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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초 봄여행 일정
2010년 3월 29일~31일
첮째날
08:00-------------- 압구정 주차장에서 출발
13:00~14:00---------순천 대원식당(061-744-3582)
14:00~16:00---------낙안읍성(061-749-3893)
16:00~18:00---------순천만(061-749-3006)
19:00~20:00------ 구백식당(061-662-0900)-서대회,갈치구이
경도회관(061-666-0044)-장어, 하모유비키
20:30---------------오션리조트체크인 (061-689-0800)
둘째날
08:30--------------- 숙소출발
09:00~10:00----------진남관(061-690-7338)
10:00~12:00----------오동도(061-690-7303)
12:00~13:00----------한일관 (061-654-0091)
13:00~17:00----------무슬목,향일암(061-644-4742),
갓김치집(061-644-7054)
17:00~18:00----------수산시장
18:30~19:30----------삼학집(061-662-0261)-서대회 전문
노다지(061-662-4045)-삼치회 전문
셋째날
07:30-----------------숙소출발
08:00~10:30-----------흥국사(061-685-5633)
12:00~13:00-----------길상식당(061-755-2173)
13:00~15:00-----------송광사(061-755-0107~9)
15:00--------------------송광사 출발 서울로
여행 일정은 다소 달라질수 있고 식당 선택도 친구들의 선택으로 결정 하겠습니다.
관광지 시간 배정은 이동시간도 포함 된것이 있습니다.
-관광지 자료들-
향일암
향일암(문화재자료 제40호)은 전국 4대 관음 기도처 중의 한 곳으로 644년 백제 의자왕 4년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원통암이라 불렀다. 고려 광종 9년(958)에 윤필거사가 금오암 으로, 조선 숙종 41년 (1715년)에 인묵대사가 향일암이라 개칭했다. 이 곳은 대웅전,삼성각,관음전,용왕전,종각, 해수관음상을 복원, 신축하여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향일암에서 바라본 금오산 바위봉 한편, 금오산의 기암절벽 사이는 동백나무와 아열대 식물에 둘러싸여 있다.
마을에서 향일암을 오르는 산길은 제법 가파른 편인데, 중간쯤에 암벽을 타고 오르기도 하고, 암자근처에 이르면 집채 만한 거대한 바위 두개사이로 난 석문을 통과해야 하는등 아기 자기한 등산코스다. 임포마을 입구에는 수령이 5백년이나 된 동백나무와 금오산에는 흔들바 위가 있다. 남해 수평선의 일출 광경이 장관을 이루어 향일암이라 하였으며, 또한 주위의 바위모양이 거북의 등처럼 되어 있어 영구암이라 부르기도 한다. 바닷가에 위치하면서도 염분이 없어 끈적거리지 않아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고, 향일암 앞 마당에서 아득히 수평선까지 시야에 담는 맛이 통쾌하기 이를데 없다.
12월 31일 ~ 1월 1일에는 향일암 일출제가 열리고 있어 이곳 일출 광경을 보기위해 찾는 관광객이 무척 많다. 방죽포 등 해수욕장이 많고, 돌산공원. 무술목전적지. 고니 도래지. 흥국사 등이 가까이 있다. 향일암에는 7개의 바위동굴 혹은 바위틈이 있는데 그 곳을 모두 통과하면 소원 한가지는 반드시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다. 소원을 빌기 위해 대웅전과 용왕전 사이에 약수터 옆 바위와 관음전 뒷편 큰 바위에 동전을 붙이거나 조그만 거북 모양 조각의 등이나 머리에 동전을 올려놓기도 한다.
오동도
전라선 종착역인 여수역에서 1.2㎞를 달려 768m 길이의 방파제로 연결된 오동잎 모양의 오동도에 들어서면 진초록 잎과 붉은 꽃잎, 그리고 샛노란 꽃술이 선명한 동백꽃 군락이 펼쳐진다. 오동도의 동백은 4000여 그루. 동백나무가 팔뚝 굵기로 자라는 데 100년의 세월이 걸린다는데, 이곳엔 팔뚝보다 굵은 동백나무가 모래알처럼 흔하다.
오동도의 모든 산책로는 섬 정상의 하얀 등대를 향해 오른다. 봄바람이 동백나무 숲과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화살로 쓰기 위해 심었다고 전해지는 시누대 터널을 빗질하듯 쓸고 가고, 추억을 찾아 나선 젊은 연인들의 셔터소리에 놀란 동백꽃은 무시로 떨어져 꽃길을 만든다.
오동도를 한눈에 보려면 오동도등대 전망대에 올라야 한다. 바깥이 훤히 보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5m 높이의 전망대에 서면 붉게 물든 동백림과 한려해상국립공원 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멀리 남해 돌산도 돌산대교 여수항 광양항 하동포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후박나무 시누대 등 194종의 희귀 수목과 용굴, 코끼리바위 등 기암절벽이 섬 전체를 감싸고 있는 오동도의 해안 절벽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
고려 공민왕때 요승 신돈은 전라도라는 전(全)자가 사람인(人)자 밑에 임금 왕(王)자를 쓰고 있는데다 남쪽 땅 오동도라는 곳에 서조인 봉황새가 드나들어 고려왕조를 맡을 인물이 전라도에서 나올 불길한 예감이 들어 봉황새의 출입을 막기 위해 오동도 오동나무를 베어 버린 전설이 있다. 오동도(梧桐島)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명물이자, 미항 여수의 얼굴과 같은 곳이다.
오동도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오동도등대는 지난 1952년 5월 12일 처음 불을 밝혔다. 등탑은 높이 8.48m의 백색원형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었으나 2002년에 높이 27m의 백8각형으로 개축하였다. 등탑 내부는 8층 높이의 나선형 계단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외부에 전망대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여 등대를 찾는 관광객에게 여수, 남해, 하동 등 남해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사무동 2층에는 전시실을 마련하고 등대와 바다에 대한 자료들을 전시하여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등명기는 국내기술로 개발된 프리즘렌즈 회전식 대형등명기가 설치되어 있으며, 10초 간격으로 반짝이는 등대 불빛은 46km 떨어진 먼 바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동도 섬 전체는 완만한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입구에 모형거북선과 판옥선, 세계박람회의 여수유치를 위해 세워진 2012년 세계박람회홍보관, 음악분수 등이 있고 남쪽 해안가 쪽으로는 소라바위, 병풍바위, 지붕바위, 코끼리바위, 용굴 등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오동도등대에 오르는 길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무성한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데 11월경에 빨간 꽃망울을 터뜨려 겨우내 황홀함을 뽐내다 3월경에 절정을 이룬다.
* 최초점등일 - 1952년 5월 12일
* 구조 - 백팔각형 콘크리트(27m)
* 등질 - 섬백광 10초 1섬광(FlW10s)
* 특징 - 여수항 및 광양항 입구에 오동나무와 대나무가 무성하고 이 충무공의 역사가 깃들인
섬 정상에 등대가 위치하며 전망대용 엘리베이터 및 해양수산홍보실이 설치되어 있다.
진남관
국보 304호인 진남관은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전라좌수영의 유일한 건축물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해인 1599년 이충무공의 후임 통제 사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세운 75칸의 대규모 객사이다.
남쪽을 진무한다는 의미에서『鎭南館』이라고 하였는데, 난중일기에는 진해루터에서 공무를 보았다 하고, 이후 1664년 절도사 이도빈이 크고 작은 수리를 하였으나, 1716년 절도사 이여옥 때 대화재로 소실된 것을 1718년 이제면 수사가 다시 중창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는 건물의 뼈대이다. 순종 5년(1911) 여수보통공립학교를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여수중학교와 야간 상업 중학교로 사용되기도 했다.
건물은 정면 15칸 (54.5m), 측면 5칸(14m), 면적240평의 대형건물로 팔작지붕을 올린 겹처마 단층건물이며 민흘림 원형기둥(68개)을 세웠다. 진남관 정면에 서 있는 망해루는 일제시대에 철거된 것을 1991년 4월 중건한 2층 누각이다. 진남관 부대시설로 진남관의 역사와 임진왜란에 대해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물 전시관이 있다. 또한 주말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활동을 하고 있어 자세한 설명도 들을 수 있다. 전남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여수석인상이 경내에 세워져 있고 주변에 자산공원, 오동도, 돌산대교, 충민사, 만성리해수욕장 등이 있다.
낙안읍성
삼한시대 마한땅, 백제 때 파지성, 고려 때 낙안군 고을터며, 조선시대 성과 동헌, 객사, 임경업장군비, 장터, 초가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성과 마을이 함께 국내 최초로 사적 제 302호에 지정되었다.
조선태조 6년(1397)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아 방어에 나섰고 300년 후, 인조 4년(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하여 현재의 석성으로 중수했다. 다른 지역 성과는 달리 넓은 평야 지대에 1~2m 크기의 정방형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높이 4m, 너비 3~4m, 성곽 총길이가 1410m로 동내, 남내, 서내 등 4만 1천평에 달하는 3개 마을 생활근거지를 감싸 안은듯 장방형으로 견고하게 축조되어, 400년이 가까운 지금도 끊긴데가 없고 웅장하기 이를데 없다. 지금도 91세대(2001년 기준)가 실제 생활하고 있는 살아 숨쉬는 민속 고유의 전통마을로서, 민속학술자료는 물론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동무을 비롯 서, 남문을 통해 성 안에 들어서면 사극 촬영장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 들며(사극 용의 눈물, 태조왕건 등 촬영장소) 용인, 제주민속마을과 같은 전시용이나 안동 하회마을과 같이 양반마을도 아닌, 그저 대다수의 우리 서민들이 살아왔던 옛 그대로의 모습이기에 조상들의 체취가 물씬 풍겨 친근한 정감이 넘친다. 남부 지방의 독특한 주거양식인 툇마루와 부엌, 토방, 지붕, 섬돌 위의 장독, 이웃과 이 웃을 잇는 돌담은 모나지도, 높지도 않고, 담장이와 호박넝쿨이 어우러져 술래잡기 하며 뛰놀던 어린시절 마음의 고향을 연상케 한다.
송광사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
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명종 27년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영취산 흥국사(興國寺)
종 목 문화재자료 38호
지정일 1984.02.29
소재지 전남 여수시 중흥동 17
영취산 기슭에 자리잡은 절로 고려 명종 25년(1195)에 보조국사가 호국 사찰로 세운 것을 여러 번 고쳐 지었는데, 인조 2년(1624)에 계특대사가 건물을 고쳐 세워 지금에 이른 것이라 한다. 경내에는 흥국사대웅전(보물 제396호), 팔상전, 불조전, 응진당 등 10여 동의 목조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중심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하고 있는 우물천장이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내부에는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를 모시고 있다. 또한 흥국사괘불(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대웅전후불탱(보물 제578호), 경전, 경서판각본, 흥국사홍교(보물 제563호) 등 많은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다.
특히 전세계 40여점, 우리나라에는 단 4점뿐인 고려불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수월 관음도를 볼 수있다.
순천만
종목 : 명승 제41호
명칭 : 순천만(順天灣)
분류 : 자연유산 / 명승 / 자연경관
수량/면적 : 3,015,859㎡
지정일 : 2008.06.16
소재지 : 전남 순천시 안풍동 1176번지 등
관리자 : 순천시(순천시장)
지정사유 : 순천만은 남해안 지역에 발달한 연안습지 중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하며,갯벌에 펼쳐지는 갈대밭과 칠면초 군락, S자형 수로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해안 생태경관을 보여 주는 경승지이다. 넓은 갯벌에는 갯지렁이류와 각종 게류, 조개류 등 갯벌 생물상이 다양하고 풍부하여 천연기념물인 흑두루미와 먹황새, 노랑부리저어새를 비롯한 흰목물떼새, 방울새, 개개비,검은머리물떼새 등 25종의 국제 희귀조류와 220여종의 조류가 이곳을 찾는 등 생물학적 가치가 크다. 특히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일몰과 철새가 떼 지어 날아오르는 광경이 장관을 이루어 2006년에는 한국관광공사 최우수 경관 감상형지로 선정되는 등 경관적 가치가 뛰어나다.
순천만은 우리나라 남해안 중서부에 위치한 만으로서, 남쪽으로 북위 34° 52′ 30″까지, 동경 127° 25′ 00″에서 32′ 30″에 이르는 드넓은 해수면이다.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순천시와 고흥군, 여수시로 둘러싸여 있다.
길게 뻗은 고흥반도와 여수반도로 에워싸인 큰 만을 순천만이라 하기도 하며, 행정적으로는 순천시 인안동, 대대동, 해룡면 선학리와 상내리, 별량면 우산리, 학산리, 무풍리, 마산리, 구룡리로 둘러싸인 북쪽 해수면만을 순천만이라 일컫기도 한다. 행정구역상의 순천만의 해수역 만을 따진다 해도, 75㎢가 넘는 매우 넓은 지역이다.
간조시에 드러나는 갯벌의 면적만 해도 총면적이 12㎢에 달하며, 전체 갯벌의 면적은 22.6㎢ 나 된다. 또한 순천의 동천과 이사천의 합류 지점으로부터 순천만의 갯벌 앞부분까지에는 총면적 5.4㎢에 달하는 거대한 갈대 군락이 펼쳐져 있다.
첫댓글 뜻있고 좋은 여행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갈 곳의 정보도 미리 가이드해주시고... 너무 멋져요.감탄감탄!
저도 언젠가 같은 곳으로 여행가고 싶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