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LUm_8LTy5pE?si=F4sEuZDcRpiY0Ptd
https://youtu.be/iYIKpvVl97M?si=GflvmpbBIbHevAtR
https://youtu.be/iYIKpvVl97M?si=GflvmpbBIbHevAtR
자랑스런 시조 태백(吳太伯)할아버지.
3300여년전 중국 고대 춘추전국시대, 춘추오패 패권국의 하나인 오(吳)나라를 세운 태백왕의 태동과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대하여 오문화계승차원에서 설명 드립니다.,
오 태백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세가(世家)의 첫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고대 중국의 중요 인물이다.
오태백이 세운 오(吳)나라는 한자 사자성어(四字成語) 오월동주(吳越同舟)에서의 오나라를 말합니다.
서로 원수지간인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병사라도 ‘배에서 만나면 서로 다투지 않고 동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야가 오나라의 사자성어 오월동주를 배워야 할것으로 사료 됩니다.
오나라의 시조인 오태백을 조명해 보겠습니다.
오태백(吳太伯)과 태백의 동생 중웅은 모두 주(周)나라 태왕의 아들이며, 주나라 왕 계력(季歷)의 형이다.
계력은 어질었으며 [그에게는] 성스러운 아들 창(昌, 서백창, 주나라 문왕이 됨)이 있었다.
태왕이 계력과 창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태백과 중옹 두 사람은 곧 형만으로 달아나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카락을 잘라 왕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주면서 계력을 피했다.
결국 계력이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왕 계(季)이고, 창(昌)은 문왕(文王)이 된다.
태백은 형만으로 달아나 스스로 구오(句吳)라고 일컬었습니다. 형만 사람들은 그를 정의로운 사람으로 여겼고, 그를 좇아 귀의한 자가 1천여 가구나 되었으며 그를 임금으로 세워 오태백이라고 했습니다.
태백은 춘추시대 오나라(吳)의 초대 군주이자, 오(吳)의 시조가 됩니다.태백이 세상을 떠났으나 아들이 없자 동생 중옹(仲雍)이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주나라 태왕의 둘째 아들이 되겠습니다.
중옹이 죽자 아들 계간이 임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계간이 죽자 아들 숙달이 임금의 자리에 올랐고, 숙달이 죽자 아들 주장이 임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때 주나라 무왕은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태백과 중옹의 후손을 찾다가 주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장은 이미 오(吳)나라에서 군주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이로 인하여 왕은 책명을 내려 그를 오나라에 봉한 것 입니다. 주장의 동생 우중에게는 주나라의 북쪽에 있던 옛 하나라 도읍터를 봉해 주었고, 이렇케하여 우중은 제후의 반열에 올랐던 것입니다.
태백이 오나라의 군주가 되고 나서 오 대가 지나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후손에게 두 나라를 봉해 주었으니, 그 하나는 우(虞)나라로서 중원(中原)에 있었고, 하나는 오나라로서 이만(夷蠻)오랑캐땅에 있었습니다.
십이 대가 지나 진(晉)나라가 중원에 있던 우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중원의 우나라가 멸망한 지 이 대가 지나서 이만 지역의 오나라가 흥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체로 태백에서 수몽에 이르기까지는 십구 대로 약 500여년이 지나게 됩니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세가의 첫번째로 이름을 올려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를 저술하면서 평가하며,사마천은 고공단보의 장남인 태백과 그 후손인 오나라 군주에게 경의를 표하였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논어 8권 태백편에 장왈: 태백기기가 위지덕여이의,삼이천하양,민득이칭언‘이라...“태백은 이미 지극한 덕행이 있다고 말할수 있으니 세 번※이나 천하를 양보 하였으나 백성들은 그를 어떻게 칭송할지 몰랐다”고 했습니다.※주나라 태왕이 병이나자 약초를 캐러 오,월 에 갔는데 태왕이 죽자 돌아오지 않아 셋째아들 계력이 상주하였으니 첫 번째 사양한것이요, 계력이 부고를 보냈으나 급하게 상사에 돌아오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사양이고, 탈상한 뒤에 바로소 머리를 깎고 몸에 문신을 하였으나 세 번째 사양안 것 이다. 3번 사양한 미덕이 숨겨지고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태백을 창송 할수 가 없었다“공자를 말했습니다.
《사기》의 오 태백 세가※는 오나라의 태백(太伯)과 그의 후손들이 건국한 오나라의 역사를 다룬 부분 입니다.
※여러대를 내려오면서 제후.왕.명족에 대한 기록
◇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태백의 배경 : 태백은 주나라 태왕(太王, 고공단보)의 큰아들(장자)입니다. 태백은 자신의 동생인 계력(季歷)의 아들, 즉 자신의 조카인 창(昌)이 왕위에 오르기를 원한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여 스스로 왕위 계승을 포기합니다. 태백은 이를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 강(江)과 회(淮) 지역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오나라를 세웁니다.
2. 오나라의 발전 : 태백 이후, 그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오나라를 다스리며 국력을 키워 나갑니다. 이 과정에서 오나라는 상업과 무역을 통해 부강한 나라로 성장합니다. 특히 춘추시대에 들어서는 군사력도 강화되며, 제후국들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3. 오왕 합려와 오자서 : 오나라의 국력이 절정에 이른 시기는 오왕 합려(闔閭)때입니다. 합려는 뛰어난 군사 지도자로, 오자서(伍子胥)와 같은 명재상(우수인재발굴)을 두고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합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인근의 초나라를 공격하는 등 외교적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손바병법으로 잘 알려진 손무도 오자서의 추천으로 등용된 인물입니다.*
4. 오왕 부차와 멸망 : 합려의 아들인 오왕 부차(夫差)는 부친의 유업을 이어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며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 하고 운하를 설치하는등 경제적 부흥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부차는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초반에는 승리했으나, 이후 월왕 구천(句踐)에게 패배합니다.(* 오월춘추에 의하면 월왕 구천이 장작위에서 자면서 복수를 맹세했다는 고사가 ‘와신상담’입니다). 결국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오 태백 세가는 주나라 왕위를 스스로 포기한 태백의 희생적 결단과, 그의 후손들이 세운 오나라의 흥망성쇠를 통해 춘추전국시대의 복잡한 정치와 군사적 역학 관계를 보여줍니다.
◇《사기》오 태백 세가에서 얻을 수 있는 주요 교훈을 다음과 같습니다.
1. 겸손과 희생의 가치 : 태백은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아버지와 동생의 뜻을 존중하며 오나라를 세웠습니다. 이는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희생과 겸손의 미덕을 보여줍니다.
2. 국가 경영의 중요성 : 오나라는 처음엔 작고 약한 나라였지만, 경제적 성장과 강력한 군사력으로 번영을 이뤘습니다. 이를 통해 국가는 지도자의 통찰력과 전략적 경영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며, 강국이 되기 위해선 내부적인 안정과 외부와의 균형 잡힌 관계가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3. 방심과 오만의 위험성 : 오왕 부차는 부친 합려의 유산을 이어받아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으나, 결국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오나라가 멸망하게 됩니다. 이는 승리에 취하거나 권력을 남용하면 패망할 수 있다는 경고를 줍니다.
4. 충신의 조언 경청 : 오자서와 같은 충신은 오나라의 번영에 큰 공헌을 했으나, 나중에 부차는 그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 이는 지도자가 충신의 조언에 귀 기울이고, 이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오 태백 세가는 인생과 정치에서 균형과 절제를 지키고, 겸손하고 올바른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오만과 방심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하라는 선열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인산회장 오박사촌 래방(萊訪)방문에 따른 촌장 인사말씀으로 ,
오회장 석좌교수임용식 에서 축하 말씀 일부 인용 하였습니다 .
감사 합니다.
오박사촌 촌장 오노균 올림
첫댓글 참으로 귀하고 소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