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아버님, 흥남 덕리 특별노무자수용소로 이감, 비료공장에서 강제노동 (1948.06.21, 북한 흥남)
참아버님께서는 1948년 2월 22일 기성 기독교 교단과 공산당국의 종교 말살정책이 야합한 상황에서 평양내무서에 구금되셨다. 참아버님은 평양내무서에서 가혹한 고문 취조를 당하시고 1948년 4월 7일 사회질서 문란 죄목으로 5년형 판결 후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셨다. 다시 1948년 6월 21일 흥남감옥(흥남 덕리 특별노무자수용소)으로 이감되어 비료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하게 되셨다.
북한의 흥남감옥은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십자가 형틀과 같은 곳이었다. 참아버님은 십자가와 같은 흥남감옥에서 살아남아야 했으며, 12명 이상의 제자를 찾아 세워야 했다. 그럼으로써 참아버님께서는 몸소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워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하셨다. 또한 참아버님께서는 흥남감옥에서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동시에 사탄의 법도도 지켜야만 했다.
참아버님은 처참한 환경에서도 누구보다도 늦게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 기도와 정성의 생활을 하셨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주는 참사랑을 실천하셨다. 참아버님은 ‘감옥의 성자’로 불렸다. 처음 2주간은 급식의 절반을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충모님이 가져온 미숫가루와 옷들도 모두 재소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감방에서는 누구나 회피하는 가장 더러운 변기통 옆자리를 스스로 택하셨다. 노동현장에서도 동료들을 위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셨다. 재소 기간에 3회나 모범노동자상을 받으셨다.
이렇게 참아버님은 평양내무서에 수감될 때부터 흥남감옥에서 해방될 때까지 약 2년 8개월간 예수님의 십자가노정을 탕감복귀하는 노정을 승리하신 것이다.
<말씀>
선생님은 북한 땅에 들어가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원수에게 몰려 흥남감옥에서 영어의 몸이 되어 처참한 고문을 받고, 비료공장에 가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중노동도 했지만, ‘나는 망하지 않는다. 나의 명령에 따라 나의 불붙은 이 심정을 인계받은 세계의 모든 젊은이들이 불타는 가슴으로 폭탄을 안고 북한 땅을 향하여 총진군하는 한때가 올 것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지냈습니다. (천10.3.4:25, 022-157, 1969.02.02)
선생님이 흥남감옥에서 일할 때, 겨울 그 추운 때에 맨손으로 암모니아 비료 가마니를 날랐습니다. 살이 갈라져 뼈가 보일 정도가 되어 피가 나는데도 매일같이 암모니아 비료를 날랐습니다. 보통 면 제복은 일주일 이내에 다 뭉개지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반년만 일하게 되면 몸 세포가 죽어서 짜면 물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문자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힘들면 이 이상 될 때는 하늘을 저버릴 것이고, 하늘의 배신자가 될 것이 아니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11.5.2:27, 073-160, 1974.08.29)
<출처 : 선학역사편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