 해도 실패했다는 건물내부에는 보수를 위해 프랑스에서 시멘트로 발라 놓은 부분들이 많았다. 산스크리트어로 사원의 설립과정을 새겨 넣은 조각들은 거의 떼어내 없어졌지만 그 어원을 해독하려는 욕망도 인간의 부질없는 욕심이리라. 신전을 세운 왕은 영원히 존재하고픈 영원불사를 꿈꾸었지만 신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인간수명의 한계를 영원불멸의 돌로 세우는 경이로운 집착을 남기고 말았다.
앙코르 와트 중의 하나인 타프롬 사원역시 왕이 어머니에게 바치기 위해 지었다는 신전으로 발견당시 신전내부에는 수많은 보석들이 박혀있었다. 보석이 박혔던 자국들만 남아있는 신전은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으며 성장한 거목들이 지배하는 왕국 같았다. 자연자체로 보존하기로 결정한 사원이어서인지 석조 벽을 휘감고 있는 거대한 나무뿌리가 경이로움을 넘어서서 tv만화속의 순식간에 자라나는 괴물처럼 두려움까지 들게 한다. 작은 뿌리하나도 사람의 몸통보다 굵은 ‘스펑나무’가 문어발 같은 뿌리로 사원을 들어 올리는 독특한 광경이다. 결코 인간이 자연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경고 같기도 하고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메시지 같기도 한 묘한 아이러니가 사원전체를 감돈다.
앙코르 톰이라는 거대한 석조 울타리는 일행모두가 오토바이에 연결한 툭툭이라는 캄보디아 교통마차로 둘러보고 바이욘 사원에 머물렀다. 오십 여개의 탑 형태의 복잡한 구조로 세워진 이사원은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멀리서 보아도 탑마다 부처상을 전면에 조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돌 하나하나를 조각해서 연결해 완성한 모두 표정을 달리한 조각상 이었다.
이 사원을 세운 왕은 탑에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한 자신의 조각상을 새겨 넣으며 그 위력을 후세에라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남겼다고 한다. 퍼즐처럼 짜 맞추기 한 거대한 예술품을 어떻게 공깃돌 다루듯 인간의 손으로 섬세하고 아름답게 허공에 세울 수 있었는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의 미로였다.
잔혹함의 극치 해골로 전시되다.
캄보디아 하면 앙코르와트, 킬링필드, 크메르루즈, 수상가옥으로 연상되는 게 많은 여행객들의 공통일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 시간상 인터넷이나 안내문을 볼 수 없었던 나는 주워들은 풍문으로 앙코르라는 밀림의 사원에 수많은 해골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것이라는 상상으로 소름이 돋곤 했다.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킬링필드는 폴포트 정권시절 크메르루주군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정도만 들었었다.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해골이 산적해 있다는 곳 우리가 찾아간 곳은 왓트마이 작은 킬링필드사원이었다. 붉은 승복을 입은 승려들과 동자승이 한가롭게 앉아 찾아 온 이방객을 무심히 바라보는 곳 그곳에 작은 탑안에 모셔진 인간의 탈 해골이 겹겹이 포개져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불과 40년이 채 안된 1975년부터 79년 사이에 캄보디아 전인구 3분의 1이 희생된 킬링필드, 그들이 남긴 해골과 신체 각 부분의 뼈마디가 발하는 공포와 충격 말할 수 없는 역겨움이 뿜어져 나오는 기분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 나라 전체의 비극이자 전 세계 인류에 대한 경종 이랄 수 있는 전쟁의 참상은 이렇게 생생했다. 가이드는 여행객들에게 담담하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미국이 공산정권인 베트남과의 전쟁이 불리해지자 군수물자의 주 보급통로이던 캄보디아 밀림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캄보디아 영토에 수백 만 톤의 폭탄을 투여했다. 고엽제를 비롯한 살상무기들은 무고한 양민들의 목숨까지 빼앗았고 수십 만 명이 그 과정에서 희생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유학시절 공산주의에 빠져든 폴포트는 미국을 비롯한 외세와 베트남에 대한 강한 적대감으로 동지를 모집하며 크메르루주군을 키워간다. 빈번한 내전으로 먹고 살기 힘든 농민들은 수도 프놈펜으로 너도나도 몰려들어 수백 만 명이 넘는 인구가 밀집하게 되었다. 크메르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무능하고 부패한 론놀 정권의 척결을 위해 프놈펜으로 입성한 크메르루주군은 손쉽게 수도를 넘겨받았다. 거기엔 농민이 대다수인 국민들이 반기를 들고 자진해서 크메르루주군에 입당한 원인도 있었다. 폴포트는 옛 영화를 누린 크메르제국의 부활을 꿈꾼 이단아였다.
1975년 크메르족 민족주의라는 명분으로 베트남인을 비롯해 중국인 자국 내의 자본가 지식인 등을 제거하기 시작하며 도시에 사는 지식인을 농촌으로 분산시키는 강제이주 정책을 폈다. 그들이 캄보디아 부패의 온상이라고 인식한 크메르루주군은 각가지 명목과 고문으로 처형시키는 최악의 공포정치를 했다. 그 과정에서 어린아이를 비롯해 외국인 베트남인과 소수 인종들이 거의 숙청을 당했는데 고문방법도 가지가지 였으며 처형도 상식을 벗어난 참혹한 방법으로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는 악수를 하면서 손에 굳은살이 없으면 처형을 하였고 안경을 썼다고 글을 쓰고 읽을 줄 안다며 고문을 했다. 어린아이들은 철저히 부모와 격리시켰다. 부모의 일상을 고발하고 풀포트 이념을 중요시하는 세뇌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총알이 아까워서 차마 인간이 하지 못할 극악무도한 고문행위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시신이 무더기로 버려졌다. 그 과정에서 죽이는 사람들을 일련번호를 붙이고 사진으로 찍어 후대에 국제적 문제가 될까봐 증거까지 남길 정도로 그들은 갖가지 죄명을 뒤집어 씌웠다고 한다.
철저히 외세를 봉쇄하던 폴포트 정권은 베트남군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프놈펜을 버리고 밀림 속으로 도주한 폴포트는 잔류한 크메르루주군과 함께 산발적 내전을 벌이며 버티지만 끝내 폴포트는 1998년 밀림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어 이끌던 지도자들이 투항하면서 금세기 최악의 인간 잔혹사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죽어간 공포와 비명에 간 사람들의 원혼과 뼈가 해골과 함께 안치되어 사방 유리벽 탑 안에 가득 차있다.
폴포트와 크메르루주군이 추구했던 결과는 무엇이었나, 짧은 집권기에 학살한 수많은 지식인들의 도태로 지금 캄보디아 국민 80%이상이 문맹이라고 한다. 웃음도 표정도 없는 국민들 우리나라 60년대보다 못한 생활상과 베트남에 비해 20년이 뒤져있다는 나라의 희망의 끈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캄보디아는 동남아 최하의 빈민국이지만 공식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며 국회의원이 입법을 만드는 나라라고 한다. 이 나라는 군부세력이 지배한 나라다. 훈센총리는 크메르루주군의 네 번째 서열의 지도자로 38년간 이 나라의 총리로 나라를 이끌고 있다고 하니 도저히 이해불가한 나라이기도 하다.
어린아이들이 손을 내민다. 끈으로 만든 작은 팔찌 몇 개씩 쥐고 일 달러를 달라고 조른다. 붉은 흙먼지 땅에 맨발의 아낙이 아기를 안고 동냥을 하는 애처로운 모습이 차마 발길을 옮기기 어려울 정도다. 다리 없는 팔 없는 장애인까지 일 달러를 달라고 손을 내민다.
아직 국민 40%정도가 하루 일 달러로 생활하는 빈국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거지나 어린아이가 팔찌를 팔아 생기는 수입은 어찌 보면 높은 수입을 보장하는 자리인지 모른다. 툭툭이 서너 시간 탄 요금으로 부부가 2달러를 주면 된다. 옛 제국의 영화는 천년을 넘어 전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는데 가는 곳마다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가난한 꿈은 언제 푸르러질지 연민이 깊다.
황톳빛 물결 톤레삽 호수에 뜬 난민들
조국이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기대하기 전에 내가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라는 유명한 링컨의 말이 있다. 하지만 누런 황토 물위에 뜬 하루가 고통인 베트남난민들에게 조국은 있는 것일까 의문으로 보고 온 곳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으로 내전으로 정치적으로 또는 사상의 다름으로 전 세계의 난민은 넘쳐난다. 메콩강 지류를 내려가며 만나게 되는 수상가옥들 즉 물위에 뜬 집이다. 땅을 불과 일, 이미터만 파도 지하수가 넘쳐난다는 캄보디아다. 그런 만큼 수질도 좋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서너 달씩 계속되는 우기 철에 집이 침수되는 것을 막고 짐승이나 해충도 피할 겸 물위에 집을 짓는 것도 생활의 한 방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주로 빈민들이 사는곳으로 알려진 수상가옥은 이방인들에게는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중국에서 발원해 라오스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흐르는 세계 12대 강으로 알려진 메콩강 유역에는 수많은 주민들이 생활의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메콩강에 사는 물고기 종류만도 800여종이 넘는다.
베트남 난민들이모여 산다는 톤레삽호수 의 난민촌 수상가옥을 보려고 유람선에 오르자 열 살 정도의 현지소년 네명이 함께 오른다. 소년들은 일행을 즉석안마로 주무르며 일 달러를 요구한다. 강 양옆으로 이어진 밀림, 몇 미터 앞이 나무를 휘감은 넝쿨로 한번 잘못 들면 빠져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울창한 원시림이다. 황토 흙을 깎으며 흘러내리는 붉은 강물이 식수원이고 난민들의 삶의 무대다. 한가롭게 고기 잡는 사람 사이를 모터를 단 유람선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리고 사이사이 모터보트가 쾌속 질주하는 강물을 흘러 끝간데 없이 펼쳐진 호수에 이르렀다. 건기라는 지금도 호수보다는 수평선이 안 보이는 바다였다.
경상북도 크기의 호수라고 하니 유람선으로 그 끝을 볼 수도 없겠지만 우기 철에는 경상남북도를 다 합친 만큼 호수가 넓어진다고 한다. 두 사람씩 타야 하는 자그만 쪽배에 올라 노 젓는 사공의 움직임대로 멀리 보이는 수상가옥을 향해 나아간다. 삶의 모든 방법을 이 물위에서만 해결해야 하는 베트남 난민들의 가옥이다.
이런저런 부유물이 뜬 호수 느릿느릿 나아가는 쪽배위에서 한낮의 태양은 작열하고 일행은 흡사 개선하는 적군의 장군들처럼 일렬횡대로 가난한 난민들을 구경하며 여유롭다. 어린아이들이 헤엄을 치며 노는 누더기를 덕지덕지 올린 가난한 가옥에서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곳사람들은 고기를 잡아도 최소한의 하루치만 식량으로 받을 뿐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고 한다. 공산화 된 조국을 떠나 그나마 본국으로 내쫒지 않음을 고마워해야 할 난민들에게 베트남 이라는 조국은 돌아갈 수 없는 꿈의 고국일 뿐이다. 베트남도 그들 난민을 조국을 배반하고 떠난 국민으로 치부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캄보디아는 오랜 세월을 베트남과의 전쟁으로 시달려온 터라 난민을 내 쳤다가는 다시 전쟁의 화근이 될까봐 방치하고 있다고 한다. 그 난민가옥들이 난립한 가운데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세운 가옥도 있다. 호수물의 혼탁함으로 보아 대소변은 물론 온갖 생활용수의 방류가 뒤섞인 물속으로 대립이 무엇인지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를 어린아이들이 헤엄을 치며 손을 흔든다. 1달러를 외치는 어린이들에게 생활의 고통은 행복은 무슨 의미일까 그런가 하면 눈치 빠른 아낙네가 아이를 앞세워 맥주 등을 파는 상술까지 호수위에도 자본의 그림자는 물살을 가른다.
기행문도 일기도 아닌 글을 쓰며 자괴감이 든다. 여행 중에 자연의 위대함을 보고 있는 느낌 그대로 찬사와 경탄을 쓰는 글이 기행문일 것이다. 짧은 일정을 길에서 함께 보내는 단체여행의 맹점이 시간에 쫓겨 다니는 점이다. 그 나라 와 그 나라 사람들의 생활을 알려면 함께 기숙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외국에 나가 보아야 내 나라가 좋다는 말도 있다. 너무 많은 너무 헤픈 문명의 홍수 속에서 한계가 있는 인간의 삶이 두렵다. 하지만 인간은 평등하다는 진리는 어느 나라에서 건 허구의 경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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