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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제국의 패망과 독립운동'
1차세계대전이 끝났다.
동맹국들과 함께 패전한 오스만 제국은 이리저리 해체된다. 프랑스 쉐브르에서 열린 승전국들의 협의에 의하면, 발칸 반도와 아르메니아 지역은 독립해나가고, 쿠르드족은 자치권을 가지고,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가 나누어 가지고, 유럽지역은 그리스가 가져가는 등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1/3로 줄어들게 된다.
세브르 조약이 알려지자, 오스만 전 지역에서 반대여론이 들끓고 튀르크 민족주의 지식인과 군 장교들은 무장 투쟁에 나선다. 각 지역에서 생겨난 저항군들은 1차세계대전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 (Mustafa Kemal Ataturk, 1881-1938) 주변으로 모인다. 우리에게는 케말 파샤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오스만 왕실 정부의 정치 개혁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단체가 이스탄불 의회의 다수당이 된다. 이 단체가 세브르 강화 조약을 거부하고 오스만 제국의 독립을 선언하자, 오스만 왕실과 영국은 의회를 해산하고 이들을 체포 추방한다.
이를 지켜보던 무스타파 케말은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앙카라에서 대국민의회를 개최한다. 이 날은 훗날 투르키에의 국가기념일로 지정된다.
1920년 대국민의회는 케말이 지도하는 새로운 정부 일명 앙카라 정부를 선포한다.
'투르키에 vs 그리스'
투르키에와 그리스는 비잔틴 제국의 계승권을 놓고 수백년동안 경쟁하는 관계이다. 천년 역사 비잔틴 제국의 주인이던 그리스인들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되고 비잔틴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땅이 되었다. 술탄 메흐메드2세는 자신이 비잔틴 제국 황제의 계승자임을 선언했다.
1832년 그리스왕국이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갈등이 다시 시작된다. 오스만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정교회를 지키면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지역을 되찾으려는 의지를 버린 적이 없는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라는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다.
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그리스군은 연합군의 지원을 받으며 과거 비잔틴의 영토였던 오스만의 아니톨리아 지역을 점령한다. 세브르 조약이 발표되자 조약에서 명기한 새로운 국경선 너머까지 공격하고 승승장구하는 그리스군은 앙카라 인근까지 계속 공격한다. 앙카라 정부 독립군은 정부군인 이스탄불 왕실 군보다 그리스 군이 더 힘겹다.
그리스군의 공세를 겨우 막아낸 무스타파 케말은 이듬해 총동원령을 내려 그리스군을 몰아내고 빼앗긴 아나톨리아 지역을 다시 탈환한다. 더 나아가 보스포루스 해엽의 영국군도 공격한다. 전후 복구에 바빴던 영국 정부는 앙카라 정부 독립군과 협상을 한다. 잇단 승리로 고삐를 잡은 앙카라 정부는 세브르 조약을 거부하고 새로운 조약을 요구한다.
1923년 로잔조약이다. 전쟁배상금을 취소하고 아나톨리아 지역을 되찾면서 이스탄불과 보스포루스 해협도 차지한다. 3년간의 독립전쟁 동안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그 성과는 뚜렸하다.
앙카라 정부가 가장 공을 들인 지역이 바로 이스탄불이다.
비잔틴 제국의 주인이라는 그리스로서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은 반드시 찾아야 하고 오스만 제국을 이어 받은 투르키에 정부도 이스탄불을 포기할 수 없다.
유럽 강대국들도 이스탄불을 그리스에 넘겨주고 투르키에는 아시아 지역만 가지기를 강요하나, 무스타파 케말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이스탄불을 고수한다. 대신 키프르스 등 대부분의 섬들을 그리스에게 넘겨주겠다고 한다. 결국 이스탄불은 콘스탄티노플로 넘어가지 않고 그대로 이스탄불로 남게된다.
오늘날에도 투르키에와 그리스는 사이가 좋지 않다. 투르키에의 EU 가입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나라가 바로 그리스다. 두 나라간의 축구 경기는 서로의 자존심과 민족 감정을 걸고 죽자살자 치고 받는 승부로 유명하다.
'터키(투르키에)공화국 수립'
이스탄불을 고수한 무스타파 케말의 대국민의회는 새로운 나라에 필요한 준비를 하나씩 해나간다.
1922년 술탄 제도를 폐지하고 1924년 칼리파까지 폐지한다. 무슬림의 정신적 상징인 칼리파는 계속 유지하기로 하였으나 새로운 공화정 체제에 반대하는 왕당파들이 칼리파 주변에 모이는 낌새가 있자 칼리파 제도 마저 폐지한다.
무스타파 케말은 다인종 체제였던 오스만 제국을 버리고 투르키에인의 나라를 세우기로 한다. 아랍인이나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인 지역은 영토에서 포기하고, 아타톨리아 지역과 이스탄불에 많이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의 비중을 줄이기 위해 그리스 정부와 강제 교환 협약을 맺어 그리스인과 투르키에인들을 맞교환한다.
쿠르드족은 예외다. 독립이나 자치권을 허용하지 않고 강제 추방도 할 수 없고 그대로 억압과 동화 정책을 병행한다. 지금도 투르드인들의 독립 열망은 투르키에의 계속되는 위협이다.
1923년 드디어 투르키에(당시 터키)공화국이 선포된다. 수도는 독립운동의 거점인 앙카라로 정하고 무스타파 케말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이슬람을 버리고 세속주의 노선을 가다'
투르키에공화국은 중동 최초의 세속주의 국민국가이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세속적인 정책을 과감하게 펼쳐나간다.
'터키의 국교는 이슬람이다'라는 헌법 조항도 삭제한다.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폐지하고 유럽식 법정을 도입한다.
일부다처제를 폐지하고 이슬람 종교학교 마드라사도 폐교한다.
기존 이슬람 달력을 버리고 서양달력을 채택한다. 무슬림의 나라에서 기독교 배경의 서양달력을 채택한다는 건 획기적인 사건이다.
문자도 바꾼다. 아랍어를 차용하여 터키어를 표기하였으나 문제가 많아 라틴 알파벳을 차용하여 터키문자를 만든다.
모든 국민들에게 성을 갖도록 한다. 투르키에인들은 전통적으로 성이 없고 대신 누구의 아들 이런 식으로 표기하여 왔다. 그러나 근대 행정 체제에서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투르키에 정부의 세속적인 정책은 큰 반발에 부딪친다. 무스타파 케말이 나라를 구한 영웅이긴 하지만 천년 넘게 유지해온 이슬람의 정체성을 하루아침에 버리도록 강요하는 정책에 신앙심 깊은 무슬림들이 쉽게 따를 리가 없다.
가장 첨예한 부분은 모스크에서 드리는 이슬람 예배이다. 이슬람 종교법은 아랍어로만 예배를 드리도록 되어 있고 그렇게 지켜왔으나 케말 정부는 터키어로 예배를 드리도록 한다. 이슬람 성직자들이 크게 반발하자 케말 정부도 일부 양보하지만 오늘날 여전히 아랍어로만 예배를 하고 있다. 터키어 예배는 이슬람주의와 새속주의가 충돌하는 가장 예민한 부분이다.
케말 정부는 이슬람 예배에서는 일부 양보를 하지만 그외 저항은 엄격하게 탄압한다. '질서유지법'을 만들어 체제전복을 노리는 어떠한 단체도 강제 폐쇄하고 정책에 반대하는 야당, 공산주의 세력, 쿠르드족 반란군 등 강력하게 제압한다. 일체의 반대를 용납하지 않는 일당독재의 시절이 케말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 된다.
2대 대통령에 들어서야 자유선거와 민주주의를 도입하나 지금도 세속주의 정책과 이슬람 정체성 간의 갈등은 계속 진행중이다.
현재 장기집권중인 에르도안 대통령은 정부 정책에 이슬람적인 색깔을 넣고 있어 또 다른 저항을 받고 있다.
추가 :
투르키에는 왜 한국전쟁에 참전했을까요?
우선 투르키에의 안보 상황을 봅시다. 투르키에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위협에 늘 시달려왔습니다. 오스만 제국 시절 발칸 반도를 둘러싼 수차례의 충돌을 포함하여 그동안 두 나라는 13차례나 전쟁을 치러왔습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미.소의 양극체제로 개편되면서 소련은 동유럽을 공산화시켰습니다. 투르키에는 순식간에 소련의 위성국가들에게 포위되는 형국이 됩니다. 투르키에는 이런 위기 상황을 벗어나고자 NATO에 가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NATO는 기본적으로 유럽을 지키기 위해 결성된 군사동맹입니다. 유럽국가들은 이슬람 문화권인데다 아시아에 가까운 투르키에의 가입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핵우산에 들어가지 않고는 언제든지 소련의 침공을 받을 수 있다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인 투르키에는 어떤 방법으로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습니다. 때마침 아시아 반대쪽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넉달도 채 되지 않은 1950년 10월 5천여 명의 투르키에 군 선발대가 부산항에 도착합니다. 미국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파병을 하고 그 규모도 네 번째로 큰 나라가 됩니다. 역사적으로 아무런 교류가 없던 두 나라의 관계를 볼 때 대단히 큰 결정이었습니다. 900여 명의 군사를 희생시키면서 많은 무공을 세우는 투르키에의 모습을 보고 미국은 투르키에를 동맹으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1951년 10월 NATO 회원국으로 승인됩니다.
투르키에 국가의 생존을 죄우하는 문제였던 NATO 가입은 한국전쟁 참전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결실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유엔군으로서 휴전협정을 감시하고 그후 16년간 6만여 명의 군사를 파병합니다. 많은 투르키에 군인들은 본국에 돌아가서도 한국 이야기를 많이 하였을 것이고 자연스레 한국이라는 나라는 투르키에인들의 기억에 깊이 남게 됩니다.
한국과 투르키에는 피로 맺어진 결코 가볍지 않은 인연입니다.
투르키에인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사실 이슬람 문화에서 '형제'는 특별한 의미보다는 그냥 친밀하다는 표현입니다.
일부에서는 고구려와 돌궐족의 인연으로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데 이는 지나친 추측입니다.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라면 북한도 형제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