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2권 1-21 1 영사詠史
21 김거사설중기우유추암金居士雪中騎牛遊皺巖김거사金居士가 눈 속에 소를 타고 추암皺岩에 놀다
설리기우신보행雪裏騎牛信步行 눈 속에 소를 타고 가는 대로 따라가니
강산천리산비경江山千里散飛瓊 천리 강산에 옥가루가 날라 흩날리네.
원안강와불간의袁安僵卧不干意 원안袁安이 뻣뻣이 누워 아무 생각 없던 것이
나급정공교상정那及鄭公橋上情 어찌 정공鄭公의 다리 위 정서情緖만 할 것이랴?
►김거사金居士 김극기金克己, 고려 때 시인. 호는 노봉老峰.
어려서부터 文名이 높았고 문과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草野에서 시를 즐겼다.
명종 때 學行으로 한림원翰林院에 보직되었으나 얼마 후 죽었다.
►구슬 경瓊 구슬. 옥玉
►원안袁安(?-92?) 後漢 여남汝南 여양汝陽 사람. 자는 소공邵公.
큰 눈이 와서 한 길 이상이 쌓였는데 낙양령洛陽令이 나가서 순찰하다가 원안의 문 앞에 이르니
눈을 치우지 않아 길이 없으므로 혹시 굶어 죽었는가 싶어 눈을 치우고 들어가 보니
원안이 방안에 누워 있었다.
“왜 나오지 않는가?” 하고 물으니
대설인개아大雪人皆餓 “큰 눈에 백성이 모두 배가 고플 텐데
불의간인不宜干人 남을 괴롭힐 이유가 없소이다.” 하니
어진 사람이라 여겨 조정에 효렴孝廉으로 추천했다.
명제明帝 영평永平 14년(71) 초군태수楚郡太守가 되었다.
당시 초왕 유영劉英이 모반을 꾀해 연루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는데
그가 무혐의자를 잘 골라내 석방된 사람이 수백 家에 이르렀다.
하남윤河南尹으로 옮겨 엄격하고 분명하게 다스려 더욱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다.
장제章帝 건초建初 8년(83) 태복太僕으로 옮겼다가 사도司徒가 되었다.
화제和帝가 즉위하자 외척 두씨竇氏가 권력을 잡아 횡행했는데
그는 원칙을 지키며 흔들리지 않았다. 재직 중에 죽었다.
자손들이 대대로 공경公卿의 지위에 있어 후한의 대표적인 거족巨族이었다.
일고폐문와불기日高閉門臥不起 아침 늦도록 문 닫고 누워 일어나지 않으니
최유원안흥미장最有袁安興味長 원안의 흥미가 가장 으뜸이로구나.
/<이제현李齊賢 설용전운雪用前韻>
►강와僵卧 빳빳하게[경직된 채로] 눕다.
넘어질 강僵 넘어지다, 쓰러지다. 넘어뜨리다. 뻣뻣해지다
●원안袁安(?-92)
후한 전기의 관료로 자는 소공召公이며 예주 여남군 여양현汝陽縣 사람이다.
원안 자신을 포함하여 4세대에 걸쳐 삼공을 배출한 후한의 명문가 여남汝南 원씨袁氏의 시조이다.
조부 원량袁良은 맹씨역孟氏易을 배운 유학자로 전한 평제 때 태자사인太子舍人을 지냈으며
광무제가 후한을 일으킨 후 성무령成武令을 지냈다.
원안은 원량으로부터 가학家學인 맹씨역을 배워 유학자로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원안은 처음에 현의 공조功曹를 지냈으나
영평 3년(60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郞中에 임명되었다
효렴에 천거되었을 때의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원안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던 때에
눈이 많이 내려 굶주리게 되었는데 원안은 집에 혼자 틀어박혀 잠을 잤다.
이따금 저잣거리를 시찰하던 현령이 눈을 치우지 않은 집을 발견하고는
굶어 죽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치우고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은 원안의 집이었다.
현령은 원안에게 왜 밖으로 나가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이에 원안은 큰 눈으로 사람들이 곤경에 처했으니 밖에 나가면 폐를 끼치게 된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감복한 현령은 원안을 효렴으로 천거하였다.
관계에 진출한 원안은 음평장陰平長·임성령任城令을 차례로 지냈다.
이때 엄중하고 공정한 정치를 펼쳐 사람들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았다.
영평 14년(71년)
전에 모반을 일으켰던 초왕 유영이 쫓겨난 직후 초군태수로 파견되었다.
여기서 유영의 연좌로 인해 잡힌 많은 사람들의 재판을 담당하였는데 반역에 가담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사람 수백 명의 무죄를 상주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살렸다.
공정한 재판에 감복한 명제는 곧바로 그를 중앙으로 불러들였으며
수도 낙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하남윤에 임명하였다.
원안은 엄정하게 임지를 다스리는 한편 억지로 재판하지 않고 德治에 힘썼기 때문에
그가 재임한 10년 동안 수도의 기풍이 정연해졌으며 그 명성이 조정에까지 들렸다.
건초 6년(81년)
구경의 하나인 태복에 임명되어 중앙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다음으로 중앙 정부의 최고 관직인 삼공 중 사공·사도를 지냈다.
장화 2년(88년)
장제가 붕어하고 나이가 어린 화제가 즉위하였다.
원안은 장제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한 두竇씨 일파와 대립하여
두씨를 탄핵할 것을 상주하였으나
조정을 지탱하는 청류파淸流派의 수장인 원안이 파면되는 일은 없었다.
영원 4년(92년) 3월 계축일
원안은 두씨의 세도를 걱정하는 한편 사도를 지내던 중 죽었다.
시신은 윤3월 경오일에 장사지냈고 이후 두씨 일파가 축출되자
원안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나 그의 아들 원상袁賞이 낭郎에 임명되었다.
원안의 아들 원창은 사공에 올랐으며
원경袁京의 아들 원탕은 사공과 사도를 거쳐 태위까지 지냈다.
원탕의 아들 원봉과 원외 또한 삼공의 지위에 올랐다.
후한 말의 군벌 원소와 원술은 원탕의 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