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
히다(비사)로 된 내용이기 때문에 문자로 읽으면 뜻이 왜곡된다. 아브라함은 깨달음을 통해서 자신의 품에 지녔던 칼을 내려놓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모리아 산에서 숫양의 뿔이 수풀에 걸려 있다는 것은 곧 자기 생각으로서 그 숫양을 그가 가지고 있는 칼(자기 생각)로 대신 잡아 번제로 드렸다 하였다.
숫양은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정결함의 상징으로서 뿔은 권세로서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을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칼(도그마)로 살생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여기 나오는 숫양은 세상 짐승이 아니다. 그래서 히다(비사)는 참으로 어렵다. 집짐승 숫양이 아브라함과 이삭 둘만이 있는 높은 산 위까지 왜 홀로 올라갈 수 없는 문제다.
들짐승도 있을 텐데, 숫양은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정결함을 상징한다. 뿔은 힘 있는 자의 권세를 말한다. 바로 아브라함 안에서 나온 하나님의 아들,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는 곳까지(과정) 가야 속사람이 등장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짐승은 모두 사람의 속성을 비유하고 있다. 욥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축들은 욥의 속성을 나타낸 히다(비사)다. 세상에서 키우는 살아 있는 가축들이 아니다.
욥이 깨닫고 나서 원래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것의 두 배를 소유하게 되었다. 노아도 방주를 만들고 그 안으로 여호와께서 정결한 짐승 일곱 쌍과 부정한 짐승 두 쌍을 이끌어 오신다. 모두 히다로 된 말씀이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이삭의 부모도 스승도 아니다. 그 예표로 숫양(아브라함과 이삭)이 죽어야 한다. 이삭을 이끌어 가는 분이 예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져야 하는 십자가 사건과 똑같이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천 년 전에 오신 몸 밖의 예수가 우리를 이끌어 가는 아비가 아니라 표상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에 대해서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이며, 이삭 또한 그 죽음을 초월해야만 한다. 그래야 믿음의 조상(근원)이 되는 것이다. 믿음은 겉 사람의 죽음을 초월해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삭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신다(창 22:2) 하나님의 아들은 당신의 말씀으로 직접 낳으신다. 이삭을 드림이 아브라함 자신을 드림인 것이다. 이처럼 온전한 속사람이 나타나는 길은 멀고도 험하나 그에 따르는 안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생명의 그 빛(근본)!
첫댓글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