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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가 조직적 교회를 통하여 기본적 교리를 확립한 이후에는 교리에 대한 철학적 구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교 교리를 체계화하고 증명하며 나아가서는 그리스도교적인 바탕 위에서 세계관과 인생관을 확립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스콜라 철학을 형성한 사상가들은 그들의 교리에 있어서 교부철학자들이 구성한 그리스도교 교리를 이어받았지만 그것을 그리스 철학의 방법과 개념에 의해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근본적인 의도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연과 우주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였고, 종교와는 상관없이 과학적인 정신으로써 모든 것을 탐구하였다. 반면에 스콜라 철학자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점이 바로 양자의 근본적인 차이인 것이다. 스콜라 철학가들은 그리스도교 교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교리를 위하여 그들은 그리스 철학과 논리학의 체계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철학은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확립된 그리스도교 교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에 인간의 정신이 모순되지 않는 동안에는, 인간의 이성이 그에 따를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신학적 속박의 한계를 의식하고 제한된 교리를 탈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교리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철학적 체계를 구성하려는 의도가 싹트게 되었다. 또 다른 한면에서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여 성경 자체를 중시하고 그와 더불어 인간의 내면적 양심에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종교 개혁(Reformation)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므로 이로부터 근세 철학에로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우리는 위에서 스콜라 철학의 일반적인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아래에서는 스콜라 철학을 초기?전성기 및 말기로 구분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 초기 스콜라 철학
초기에는 보편적 개념이 사물의 참다운 본질이며 이것은 개별적 사물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신앙과 지식 또는 신학과 철학이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며,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 및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이 많이 미치었다. 에리우게나(Eriugena, 810~877 쯤)는 플라톤적인 실재론의 입장에서 신앙과 이성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권위보다도 이성의 우위를 피력하였다. 신앙과 이성은 모두 신의 지혜에서 나타난 것이지만 참다운 권위는 이성의 힘에 의하여 발전된 진리라고 하였다. 또한 그에 의하면, 신은 만물의 본질이며 근원이다. 신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신에 의하여 만물이 나타나며, 만물은 신의 현상이라 하였다. 에리우게나에 있어서 신은 곧 보편적 개념인 것이며 개념만이 유일한 실재이고 모든 개별적 사물들은 여기서 산출된다고 함으로써 보편논쟁의 실마리를 마련하였다.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스콜라 철학의 정신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신앙이 지식에 의해서 보증될 수 있음을 말하였다. 그도 에리우게나와 같은 플라톤적 실재론의 입장에서 개별적 존재인 사물은 거짓된 존재이고,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신의 존재만이 참다운 존재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하여 하였다. 신은 가장 완전한 존재이므로 실재성이 결핍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신은 존재한다는 것이 안셀무스의 신 증명에 대한 골자이다. 이것은 신이라는 개념에서 그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인데 그 아래에는 모든 개념에는 그 대상이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후세에 와서 칸트(Kant)는 이와 같은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을 본체론적 또는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안셀무스 당시에 벌써 가우닐로(Gaunilo, ?~1083)같은 이는, 안셀무스의 논법에 의하면, 아틀란티스(Atlantis, 행복의 섬)는 가장 완전한 섬이기 때문에 그것이 실재한다는 이론이 성립하지만, 그 섬은 단지 상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안셀무스의 주장도 옳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보편에 관한 안셀무스의 이론은 보편이 개별적 사물에 앞선다(universalia anterem)는 것이다. 그르스도교 교리에 있어서는 인간은 보편성이 전제되어야만 인간의 원죄 및 예수에 의한 구원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주장이다. 그러나 보편이란 오직 이름(nomina)이거나 아니면 소리나는 바람(flatus vocis)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명론(nominalism) 즉 개별적 사물만이 존재하고 보편은 개별적 사물보다 뒤에 있다(universalia post rem)는 입장이 대립되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은 로스켈리누스(Roscelinus, 1050~1120)이다. 그의 주장의 요점은 보편이란 개별적 사물이 있은 후에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신이란 한낱 명칭일 뿐이고 존재하는 것은 성부?성자?성신으로서 그것은 각각 독립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삼위일체설에 대한 하나의 반박이다.
스콜라 철학은 결국 실재론과 유명론의 투쟁 과정 속에 성립하는데, 앞에서의 극단적인 두 경향의 대립에 있어서, 그 가운데 서서 양자를 조정하려는 입장이 생기게 되었다. 아벨라르두스(Abaelardus, 1079~1142)는 보편적 사물의 본질로서 그 안에 있다(universalia in re)는 주장을 함으로써 실재론과 유명론 두 입장 모두를 물리치고 중간적 입장을 취하였다. 아벨라르두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 같으며, 플라톤 주의적인 영향으로부터 스콜라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시기로 넘어가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중세의 보편논쟁이란 앞에서 말한 세 입장 사이의 논쟁을 가리킨다.
2. 전성기 스콜라 철학
12, 13세기는 법왕권과 군주권의 충돌이 반복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노센트(Innocent) 3세에 의하여 군주권에 대한 교권의 우위가 확립되었으므로 교회는 세속적인 문제에까지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또한 십자군 원정에 의하여 지리상의 새로운 견문이 열리게 되었다. 이 두 가지와 더불어 동방에서 수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사상계의 전환에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었다. 그 동안 교회는 플라톤 철학만을 이용하여 왔으나, 초월적인 신의 창조적 원인만을 존중하고 자연과 현실을 무시한 이러한 사상은 새로운 시대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이상을 현실에서 찾으려 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응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슬람교를 신봉하면서 코란(Koran)에서 신앙의 마음을 길러온 아라비아의 학자 아비센나(Avicenna, 980~1037)와 아베로에스(Averroes, 1126~1198)가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미친 중요한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심취하면서 그것을 전성기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소개하여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다. 아베로에스는 철학과 신학 또는 이성과 신앙 그 둘은 서로 혼합되거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중진리(duplex veritas)라고 본다. 이것은 어떤 것이 철학에서는 진리인데 신학에는 거짓이라거나 신학에는 진리인 것이 철학에서는 거짓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진리 혹은 같은 진리가 철학에서는 이론적으로 명백히 이해되고 신학에서는 비유적으로 표현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종교에서는 코란을 그림 등의 방법으로 일반인 또는 학문에 별로 조예가 없는 사람들을 알아듣도록 가르치는 데, 철학자는 비유를 버리고 표상에서 자유로와져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이렇듯 신앙이 받아들이는 진리?이성이 받아들이는 진리, 진리에 대한 이중설은 그 뒤 스콜라 철학에게 영향을 미치었다. 그러나 사상적인 발전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수도원 운동으로부터 생긴 프란체스코 교단(1209년 성립)과 도미니코 교단(1215년 성립) 사이의 대립이었다.
프란체스코 교단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설을 지켜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이론적 종합을 환영하지 않았다. 이 교단은 주지적이기보다는 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도미니코 교단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채용하여 이것을 그리스도교화하였으니, 그 결과 그리스도교 신학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가져다 주게 되었다. 프란체스코 교단과는 달리 도미니코 교단은 주지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알베르투스?마그누스(Albertus Magnus, 1193~1280)와 그의 제자 토마스?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는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사람들인데, 특히 토마스?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리스도교화하였으며, 그의 신학은 오늘날 카톨릭의 공인철학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이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긴 해도 신의 본질을 파악할 수는 없는 것으로서, 자연의 빛으로서의 이성은 논리적 추론에 의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뿐 신의 본질을 알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본다. 신의 본질을 아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아무런 보상없이 거져 주신 은총의 빛에 의해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이성에 의해 신을 알려는 것은 이성의 권한을 넘어서는 행위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인간 이성을 논리적 추론에 의해 신의 존재를 어느 정도 증명할 수는 있다. 이런 증명은 신의 존재를 확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존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성적 짐작일 것이다.
토마스?아퀴나스는 모든 존재의 제일 원인으로서의 신의 존재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방법으로 증명하였다. ① 운동의 원인으로서의 신: 자연의 모든 운동은 그 원인으로서 부동(不動)의 원동자를 가져야 한다. ② 우연적 존재의 원인으로서의 신: 현실의 사물은 우연적인 것으로서 우연적인 존재에 대한 현실적이며 필연적인 존재가 있어야 한다. ③ 모든 존재의 선과 참다움 및 완전성의 원인으러서의 신: 모든 사물에는 참되거나 선하거나 고상함에 있어서 계층적 구조를 가지는 데 이러한 구조에 있어서 최상의 가장 완전한 존재가 있어야 한다. ④ 모든 존재의 목적으로서의 신: 인과 계열의 맨 위에는 모든 작용의 궁극 원인이 된다. 토마스?아퀴나스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은 자연의 빛으로서 창조주인 신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보았다.
토마스?아퀴나스는 보편과 특수의 관계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관계를 이용하였다. 개별적 사물은 신의 지혜에 의해서 주어지는 형상이 질료에 가해져서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질료도 신에 의해 창조된다고 한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차이가 난다. 어쨌든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전 사상에 걸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융화를 꾀하였다. 그의 철학은 도미니코 교단의 공인 철학이 되었다. 그러나 점차로 프란체스코 교단과 신비주의자들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 이론에 반기를 들게 되었으니, 말기의 스콜라 철학은 그와 같은 움직임이 겉으로 나타난 것이다.
3. 말기 스콜라 철학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70~1380)는 프란체스코 교단의 일원으로 토마스 철학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주지적인 토마스 철학에 반대하고 종교를 주의적이라고 보아 신앙과 지식을 분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신학과 철학은 각기 다른 원리를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미 둔스 스코투스에 의하여, 신앙과 지식의 일치를 주장하는 스콜라 철학의 근본 정신이 흔들리게 되었고 다시금 유명론이 일어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옥캄(William of Ockham, 1280~1349)은 보편은 기호나 명칭에 지나지 않고 실재하는 것은 오직 개별적 존재밖에 없다고 하였다. 오캄에 의하면 경험적 지식이 있어야 추상적 지식도 성립할 수 있기 때문에, 지식은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와 성질은 이성에 의해서는 증명되지 못하며, 만일 증명된다 하여도 그것은 유추에 의하여 개연적으로 나타나는 데 불과하기 때문에 교리는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필요한 것은 다만 신앙과 믿고자 하는 의지뿐이라고 하였다. 오캄은 그 자신 신학자이면서도, 신학은 이성적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학문이 아니라고 하며, 신학과 찰학과를 구별했던 것이다. 여하튼 오캄은 보편적 존재는 깎아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후에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론 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14세기에 들어서자 반토미즘(Anti-Thomism)의 물결에 따라서 신비주의적 경향이 세력을 가지고 스콜라 철학을 무너뜨리는 데 한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교회에 의한 신앙의 외형화 내지 형식화에 대하여 신앙을 내면화하고 순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움직임의 대표자는 마이스트?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이었다. 그는 정신력을 외부로부터 내면으로 돌려서 신과 합일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후에 니콜라우스?쿠자누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쿠자누스는 신을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로 보았다. 오성에서는 구별에서부터 통일성을 파악하나 이성을 구별 안에서 통일성을 직관하는 것이다. 무한자인 신은 온갖 사물을 포섭하는 가장 큰 것이며, 온갖 사물에 스며들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신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성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한편 그 당시는 십자군 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상공업이 활발해지고, 도시가 이곳 저곳에서 발달함에 따라 중세의 봉건제도는 서서히 몰락해 가기 시작하였다. 중세 말기의 자치 도시의 발전과 국가주의 내지 민족주의의 발흥은 근대사회와 근대정신의 모체가 되었다. 여기서 또한 봉건 지배층의 철학이었던 스콜라 철학은 무너지고, 도시가 특히 발달했던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13세기부터 새로운 세계관적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나 감각적 사물을 신과는 상관없이 생각하려는 태도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르네상스 운동이다. 이렇듯 신앙과 지식, 신학과 철학의 분리 내지 구별은 한편에서는 신앙의 그윽한 세계로 나아가는 실마리를 마련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앙과 관계없이 인간의 자유롭고 독창적인 이성의 능력에 의한 철학, 나아가 과학의 재생과 발흥, 성립의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