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42
ㅡ 일천년래제일대사건, 묘청의 난 3, 마지막 편ㅡ
'묘청'은 오랫동안 '신채호'와 같은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에게 이상적인 ‘개혁가’, ‘반사대주의자’ 로 찬미되었다.
그 영향으로 나 또한 최근까지는 '묘청'을 우리 역사상 다시보기 힘든 진취적 혁명가로 보아 왔다.
묘청과 대칭에 있었던 '김부식'은 기득권이나 지키는 보수주의자 혹은 사대주의자로만 알았다.
'묘청의 난'이 고려사회에 깊숙한 변화를 가져왔고 후세에 엄청난 사건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묘청의 난'은 희극적인 돌발사건이었다.
앞 편에서 설명했듯이 '묘청의 난' 진행과정을 보면 묘청은 난이 시작된지 17일만에 내부세력에 의해 처형된다.
그럼에도 서경반란군은 와해되지 않았고, 1년 넘게 지속되었다는 것은 묘청이 그 세력속에서 주요 인물이 아니였다는 것을 방증해 보여준 것이다.
반란 자체가 묘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묘청 사망과 함께 난은 쉽게 끝났거나 묘청 처형에 대한 큰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묘청의 난'은 묘청이 서경천도 가능성만 믿고서 모든 일을 밀어 붙여 왔는데, 초기에는 묘청과 뜻을 같이 해온 '인종'이 여러가지 이유로 천도를 결정하지 못 하고 머뭇거리자 이에 분노해 묘청 혼자 일방적으로 폭주해 버린 것이란 게 일반적 견해이다.
묘청은 서경 백성과 군사들에게 군사를 일으켜 '칭제건원' 하면 인종이 서경으로 와서 황제에 오를 것이라면서 설득하였으리라 본다. 아마 묘청 본인도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라를 세우고도 황제자리는 비워 둔 것 이었다.
그런데 인종은 그러기는 커녕 김부식을 총대장으로 하는 진압 대군을 서경으로 보냈다.
묘청 말만 믿고 군사를 일으킨 서경장수들은 진압군을 보고 맨붕이 와서 곧 바로 묘청을 잡아 목을 베고 묘청 목과 함께 김부식 진압군에게 사람을 보내 항복 하겠다 한 것이다.
게다가 '정지상'등 다른 서경파 인물들은 묘청이 서경에서 느닷 없이 홀로 폭주할 줄 전혀 모르고 개경에 남아 있었던 것만 봐도 그렇다.
또한 묘청과 같이 '금정벌론'을 주장해왔던 윤관아들 '윤언이' 마저 김부식 진압군장수로 참여 하기까지 한다.
이처럼 '묘청의 난' 시작과 과정은 돌발적이고 희극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고려사회 전반에 너무나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치 현대의 <1979년 김재규에 의한 10.26사건>이나, <2024년 윤석열 12.3 비상계엄선포>처럼 터무니없고 뜬금없는 사태였으나
우리 사회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 현대사학자들 평가는 '묘청'은 '정지상'등 서경파 광대에 불과했다고 본다. 즉 서경파가 서경천도를 밀어붙이기 위해서 묘청에게 성인 이미지를 덧붙여 내세운 얼굴마담에 불과했을 뿐 이라는 것이다.
묘청의 난은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우리나라 역사전개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은 아래와 같다.
첫 째, 서경은 고려태조 왕건이 훈요10조에 언급할 정도로 중시 되었다. 그래서 고려는 '분사'를 설치하여 운영하는등, 서경을 제 2 수도로 취급했다. 그러나 '묘청의 난' 이후, 조정에서는 '분사어사대'와 '감군'을 제외한 서경 모든 관서를 혁파하였다. '분사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고려 개경파 문신귀족사회가 안고있던 정치적· 사회경제적 모순과 폐단은 더욱 심화되었다.
둘 째, 묘청의 난은 무신 중요성이 부각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윤관의 여진정벌,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 연이은 사태로 공을 세운 무신들이 많아지면서, 무신들 입지는 이전보다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숭문천무' 정책 에서 비롯된 문신들 무신멸시는 여전했다. 때문에 무신 힘이 커질수록 그 불만은 점점 커져 갔다. 결국은 묘청난 이후 수 십년 도 안 되어 '무신정변'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셋 째. 고려 정체성에 대한 인식 에도 변화가 생겼다. "고구려를 계승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에서 "삼한을 통일한 신라의 뒤를 이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로 변했다.
즉 우리민족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 의해 영토적으로 한반도 에만 갖혀 지냈는데 묘청의 난 실패로 인해 정신적으로도 한반도 에만 갖히게 된 것이었다.
이를 신채호는 너무 안타갑게 생각하고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
으로 본 것이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일파는 개경 문벌귀족 선두에 우뚝 섰다.
김부식일파는 실현가능성 여부를 떠나 서경파의 자주적 기백과 진취적 사상에 깜짝 놀라 더 이상 이런 상황 좌시해서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다.
이에 김부식은 유교주의 정치철학 입장에서 우리 민족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삼국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확신에 찬 주장을 펼친다.
이에 인종은 김부식 주장대로 역사편찬을 명했고 1145년 한국 최초로 우리나라 고대국가 역사를 체계적으로 구성한 정사 국정 역사서, 중국 사마천 '사기'를 본떠 '기전체'로 쓰여진 '삼국사기'가 세상 빛을 보게 된다.
이는 단순한 역사기술이 아닌, 고려 정체성을 ‘유교적 중화질서’ 안에 정립하는 정치적 시도였다.
'신채호'등 민족사학자들은 '삼국사기'는 고조선·고구려사를 축소하거나, 단군신화 배제했고, 신라 중심 서술을 택했다고 봤다.
이는 당시 송·금과 외교와 국제 질서에서 고려의 안정적 입지를 도모하려는 사대주의적 선택 이었고 이후 우리민족은 사대주의 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는 것이다.
나 또한 '삼국사기'에 대해 상당 기간동안 민족주의 사학가들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 했었다.
그러나 역사 글을 쓰면서 시각이 좀 바뀌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편>에서 자세히 정리하겠다.
어쨌던 신채호처럼 민족사학가 들이 그 동안 묘청의 난에 대해서
<묘청 vs 김부식, 자주 vs 사대, 불교 vs 유교>라는 이분법적 해석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서사일 뿐이다.
역사를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인물들이나 사건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역사를 배우다 보면 역사를 단순한 흑백논리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역사를 재단해 놓은 것을 보는 경우가 자주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채호가 '묘청의 난'에서 '서경파'와 '개경파'를 이분법적으로 갈라 놓은 것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훈구파'와 '사림파' 혹은 '동인' '서인' '노론' '소론'등 당쟁을 비교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우리 학창시절 역사시험에서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선택하게 하는 문제를 낸다. 잘못된 것이다.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역사 속 어떠한 사건이나 인물등을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따라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어쨌던 '묘청의 난'이 고려를 엄청나게 변화시킨 것 만큼은 사실이다
묘청은 '자주'를 상징은 했지만 실질적 대안은 제시하지 못했고, 김부식은 '사대'를 따랐지만 국제 정세를 고려한 현실주의자였다.
역사는 늘 이념과 현실, 의도와 결과, 이상과 조건 사이의 긴장 속에서 흐른다.
묘청의 난은 실패한 혁명이자 비극적 해프닝이지만 동시에 고려사 정체성과 권력구조를 재편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묘청의난 사건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이분법으로 단정짓지 말고, 다양한 시각과 사료를 통해서 복합적 이해로 접근해야 함을 배워야 한다.
'삼국사기'도, '삼국유사'도 모두 우리 역사이며, 어느 하나만으로 진실에 다가설 수 없다.
<역사는 흐른다>는 한 줄기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여러 갈래로 흐른다.
우리의 역사를 보는 시선도 여러 갈래 흐름만큼이나 유연해야 한다.
우리는 그 갈래 속에서 역사의 진실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편찬과 비교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아래 문제가 꽤 어렵습니다.
역사흐름보다는 세세한 부분을 요구한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는 문제있지요?^^
하지만 제 글을 꼼꼼히 읽었으면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