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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및 상좌불교에서 죽음의 명상
김 재성(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I. 머리말
불교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포함한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해 제시된 가르침이다. 사성제 대표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인 멸성제 즉 열반의 실현에 있다. 열반이란 불사(不死, amata), 적정(寂靜, santi), 무사(無死, amaccu)와 동의어이다. 불교의 목적을 이루는 일은 바로 죽음을 극복한 상태를 이룬 것이 된다. 따라서 죽음은 초기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과 직결되어 있다.
여러 가지 괴로움 가운데 죽음은 생명 있는 존재는 누구나 겪어야만 하는 실존적인 문제이며 고타마 붓다가 극복하기 위해 출가한 문제이다. 출가하기 전의 고타마 붓다는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라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고자 결심하며, 젊음과 건강, 수명에 대한 도취를 버리고,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때, 아내와 아들, 아버지 그리고 권력과 세속적인 영화가 약속되어 있는 왕좌를 모두 떨쳐버리고 선(善, kusala)을 구하기 위해서 출가를 한다. 선이란 최상의 행복, 안온,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타마 붓다는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 대한 극복이 문제였으며, 깨달음을 얻으면서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선언하였다. 즉 죽음을 포함한 모든 괴로움을 극복한 것이다.
이처럼 극복해야 하는 실존적인 괴로움으로서 죽음을 초기불교에서는 어떻게 정의하고 있으며, 초기불교 및 상좌불교에서 죽음에 대한 명상이란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초기불교의 죽음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로는 후지타 코타츠(藤田宏達, 1988)의 「原始仏典にみる死」,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1988)의 「死をいかに解するか」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죽음과 죽음의 명상에 대한 초기불교 및 상좌불교의 입장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II. 초기불교에서 보는 삶과 죽음
1. 태어남(生)과 죽음(死)
초기경전에서 사성제(四聖諦)를 설명하는 가운데 첫 번째 진리인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苦聖諦)에서 태어남과 죽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비구들이여, 태어남(生)이란 무엇인가. 중생들이 이런 저런 중생(衆生)의 부류에서의 태어남, 출생, 입태(入胎), 나타남[abhinibbatti, 化生 등으로 顯現하는 것], 무더기들[五蘊 : 色受想行識]의 생겨남, 감각기관들[六入: 眼耳鼻舌身意]의 발생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죽음(死)이란 무엇인가. 중생들이 이런 저런 중생(衆生)의 부류에서의 죽음, 죽는 것, 파괴, 사마(死魔)의 死, 일생의 종결,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의 파괴, 신체를 버림, 생명기관[命根]의 끊어짐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위의 정의에서 보면 태어남이란 인간을 포함한 뭇 생명[衆生]의 육체[色=眼耳鼻舌身]와 정신[名=受想行識]이 생겨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죽음이란 육체와 정신의 소멸이며 생명기관[命根]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2. 죽음의 문제
죽음은 궁극적으로 극복해야 할 괴로움[死苦]의 하나이자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이 당면하고 있는 실존적인 문제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죽음에 대해서 많은 반성적인 사유를 하고 있다. 먼저 죽음은 위기적인 상황으로 묘사된다. 먼저 숫타니파타 「대품」 화살경(Salla-sutta)을 보자.
이 세상에서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아, [언제까지 살지] 알 수 없고,
비참하고, 짧으며 고뇌로 얽혀 있다.
태어난 존재에게 죽음을 피할 방도는 없다.
늙음에 이르러 죽음을 맞이한다.
정 말로 생명 있는 존재에게 이것은 정해진 이치(법)이다.
익은 과일은 떨어질 두려움이 있는 것처럼,
이와 같이 태어난 자는 항상 죽음 때문에 두려움이 있다.
「팔게송품」의 늙음경(Jarā-sutta)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아 짧구나, 인간의 목숨이여! 백 년도 못되어 죽어버린다.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늙어서 죽는다.
인생은 오래 산다 해도 백년이며, 결국은 늙어서 죽는다고 하는 자각은 삶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생존기간이 길지 않은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얻기 어려운 기회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유명한 <눈먼 거북이[盲龜遇木]>의 비유는 인간으로 태어난 삶의 소중한 가치를 느끼게 해준다. 이 이야기는 중간 길이의 가르침(中部)에 나오며, 한역 잡아함경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구멍이 하나 있는 판자를 큰 바다에 던졌다고 하자. 그것을 동풍이 서쪽으로 옮기고, 서풍이 동쪽으로 옮긴다. 북풍이 남쪽으로 옮기고, 남풍이 북쪽으로 옮긴다. 거기에 눈먼 거북이가 있어, 백년에 한 번씩 바다 속에서 떠오른다고 하자.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눈먼 거북이는 그 구멍이 있는 판자에 목을 집어넣을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만일 가능하다고 한다면 언젠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일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눈먼 거북이 구멍이 있는 판자에 목을 넣는 것은 오히려 빠른 것이다. 그것보다 한 번 악처(惡處: 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진 중생이 인간의 상태를 얻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나는 말한다. 그 것은 그들에게 법에 맞는 행위(dhamma-cariyā 法行), 바른 행위(sama-cariyā 正行), 좋은 행위(kusala-cariyā, 善行),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cariyā 功德行)가 없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좋지 않은 행위 때문에 한 번 악처에 떨어진 중생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주 어렵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 비유가 전해주는 가르침에 따라 현재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들은 얻기 어려운 귀중한 삶을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인간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절박함을 강조하면서, 인간으로 태어난 삶의 가치를 자각시켜서 소중한 인생의 여정을 수행을 통해서 향상시킬 것을 강조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죽음에 대한 명상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III. 초기불교의 죽음을 주제로 한 명상
불교는 생노병사의 실존적인 괴로움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 좋아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집착[五取蘊]의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이 가운데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열반임을 앞서 간단히 말했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초기불교의 모든 수행법은 바로 죽음을 극복한 열반을 위한 직접적 또는 간접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죽음을 주제로 한 수행법을 다루어 본다. 죽음을 주제로 한 대표적인 수행법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 죽은 시체를 관찰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부정관(不淨觀)과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念死 또는 死念) 그리고 죽음을 상기(想起)하는 수행(死想)이다.
1. 부정관(asubha [bhāvanā])
부정관은 탐욕의 성향이 있는 사람(貪行, rāga-carita)의 탐욕 또는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기 위한 수행이다. 외적으로는 타인의 육체(시체)가 부패하여 백골로 변해가는 9가지 모습(九想) 혹은 10가지 모습(十想)을 눈으로 직접 보고 난 후 상기(想起)하는 방법과 내적으로는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요소(31가지 또는 32가지)를 상기(想起)하면서 부정(不淨)하다고 생각하는 수행법이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부정관 수행의 목적이다.
죽은 시체를 대상으로 하는 부정관 수행법은 대념처경의 신념처 가운데 <9가지 묘지에서의 관찰>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죽어 있는 시체가 부패해서 해골이 되는 과정을 직접 관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비구들이여, ①묘지에 버려져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 된 시체가 부풀어 오르고, 검푸르러 지고, 썩어 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버려진 시신의 부패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어 간다. ‘②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까마귀, 매, 독수리, 개, 표범, 호랑이, 재칼 등에 의해서 먹혀지고, 갖가지 벌레에 의해서 파 먹히는 것을 보았을 때, .... ③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이 남아 있고, 살점이 붙어있는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 ④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이 남아 있고, 살점은 없이 핏자국만 얼룩진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 ⑤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만 남아 있고, 살점이나 핏기가 없는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 ⑥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여기에 손뼈, 저기에 발뼈, 정강이뼈, 넓적다리뼈, 골반, 등뼈, 두개골 등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 ⑦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조개껍질의 색처럼 하얗게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 ⑧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일 년도 더되어 한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 ⑨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뼈마저 썩어 가루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생각하면서 몸에 대한 마음챙김[身念處]의 한 방법으로 부정관을 닦는다.
대념처경에서 제시된 부정관으로서의 신념처가 시신을 보면서 자신도 이러한 시신처럼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하는 수행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죽음에 대한 명상의 속성도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는 붓다의 출가의 동기가 된 사문유관 가운데 죽은 시체를 만나서 붓다가 느꼈던 절박감과 관련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 알려져 있는 4가지 충격적인 체험에 대한 이야기에서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피할 수 없는 실존적인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자각하여 두려운 마음(saṃviggahadaya, Ja i 59)을 일으킨 것이며, 이 사건 가운데 죽음에 대한 인식이 가장 절박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 시신을 대상으로 한 부정관은 죽음의 명상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2.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死念, maraṇa-sati)
죽음을 주제로 한 수행법으로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즉 사념(死念)이다. 사념은 10가지 마음챙김[十念] 가운데 하나이며 한역에서는 염사(念死)로 번역되어 있다. 초기경전에서 십념(十念)이라는 용어로 정리되어 제시된 예는 한역 증일아함경에서만 보이지만, 팔리 경전인 앙구따라 니까야에서도 10가지 항목이 2곳에서 함께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념은 어떻게 수행하는가에 대해서 앙구따라 니까야에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있다.
비구들이여, 사념을 닦으면 큰 결실, 큰 이익이 있고, 불사(不死)에 이르고, 불사를 목적으로 한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사념을 닦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여러 명의 비구들이 자신들이 닦고 있는 사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어떤 비구는 ①하루 낮밤 동안에 살 것이다(ahaṃ rattindivaṃ jīveyyaṃ)라고 하고, 그 동안에 세존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많은 수행을 하리라고 다짐하면서 사념을 닦는다고 말했다. 다른 비구는 ②하루 낮 동안 살 것이다(divasaṃ jīveyyaṃ)라고 하며, 순차로 시간의 길이가 다음과 같이 짧아지고 있다. ③한 번 탁발한 음식을 먹는 동안(ahaṃ tadantaraṃ jīveyyaṃ yadantaraṃ ekaṃ piṇḍapātaṃ bhuñjāmi), ④4-5번 먹는 동안(ahaṃ tadantaraṃ jīveyyaṃ yadantaraṃ cattāro pañca), ⑤한 번 먹는 동안(ahaṃ tadantaraṃ jīveyyaṃ yadantaraṃ ekaṃ ālopaṃ saṃkhāditvā), ⑥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내쉬고 나서 들이마시는 동안에 살 것이다(ahaṃ tadantaraṃ jīveyyaṃ yadantaraṃ assasitvā vā passasāmi passasitvā vā assasāmi)라고 6명의 비구가 차례로 사념을 닦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렇게 6종류의 사념을 닦는 방식에 대해서 붓다는 ①-④까지의 방식은 「게으름에 머물고 있으며, 모든 번뇌를 소멸시키기 위한 사념을 둔하게 닦는 것」이라고 하는 반면 ⑤-⑥의 방식으로 사념을 닦는 것에 대해서는 「게으르지 않음에 머무는 것이며, 모든 번뇌의 소멸을 위한 사념을 민첩하게 닦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목숨은 하루가 아니라 한 끼의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보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 번 음식을 먹는 동안이나 한 번 호흡을 하는 동안에도 죽음에 대해서 잊지 않고 붓다의 가르침을 많이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죽음에 대해서 잊지 않고 마음을 챙기는 수행인 사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념을 닦으면 모든 번뇌가 소멸하고 죽음이 없는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은 엄격하게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면서 수행해 나갈 때, 죽음을 초월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청정도론의 사념(死念) 또는 사수념(死隨念)
초기경전에서는 사념을 닦고 어떤 과정을 밟아 불사의 경지인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팔리 주석 문헌인 청정도론에 의하면 사념을 닦으면 욕계정인 근접삼매만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죽음이라는 명상 주제는 고유성질을 가진 법이고 또 절박함을 일깨우기 때문에 본삼매에 이르지 못하고 오직 근접삼매에만 도달한다.
초기경전에서 십념으로 제시된 수행법은 청정도론에서는 十隨念(dasa-anussati)으로 정리되었다. (1) 불(佛)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佛隨念, buddhānussati), (2) 법(法)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法隨念, dhammānussati), (3) 승(僧)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僧隨念, sanghānussati), (4) 계(戒)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戒隨念, sīlānussati), (5) 보시(捨)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捨隨念, cāgānussati), (6) 천신(天神)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天隨念, devatānussati), (7) 죽음(死)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死隨念, maraṇānussati), (8) 몸(身)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身至念, kāyagatāsati), (9) 호흡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出入息念, ānāpānasati), (10) 평온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寂止隨念. upasamānussati).
죽음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에 대해서는 청정도론 8장 <반복적인 마음챙김에 대한 해설(anussatikammaṭṭhāna-niddesa)>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청정도론에서 죽음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죽음이란 한 생에 포함된 생명기능이 끊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기능이 끊어진 것이라 불리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이라고 한다. 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조용한 곳에 혼자 머물면서 “죽음이 올 것이고, 생명기능이 끊어질 것이다.” 혹은 “죽음”, “죽음” 하면서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는 비구는 항상 게으르지 않고, 모든 존재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생각[想]을 얻는다. 그리고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무상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며 따라서 괴로움에 대한 생각과 무아에 대한 생각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죽을 때 두려움도 몽매함도 없이 죽는다. 만약 이 생에서 불사(不死)를 얻지 못했다면 죽은 후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한다.
청정도론에서는 ‘모든 것에 유익한 명상 주제(一切處業處, sabbatthaka- kammaṭṭāna)’로 3가지를 제시한다. 모든 것에 유익한 명상 주제는 수행자의 특정한 근기나 기질에 상관없이 누구나 닦아야 할 수행법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 내용은 자애명상(mettā),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maraṇasati), 부정관(asubhasaññā)이다.
4. 죽음에 대한 상(死想; asubhasaññā)
죽음에 대한 상기는 5상(想), 7상, 9상, 10상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어 있다. 5법 또는 5상(想)으로 부정수관(不淨隨觀), 음식에 대해 싫어하는 상(食厭想), 모든 세간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상(想), 모든 행에 대한 무상상(無常想), 죽음에 대한 상(死想)이 제시되며, 부정상(不淨想), 사상(死想), 혐오상(嫌惡想), 식염상(食厭想), 모든 세간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상(想)이 제시되는 예도 있다. 7상(想)으로 부정상(不淨想), 사상(死想), 식염상(食厭想), 모든 세간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상(想), 무상상(無常想), 무상에 대한 고상(苦想), 고에 대한 무아상(無我想)이 제시된 예가 있다. 9상(想)으로는 부정상(不淨想), 사상(死想), 식염상(食厭想), 모든 세간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상(想), 무상상(無常想), 무상에 대한 고상(苦想), 고에 대한 무아상(無我想), 사단상(捨斷想), 이욕상(離欲想)이 제시되어 있다. 10(想)으로는 위의 9상(想)에 멸상(滅想)이 추가된 예가 있다.
이처럼 선정 수행의 방법으로 제시된 여러 가지 상(想)은 바로 각각 대치하는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 제시된 명상수행이다. 위에서 보는 경우와 같이 죽음에 대한 상(想)은 부정상, 무상상과 함께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초기경전에서 죽음에 대한 상(想)이 어떤 수행인지 설명된 곳은 없다. 다만 앙구따라 니카야에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비구들이여, 만일 죽음에 대한 상(想)을 쌓은 마음으로 가득차서 머물고 있는 비구의 마음이 생명에 대한 욕구에 빠지지 않고, 싫어하고, 돌아서고, 나아가지 않고, 평정 또는 싫어하는 생각이 계속된다면, 비구들이여, 이 비구는 “나는 죽음에 대한 상을 닦았다. 나는 이전과 이후의 구별이 있다. 나는 수행의 결과를 얻었다고 알아야 한다. 이렇게 그는 정지(正知)있는 자가 된다. 비구들이여, 죽음에 대한 상을 자주 닦으면 큰 결실, 큰 이익이 있고, 불사(不死)에 이르고, 불사(不死)를 목적으로 한다.
이 경전에 의하면 죽음에 대한 상[死想]을 거듭 닦으면 생명에 대한 집착이 극복되고 분명한 앎[正知]를 얻게 되어, 궁극적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여, 불교의 궁극적 목적에 이르는 한 가지 방법임을 확인할 수 있다.
IV. 맺는말
이상 초기불교와 청정도론에 제시되어 있는 죽음에 대한 이해와 죽음을 주제로 한 초기불교 및 상좌불교의 수행법을 살펴보았다. 죽음을 주제로 한 수행법에는 부정관,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死念), 죽음에 대한 상(死想)의 세 가지가 있으며, 이 수행법들은 생명에 대한 집착을 끊고, 죽음을 극복한 불사(不死)의 경지인 열반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죽음을 명상한다는 것은 한 번 호흡하는 동안이라고 죽을 수 있다는 생명의 절박함을 인식하는 것이며,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게으르지 않고 수행할 수 있는 마음자세가 생겨나게 되어, 궁극적으로 죽음을 극복해야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은 또는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은 청정도론에서는 모든 것에 유익한 명상 주제(sabbatthaka-kammaṭṭāna)로 제시되어 있고, 현재 남방불교에서 위빠사나 수행에 들어가지 전에 마음을 보호하는 4 가지 명상 가운데 한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은 삶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덜어놓는 수행으로 보조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삶은 얻기 어렵고 소중하다는 맹구우목의 가르침과 삶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극복하고 순간순간 깨어서 정진하라는 죽음에 대한 명상은 인간의 삶의 소중함과 소중한 인생에서 죽음이 오기 전에 삶을 향상시키는 노력을 하라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죽음으로 초래되는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때 삶의 중요성은 더욱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본고에서 살펴본 초기불교와 상좌불교의 죽음에 대한 명상은 삶을 완성하는 명상이며, 죽음을 극복하는 명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죽음(death), 죽음의 명상(meditation on death), 사념(死念, maraṇasati), 염사(念死, maraṇa-saññā), 사상(死想, maraṇa-anussati), 사수념(死隨念, asubha-saññā), 부정관(不淨觀)
The Meditation on death in the early and Theravāda Buddhism
Kim, Jae-Sung (Seoul Graduate School of Buddhism)
This article focuses on the meaning of death and the meditation on death (maraṇasati or maraṇa-saññā) in the early Buddhism and Theravāda tradition. Death is a kind of existential suffering and provides an important opportunity for our spiritual development.
According to the Buddhist teaching, to be born as a human being is very difficult chance to get. We can improve our spiritual path through the realization of the urgency of our death.
In the early Buddhist literatures, the meditation on death was supposed to help us overcome our attachment to life and our unheedful, lazy attitude of practice, and thus eventually attain the final liberation, nibbāna. The key point of the meditation on death is to feel the impact of death in each moment between in-breath and out-breath, or every bite of food. When we understand and accept our death as an unescapable reality of our life, the meaning and real value of our life become clearer, motivating us to cultivate spiritual path, which will enable us to overcome our attachments and fundamental defilements. The meditation of death is a practice that leads us to overcoming of death itself and thus to full accomplishment of our life
첫댓글 부정관을 할때 실제적으로 남방에서는 주검을 가지고 한다고 하지요. 현대사회에서는 해부학의 해부도나 해부하는 장면을 보면서 부정관을 하는 것이 유익할 것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