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暘溪府君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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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군의 시조는 휘 襲明으로 고려때 한림학사 추밀원지주사로 예종,인종,의종 3대 왕을 섬겼는데 諫하다가 돌아가셨다, 영일의 오천서원에 향사지냈다, 6대조는 휘가 從韶로 문과중시 통훈대부 성균관사성을 지냈는데 문장과 절개로 이름이 높았다,
점필재 김공 종직이 일찍이 오천 정선생이라고 불렸다, 5대조는 휘가 以揮로 장수도찰방을 지냈고 고조부는 휘가 次謹이고 증조부는 휘가 允良으로 장사랑 창능참봉을 지냈고 퇴계의 문하에서 배우셨다, 조부는 휘가 世雅로 황산도 찰방을 지냈는데 병조참판에 추증된 것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功을 사양하고 벼슬하지 않고 산림에서 물러나 살면서 江湖叟라 자호 하셨다, 부친은 휘가 安藩으로 禦㑄將軍 龍驤衛副司果를 지내셨다, 모친 淑人응 花山權氏인데 嘉善大夫 工曹參判에 추증된 휘 克立의 따님이시다, 부군은 휘가 好仁으로 자는 子見인데 만력 정유 1597년 8월 19일에 정축 亥時에 立岩里 부군의 외가댁에서 나셨다, 부군께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민하여 5~6세 때에 글을 알고 9세에 모당손선생의 문하에 가서 수학하셨다, 손공은 산립에서 숨어있어 誼를 행하며 師道로 자처하시니 배우려오는 사람이 많았다, 부군께서는 한결같이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서 재주와 학업이 일찍이 통달하고 글을 지음에 왕왕 사람을 놀라게 하니 동문의 선비들이 모두 따르지 못한다고 여겼다, 14세 때에 별과향시에 맞추었는데 이때부터 누차 향시에 응시하여 장원하니 과거보는 사람들이 그 글을 전하여 외우며 예원(藝苑)의 절창(絶唱)이라 여겼다,
무오년 1618년에 진사에 뽑혔으나 당시에는 광해군의 정사가 어지러우므로 부군께서는 문을 닫고 과거에 응시하지도 반관(泮官)에 들어가지도 않으셨다,
권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말씀하시기를,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는데 벼슬길에 무슨 마음이 있겠는가? 라고 하셨다, 이에 앞서 旅軒 장선생이 군북쪽의 立岩에 거처하시매 부군께서는 항상 왕래하며 강론하고 질문하시다가 을미년 1619년 봄에 집지(執贄)의 예를 행하고 경전(經傳)의 뜻을 물으니 張선생께서 심히 敬重하셨다, 庚申年1620년에 性理學의 여러 서적을 읽으시고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비로소 과거에 응시 해서 정묘1627년에 及第 丙科에 발탁되니 鄭相國 維城이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재상의 그릇이다, 고 하셨다, 12월에 權知成均館學諭를 補任하였다,
나라의 풍속에 새로 관직에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晩新禮를 행한 후에라야 비로소 취직을 하였는데 부군께서는 이를 즐겨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안달하며 급히 하겠는가? 라고 하셨다, 이때문에 여러해 동안 관직에 발탁되지 못했다, 庚午 1630년에 부친상을 당하고 辛未 1631년에 또 모친상을 당하여 슬프함이 지나쳤으며 전후의 장례와 제사지내는 예절에 그 정성과 신중을 다하셨다, 상복을 벗고 성균관학유를 지내고 甲戌1634년에 學錄 겸 춘추관 기사관 또 학정을 역임하셨다, 乙亥 1635년에 典籍으로 승진하고 그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겨 임명되었다가 얼마 있지 않아 버리고 귀향하셨다, 丙子1636년 봄에 북방에 일이 많아 差使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管餉使가 조정에 청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鄭某를 얻어 從事官으로 삼아야만 差使의 일을 감당해낼수 있습니다, 라고 하고 狀啓를 띄워 불렸으나 길이 멀어 미처 부임하기전에 교체되었다, 겨울에 金나라 사람이 많은 군사를 일으켜 처들어오니 임금의 수례가 황급하게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시자 부군께서는 급히 行在所로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와 향리의 유지에게 말하기를, 임진란때 우리 조부께서는 布衣로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셨다, 나는 벼슬하여 국록을 먹고 있으면서 어찌 충의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시고 드디어 격문을 지어 의병을 모집하니 원근에서 호응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무리가 수백명이나 되었는데 그때 舍弟인 好問께서 陣中으로 편지를 보내와 생사를 같이하기를 청하니 부군께서 답신을 보내셨다, 그 대략은 이르하다, 임진왜란때 우리 조부께서 왜적을 토벌하시고 백부께서는 왜적을 꾸짖다가 전사 하셨으니 충의는 곧 우리 가문의 내려오는 사업이다, 나는 비록 不肖하나 어찌차마 나라의 변란을 좌시하여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릴수 있겠는가? 지금 생사를 이미 결단하였으니 天佑의 힘을 입어 나라의 수치를 조금이라도 씻는다면 다행이다, 비록 불행하여 적의 손에 죽어서 마혁(馬革)에 싸이더라도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陣中에 와서 일을 같이한다는 말은 이야말로 古人의 형제가 죽음을 다툰 義라 감분하여 눈물이 옷깃을 적시게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 누가 선조의 宗廟를 보호할 건가? 천만번 情을 참을지로다,
成昌의 경계에 이르니 觀察使가 불러 參謀로 삼았다, 그때 全沙西 湜이 의병의 대장이 되어 부군으로 前管將으로 삼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鄭某는 선비라 軍事에는 능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으나 全公은 듣지않고 前營將을 맡겼다, 부군께서는 陣을 치고 병사를 조련함에 있어서 규율이 아주 엄하였다, 전공이 다른 사람에게 칭찬하여 말하기를, 내가 본래 정모는 큰일을 감당할수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렇도다, 라고 하였다, 얼마 있지않아 또 副元帥의 從事官으로 幕下에 부임하셨다, 대체로 부군께서는 본래 재주와 도량으로 소문이 났기 때문에 일시에 제진(諸鎭)의 장수들이 서로 다투어 불러 중책을 맡기려고 하였다, 丁丑1637년 정월에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리자 부군께서는 임금의 수례를 따라 서울에 돌아 오셨다, 강화(講和)하는 일에 비분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을 머무르다가 즉시 고향으로 내려오셨다, 從弟 好禮에게 준 편지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라의 일을 통곡한다,삼백년 예의의 나라가 하루 아침에 淸나라에 신하로 굴복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비록 동해의 물을 기울여 이 수치를 씻으려 해도 씻을수 없으니 어찌할꼬! 어찌할꼬!
胡亂초에 군사를 불러 모은 글과 깃발 무기 등의 물건은 지금도 군중에 전하여 故事로 삼고있다, 3월에 立岩에 가서 旅軒 장선생을 뵈으니 선생은 時事가 더욱 변한것을 보고 마침내 卓立岩과 더불어 여생을 마칠 생각을 하셨다,함께 입암의 신령에게 제사지내는데 告由文을 부군으로 대신 짓게 하셨다, 告由文이 다 지어지자 장선생은 입으로 몇 구절을 불러 그 끝에 달고 제사지냈다, 당시에 門下에 대신 지을 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체로 부군께서 분개하는 마음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달에 典籍을 맡고 5월에 刑曹佐郞을 배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으셨다,
6월에 또 형조좌랑을 배수하였고 7월에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전임하였다가 말미를 얻어 귀향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직책에 나아가지 않으셨다, 戊寅 1638년 3월에 또 禮曹佐郞을 배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으셨다, 5월에 예조에서 병조좌랑으로 옮겼다가 6월에 그만두고 귀향하셨다, 9월에 병조정랑으로 승진했는데 겨울에 또 그만두고 귀향하셨다, 을묘 1639년 11월에 양산군수를 제수하셨는데 양산은 바닷가의 피폐한 고을이라 백성들이 고생을 견디지 못하였다, 먼저 大同法을 실시하여 요역(徭役)을 균등하게 하시니 몇년 사이에 온갖 폐기되었던 일들이 다 일어나 아전과 백성이 노래부르며 공덕을 찬송하였다, 이에 바다를 방어하며 수자리보는 병졸중에서 고생하는 자와 편안한 자가 균등하지 않아 觀察使가 법령을 개정하고자 했으나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온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鄭某가 아니면 이일을 맡길수 없다고 하므로 이에 觀察使가 監營으로 불러들여 이일을 맡겼다, 부군께서는 스스로 監營의 아전중에서 數에 밝은 李光喆등을 뽑아 바람이 온화한 곳과 바람이 세찬 곳을 구분하여 당번을 맡아 순찰하는 병사의 숫자를 더하거나 빼서 며칠이 채 못되어 조목이 벌써 갖추어지니 지금도 그대로 좇아 실행하고 있다, 鎭의 병졸들은 모두가 그것이 편리하다고 일컬었다, 1643년 겨울에 李晳이 敬差官으로 고을에 와서 무단히 트집을 잡으며 망령스리 위세를 부리므로 부군께서는 관직을 그만 두고 귀가하셨다, 方伯이 善政으로 인하여 끝내 허락하지 않고 또 館倭接慰官에 임명하니 어쩔수 없이 부임하였다, 郡에 伽倻津 神廟가 나라의 祀典中에 실려서 있었으나 전후의 수령들이 태만하여 제사를 거행하지 않았다, 부군께서 慨然해서 부흥시키니 갑신 1644년 가을에 觀察使 林墰이 그일로 칭찬하여 장계를 올렸는데 인조께서 교지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지금 본도의 장계를 보건대 경이 본군의 伽倻津 神廟를 나라를 위해 중건하여 짐의 마음을 편하게 하였으니 아주 아름답다, 특별히 겉옷과 속옷 한벌을 하사하노니 경은 받을지로다, 라고 하셨다, 10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관리의 인끈을 풀고 귀가하니 임담(林墰) 또 칭찬하여 장개를 올려 계속 맡게 하였으나 부군께서는 끝내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으셨다, 양산은 동래부와 접경하고 있는데 왜인들이 바치는 건어와 생선등의 물품은 백성의 세금으로 받는 것이 이미 관례가 되어있었다, 11월에 御使 任善伯이 이로써 죄를 꾸며 誣告하여 자기의 녹봉으로 사취했으니 헤아릴수 없는 무거운 죄에 처하여야 한다는 장개를 올렸는데 아마도 任과 부군은 평소에 서로 친하지 않은 때문일것이다, 갑자기 체포령이 떨어져 집안 사람들은 모두 황급히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부군께서는 조용히 재판관에게 나아가 실상을 헤아리니 추호도 어긋남이 없어 곧 사면을 받아 돌아옴에 담담한 태도였다, 양산 사람들이 去思碑를 세웠다,
정해 1647년 7월에 형조정랑을 배수 하고 12월에 예조정랑으로 옮기셨다, 무자 1648년 3월에 그만두고 귀향하였다가 5월에 또 예조정랑에 배수하셨다, 이달에 호조정랑으로 옮겼는데 회계가 귀신같이 분명해서 아전들이 감히 숨기지 못하니 조정에서는 참으로 大司農의 재주라고 여겼다, 6월에 春秋館記注官을 겸하고 7월에 晋州牧使겸 春秋館編修官를 제수하셨다, 8월에 부임하니 장부(帳簿) 책상에 쌓여 송사(訟事)가 뜰에 가득찼다, 부군께서는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것이 물흐르듯 매끄러워 처리하는데 여유가 있었다, 진주는 본래 시와 예의 고을이라고 불려졌으나 임진란 이후로 선비들은 시와 서를 익히지않고 한갓 활쏘기와 말타기만을 일삼았다, 부군께서는 탄식하고 학풍을 일으키는데 유의하여 선배들의 學舍의 의례를 본받아 매달 초하루에 校堂에 글 배우는 사람들을 모았다, 부군께서는 의관(衣冠) 정제하여 앉고 諸生들은 건복(巾服)으로 再拜의 예를 행한 후에 동서로 나누어 서서 同斐들과 서로 揖을 마친 다음 탁자를 堂가운데에 두고 訓長 한사람이 學規를 읽고 老儒들에게는 心經 近思錄및 洛建의 여려 서책을 강론하고 아동들에게는 小學과 四子등의 책을 講하였다, 그리고 鄕飮酒儀도 행하니 몇년 사이에 士風이 크게 변하였다, 임진란후에 官舍가 탕진하고 단지 矗石別館만 있었으나 빈객을 머물러 접대할 집이 없었다, 부군께서는 고을 백성들의 청을 따라 건립할 계획을 하였다, 농한기를 틈타서 널리 노는 인력을 동원하여 공사를 하는데 일체의 모든 경비는 관에서 다 부담하고 조금이라도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도 겨우 몇달만에 일이 끝났다, 이로 이것을 진주객사라 하였다,
庚寅1650년 2월에 동생의 喪을 당하여 부군께서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누차 사직할 뜻을 비춰 힘써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할 것을 청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5월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는데 짐은 아주 단출하여 書冊 몇짐뿐이었다, 이때부터 벼슬길에 뜻이 없고 날마다 朱子書 近思錄을 들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사색하며 글의 뜻을 철저히 연구하여 잠시라도 손에서 책을 놓은적이 없었다, 간간히 문인들을 이끌고 暘溪에 올라가서 시를 읖조리며 유연자적하여 양계로 자호를 삼았다, 시냇가에 기대어 몇칸의 집을 지어 한가이 물러나 강학을 할 곳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그뜻을 이루지는 못하셨다, 임진년1652년 공산현감을 배수하였으나 병때문에 부임치 아니하고, 6월에 합천군수를 배수하여 恩命이 여러차례 내려오므로 애써 부임하셨다, 갑오 1654년 2월에 남원도호부사로 옮겼는데 남원은 본래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불려져왔다, 부군께서는 부임한지 몇달이 지나 사람들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아전과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별로 놀랄만하게 남다른 일이 없으니 생각건대 전에 이 직책을 맡은 자가 刑法을 엄하게 하여 혹 변고가 생긴게 아닌가 한다, 나는 마땅히 관대하게 시험하리다,라고 하셨다, 府中의 子弟를 뽑아 강론하고 學課에 힘쓰게 하셨는데 진주에 계실때와 꼭 같았다,
이때부터 文風이 크게 진작되니 閔參判 應協이 서신을 보내어 慶賀하여 말하기를, 史曹에서 公이 재능과 식견이 있음을 알고 임금에게 아뢰어 오래있지 않아 크게 등용할 것이라 하니 이것은 朝野의 다행이다, 라고 했는데 부군께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씀하시기를, 내 돌아가 草堂에 누워 맑은 바람을 쐬는 것만 못하다, 라고 하셨다, 을미 1655년 봄에 약간의 병기운이 있었다, 그때 조정에 寺奴碑를 옮기고 고치는 일이 있었는데 명령이 극히 엄하여 이 일이 끝나기 전에는 비록 임기가 끝난 수령일지라도 갈마들어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부군께서는 억지로 병을 무릅쓰고 사무를 보셨는데 7월에 병세가 위독해져 11월에 任所에서 돌아가셨다, 臨終에 모든 아들을 경계하여 말씀하기를, 내가 죽은후에 初喪을 치르고 㚃柩를 운반하는 등의 절차를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여 府中의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라,하셨다, 喪을 당하니 境內의 사람들이 달려와 통곡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운구할때에 湖南의 士大夫 몇백명이 雲峯까지 호송하며 글을 지어 슬픈 情을 편 사람이 많이 있었다, 겨우 嶺南의 경계가 이르자 遠近에서 맞이하여 호송하러 나온 사람은 두루 다 헤아릴수 없었다, 10월 29일에 울산 정족산에 장사지내니 향년 59세이다,
오호라! 不肖 小子가 어찌 차마 다 말할수 있겠는가? 부군께서는 벼슬에 나가신후로 줄곧 名利에 뜻이 없어 비록 한양의 관직에 임명되어서도 1년을 머무르지 않으시고 평소에 절친한 친구라도 爵位가 높으면 추종하지 않으셨다, 일찌기 누차 中書省에 물망이 있었는데 잘아는 名士 한사람이 명예가 자기보다 나음을 꺼려해서 비방하고 무고하여 저지하였고 그후에 또 柏府및 東萊府使를 추천할 때도 모두 앞장 서서 이간질하였다, 府君께서는 이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길에서 서로 만나도 겸손하게 평소와 다름이 없으니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여 글을 지어 사과하고 조정에 힘써 추천하였으나 부군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다, 治民에 있어 부역을 균등하게 하고 민폐를 없이 했으며 대강을 잡고 세말(細末)을살피지 않으셨다, 사업을 함에 있어서 과도하게 경영하지 않아 백성들의 일을 도우고 말씀하시기를, 벼와 삼실을 내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은 백성의 도리다, 요사이 보니 治績이 있다는 자가 간혹 벼슬아치를 강제로 만들어 물건으로 바꾸어 징수하여 백성들의 부세(賦稅)를 도와주고 아전들이 그 전답과 집을 파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 역시 백성들의 것이니 하필이면 이런 식으로 백성을 영예롭게 해주어 명성을 구하려 하는가? 나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평소의 몸가짐과 하시는 일은 억지가 없었고 사람을 대하고 교제하는데는 반드시 성심을 다하셨다, 宗族과 어울리니 宗族이 화목하고 鄕黨에 거처하니 향당이 기뻐하며 따랐다, 집에 계실때나 대중을 거느림에 각기 환심을 샀으며 빈민을 규휼하고 喪事에 달려가는데 정성을 다하지 않은적이 없으셨다, 평소의 포부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하신 일도 다른사람에게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혹 알지 못하였다,
다른 사람의 착한 일은 즐겨 말하고 악한점을 말하지 아니하며 常理에 어긋나는 일을 만나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투지 않으셨다, 평상시에는 꾸미지 않았으나 대중을 대할때는 위엄이 있어 범하지 못할것 같았다, 선친인 司果公 께서 자녀에게 재산을 나누어 처리해주지 못하였는데 부군은 한 동생과 두 누이와 재산을 나눌때 노비는 노약자를 가지고 토지는 천박한 땅을 취하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벼슬을 하니 기아는 면할수 있다, 라고 하셨다,
부군께서는 마음씀이 청결하여 비록 여러차례 큰 고을을 맡았으나 털끝만큼도 자손을 위해 계책하지는 않으셨다, 관직에 있을때 전답과 집에서 나오는 수입은 전부 이웃마을의 宗族들에게 나누어주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오신날 집에는 한 항아리의 비축쌀도 없었으니 한결같이 담박하여 가난한 선비와 같으셨다, 配 淑人께서는 월성손씨로 충의위 魯의 따님이고 개천군 昭의 6세 손녀시다, 자애로운 은혜로 婦德이 있어 말을 빨리 하거나 당황하여 안색을 변하신적이 없으니 이웃마을의 宗族들 중에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부군이 돌아가신후 11년에 세상을 떠나시어 영천군 서쪽 艮龍 丑坐原에 장사지냈다, 계축 1673년에 부군의 묘를 옮겨 함장하였다, 3남2녀를 낳으셨는데 장남은 時行으로 부군의 喪中에 돌아가셨다, 차남이 時衍이고 삼남은 時衎은 生員이다, 장녀는 박종휘에게 차녀는 曺效良에게 시집갔다, 시행은 夏城 조승효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碩胄로 生員이고 차남은 碩耉이고 삼남은 碩祐이다, 딸은 사인 전수장과 金恒重에게 시집갔다, 시연은 前娶가 夏城 조윤효의 딸인데,3녀를낳았다, 장녀는 곽정현에게 차녀는 김언섭에게 삼녀는 김후에게 시집갔다, 후취는 달성 서행원의 딸인데 2남2녀를 낳았다,아들은 碩茂 碩夔이고 딸은 신덕영 채응하 에게 시집갔다, 시간은 밀성 박담의 딸에게 장가들어 7남2녀를 낳았다, 아들은 碩基 碩址 碩堅 碩載 碩埰 碩逵 碩培 이고 딸은 도만달 조선경에게 시집갔다, 박종휘는 1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세영으로 호군을 지냈고 딸은 송지곡에게 시집갔다,조효랑은 1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선장이고 딸은 정태징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증손 현손으로 남녀 약간 명이 있다,
不肖子 時衍은 눈물을 흘리고 삼가 씀,
*이 유사는 진주목사공의 둘째 아들 학암공 시연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쓰신 글 내용은 부군의 평소
행적을 소상하게 기록하였는데, 목사공의 아들들은 부군의 관청에 따라 다니며 섬기고 공부하였다,
특히 장남 무공랑 휘 시행은 부군의 곁에서 보좌하면서 조상을 받드는 일과 고향 영천 집안의 일들마다 심부름을 직접하시며 부군의 짐을 들어드렸는데 부군께서 일찍이 돌아가시니 세상의 모든 일들을 놓고 부군의 喪중에 식음을 전패하시며 슬프하시다가 부군의 상중 1년이 못되어서 운명을 달리하셨다,
*양계공의 묘갈명은 여헌 장선생의 양자 아들 장응일이 지었고,또 묘지명은 현감 영양 최우직이 짓다,
*청호서원 봉안문은 진사 송리석이 지었다,
*학암공의 유사에 밝혔듯이 광중에 많은 선비들이 곡을 하였다는 만사를 적어봅니다,
양계공의 상때에 보내온 만사와 제문이 수백 편 이라 전하나 거이 화난에 소실되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만사가 수십 편이 있어 간추려 문집에 실었고 책에 못 실은 것도 다수 이오나 선생의 시와 특히 선생이 생전에 무술을 연마한 것을 기록하여 두었지만 해석이 불가피 하여 고이 잠들고 있답니다,
갑자기 지난 일 슬프하노니, 머리 땋은 어린 시절에 서로 만났다,義를 말하면 형제와 다름이 없고 서로 알아줌은 친구뿐만 아닐내라,타관에 있던 령그(靈柩)가 호남에서 쫓아오고 붉은 깃발이 바다 모퉁이로 향해간다이 길에 앞서고 뒤처짐을 슬퍼하여 황천에서 다시 만날걸 기약한다,근래에 친구들이 새벽별처럼 떨어져 교유를 회상할 적마다 눈물이 마르지 않더니지금 또 그대를 보내니 슬픔이 그지없는데 이 세상에 마음 통하는 자 다시 누가 있겠나?
府使 張應一,
1599~1676년 조선 현종때 대신으로 여헌 장현광의 아들이다, 자는 경숙, 으로 입암에서 양계공과 함께 공부하고 관직은 공조참의 우승지, 부제학,대사헌을 지냈고 청렴 강직하기로 유명했다,
又, 합천 3년에 남원으로 옮긴 후로 중간에 오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도의로 평생을 흔연히 맡기려 했는데 오늘 유명을 달리하고 홀연 갈라지네, 주관(奏關)엔 청평(靑萍) 기증함을 가장 애석히 여기고 산택에는 자단(紫檀)의 향기가 도리어 애처롭다, 만사 만 짓고 장사에 가지 못하니 옥량(屋樑)에 비치는 찬 달빛에 눈물이 치마를 적신다, 郡守 徐炘
또, - 삼십년을 先子와 친구로 사귀니 소생이 다행히도 자주 승언하였다, 곰을 그린 깃발이 늦게 옴을 방금 한탄하는데 부석(鳧舃)이 가서서 돌아오지 않음을 도리어 놀랜다, 료수(蓼水) 가 정이 있으니 혜택이 흐르고 령상에 구름의 자취 없으니 따르지 못한다, 신선 누각에 좋은 모임은 한낯 꿈이 되었으니 슬픈 눈물을 어찌 현산에 뿌릴것인가? 參奉 이재문,
경개한 높은 자질은 세상에 드문 영걸이요,
문장의 명성은 일대에 무거웠다,
누차 랑서에 있으니 풍채가 움직이고
여러 차례 큰 고을을 다스리니 가송(歌頌)이 자자하다,
선비가 의지할 곳 잃으니 오도(吾道)가 서글프고
나라에 어진 인물 없으니 벼슬아치들이 놀랜다,
나라를 위해 슬퍼하고 또 나의 사사로움으로 통곡 더하여져
영결함에 눈물이 갓끈에 가득참을 견디지 못 한다,
현감 최동언
전에 내가 동래를 다스릴 때
그대도 양산군수로 있어서
연기 달 좋은 밤에 세 갈래 배 띄우고
중양절 어진 때에 해운대에서 술잔 기울였다,
오는 제비 가는 기러기 다 늙었는데
거북과 물고기의 인장(印章)으로 우리 고을에 잠깐 왔다,
옮기고 떠나고 만나는 눈물 중에서
이 이별이 갑절이나 치마를 적신다,
자색 인끈 겨우 관직이 높아지더니
붉은 명정이 홀연히 바람에 펄럭인다,
예순에 비록 한 살이 모자라지만
세 아들이 모두 둘 없는 자질이다,
가야산 고운(孤雲)의 암석이요
광한루 큰 들의 창문이다,
호령계에 명성이 드높았으니
지난 일을 생각함에 눈물이 비오듯 내리네,
府尹 강대수,
젊은 날에 소리값이 금보다 무거워서
처음에 하늘이 큰 임무를 내리라고 했더니
운명이 그뿐이라 벼슬이 겨우 3품에 그치고
운수가 그런가? 나이가 예순을 넘기지 못했다,
휴가를 얻어 귀향하고자 했으나 이미 늦어짐을 어이하리!
끼친 경사로 이제 자손이 번창함을 본다,
빈사(濱死)의 병 때문에 상여 뒤를 못 따르니
어느날 황천에서 이내 마음 말할건가?
현감 최우직(崔友稷)
崔友稷 1600~1657년 본관은 영천최씨 자는 순보(舜輔) 호는 유춘정(留春亭)으로 조부가 임란 경주 서천전투의 17현사의 최인제(崔仁濟)이고 아버지는 최여곤(崔汝崑)이며,입암 장여헌의 문인으로
1624년 생원이 되고 1629년에 문과하여 통훈대부가 되어 홍문관 수찬으로 자인현감이 되었다,
효종8년 1657년 6월 10일에 세상을 하직하니,영천 자양 용산리 골방산에 장사 하였다,
그가 말년에 자신의 만사를 지어며 말하기를" 내 인간 세상 손이 되어 장차 아흔을 드리우니, 나의 삶이 부족함이 아니라, 뉘 있어 어머니를 모시려나"라고 스스로 지은 만사가 있다,
슬하에 3남2녀를 두었으니, 통덕랑 최주원(柱元)과 무공랑 주해(柱海)와 주한(柱漢)이고,사위는 이영위(李英偉)와 이세고(世翺)이다,
세상에 만나기 어려운 게 지기(知己)의 친구인데
일산을 기울이고 만난 때부터 神을 기울였다,
태학관(太學館)에서의 만남은 겨우 몇 달뿐이었는데
구름나무 헤어짐은 몇 년이나 흘렀는고?
자수(紫綏)로 우리 고을에 부임함은 하늘이 준 다행함인데
힌 깃발로 고향에 돌아가니 꿈이지 참이 아니다,
평소의 회포를 누구에게 말할꼬?
이날 상여를 휘어 잡으니 눈물이 수건을 흠뻑 적신다,
參奉 남원인 김지택
그대는 령남에 나는 호남에 살았으며
또 중간에 벼슬하고 하지 않음도 달랐다,
하늘이 뜻한 바 있어 사람이 만나고
천리마가 걸음이 느려 호랑이로 부절을 나누었다,
겨우 검은 잉산이 궁벽한 고을에 부임함을 보았는데
홀연 붉은 깃발로 황혼 길을 떠난다고 알리네
한 고을에 사랑을 쏟아가 사업을 마치니
길에 가득한 老少가 상여를 붙잡고 통곡한다,
牧使 이기발,
오행의 정기가 삼진에 모이니
하늘이 우리나라에 뛰어난 인물을 내려주었다,
남주(南州)의 혜택은 백성들의 피부에 두루 퍼졌다,
예순의 사업이 도리어 꿈을 놀라게 하니
一代의 어진 인물 다시 누가 있는가?
늙은이가 이제 영결 하노니
가을바람에 눈물 뿌리고 홀로 머뭇거린다,
하성 성이관
탁월한 오천의 정공이
산하의 기품을 온전히 타고났다
도량이 넓기로는 고래가 바다를 내뿜고
지조가 깨끗하기는 옥이 못에 잠겼다,
걸출한 재주는 당시의 준걸로 불렸고
풍류는 옛 어진 인물을 계승하였다,
사람을 대함에 신의를 다하였고
내 몸을 지키는 데는 經과 權에 두루 합당하였다
장대한 의표는 성대히 아름답고
너그러운 인품은 따뜻하고 원만하였다,
목마른 까마귀는 저절로 빨리 날지만
절룩거리는 자라는 어찌 걸음을 앞서겠는가?
눈 달 텅빈 산속과 연기 꽃 긴 물가에서
시를 논하던 일은 몇일이었으며 명승지를 찾는 놀음이 몇 해나 되었던고?
온갖 만상은 긴 시구(詩句)에 싣고 갖가지 물건은 짧은 편중(篇中)에 부쳤다,
정밀한 금은 단련하는데서 나오고 아름다운 옥은 갈고 다듬는데 있다,
매양 같이 부귀해지라 했고 항상 천리마를 함께 채찍질할 것을 생각했으나
오르고 가라앉음에 운수가 있고 영화로움과 초췌함이 각기 나누어졌네,
작은 메추라기는 쑥대밭을 날지만,곤어와 붕새는 바다와 하늘을 친다
명성은 一代에 떨치고 큰 고을을 세 번이나 옮겼다,
초나라 늙은이는 안작(安作)을 노래하고 진나라 사람은 폐면(吠眠)을 송축한다,
고향을 바라보니 회포가 아득하고 나라를 근심하니 병세가 위독하다
어찌 한단(邯鄲)의 꿈이 도리어 죽어서 신선이 될 줄 알았던가?
시골 촌사람도 절구 소리 그치고 길가는 나그네도 눈물을 흘린다
고부(皐復)한 넋은 호남 땅이 멀고 돌아가는 혼은 학성산이 외지다,
서로 떨어져 백발노인 되었는데 이번 이별은 황천을 사이했다,
혜자(惠子)가 죽자 장자(莊子)가 자취를 감추고 종자기(鍾子期)가 없으니
백아(伯牙)가 줄을 끊었네,
세상 인심은 얕고 또 엷어 비구름은 업치고 또 뒤친다
사람을 아는 감식안은 순박함을 고루고 향내 나는 휘장은 향초를 사례한다
골짜기 어귀엔 차마(車馬)가 드물고 저자 머리에 술값 던진다
높은 의표는 물과 달을 머무르고 한가로운 감상은 구름 연기가 완연하다
서일(書釰)을 겸하여 넉넉히 서로 지키고 기구를 계승하여 길이 전할 만하다
유택을 바닷가 고을에 정하니 선친의 산소가 새 무덤에 가깝도다
세 아들이 경사스러움을 볼 것이고 일백 복록이 내려짐을 기약한다,
거친 글로 어찌 진정을 다할 수 있으리? 북풍을 대하고 눈물 뿌린다,
하성 조여의
주
1. 안작 = 후한 때 겸포이 독군테수로 있으며 화재가 두려워 밤에 불사용을 금한 법령을 해제하고 물을 많이 준비하고 불을 켜게 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일하도록 해 준 故事,
2. 폐면 = 후한 때 부룡이 회창태수로 있으며 혼정을 베풀어 관리가 백성의 집에 가지 않으니 개도 짖지 않고 잠을 잔다는 故事,
3. 한단 = 한단지몽으로 노생이 한단(지명)에서 道士 呂翁의 배개를 빌려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부귀영화의 꿈을 꾼 고사, 즉 부귀공명이 덧없음의 비유한 말,
4. (고부)한 넋... = 사람이 죽으면 혼백을 붙는다는 뜻으로 옷을 지붕에 던져 올렸음,
료동성 기둥 어느 해에 학이 되어 돌아올꼬?
이르는 곳마다 뛰어난 치적은 뭇 입에 오르고
쌓아온 남은 경사로 세 아들이 자라났다
이제부터 유명을 달리하니
지는 달빛 비치는 빈 들보에 혹 얼굴을 보겠는가?
參奉 정취(鄭聚)
천한 자취가 외람되이 태수와 친분을 맺어
풍류롭게 술 마시고 詩 지으며 몇 번이나 따라다녔던고?
교분이 先子를 좇아 치우쳐 두터우니
은혜가 백성들에 두루 미쳐도 내가 더욱 독차지했다
당수(棠樹)에 성대한 교화를 칭송하는 노래가 막 들리는데
竹林에 새 사당 지음을 놀라서 본다
자애로움은 마땅히 사람의 입에 새겨 지나니
어찌 양양타루비(襄陽墮淚碑) 뿐이겠는가?
남원인 김지백
주
1. 당수 = 당수는 甘棠으로 팥배나무인데 주나라 소공이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쉰곳,
2. 죽림 = 옛날에 군수의 제사를 지내는 곳,
3. 양양타루비 = 진나라 양양태수를 지낸 양우의 선정을 기려 그 지방민이 현산(峴山)에 세운 비로 이를 바라보는 사람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붙혀진 이름,
우리 백성이 복이 없어 나라의 어진 이를 잃었으며
더욱이 이내 몸은 삼천(二天)을 상실했다,
연방(連榜)에 일찍이 이름을 같이 썼고
금헌(琴軒)에 다행히도 부름을 받았다
습가지상(習家池上)에서 때때로 취하고
명월루중(明月樓中)에서 자주 뵈었다
여한을 이제 와서 스스로 보내기가 어려우니
용정(龍亭)의 성대한 모임에 지난날을 저버렸구나,
남원인 진사 방위원
1. 二天 = 북주속사 림장의 친구 청하태수가 림장의 주은에 감동하여 말하길, 인습유 一天 아독유,二天 이라고 했다,
2. 연방 = 진사시험의 연방을 말함,
3. 금헌 = 府使가 있는 곳,
하늘이 어진 수령을 주었다가 다시 빼앗아 가니
우리 고을의 운수가 쇠함을 스스로 슬프한다
公安에는 훗날 사죽(祠竹)이 남았고
현산에 그해 타루비가 세워졌다
조개(早盖)의 영광이 상여 줄로 돌아오고
꽃수레의 행색이 령유(靈帷)로 바뀌었다
교화의 은택이 오로지 우리 집을 향해 두터우니
상여를 잡고 내 사정 울음을 견디지 못할내라,
남원인 진사 김지명
1. 공안 = 지명,
2. 조개 = 검은 명주로 만든 군수의 일산(日傘),
백성 걱정 나라 계책 다 어렵고 위태로운데
다행히도 어진 수령을 이때에 얻었도다
촉군(蜀郡)에서 방금 렴범(廉范)의 은혜를 그리워하는데
뢰양(雷陽)에는 홀연 구순(寇恂)의 자애로움을 잃어버렸다
남루에서 지난해에 모시고 즐기던 일 생각나는데
동곽(東郭)에서 오늘 아침 슬피 울며 송별한다
료수(蓼水)가 공연히 무궁한 한을 흘리니
다시 누가 습가지에서 취한 나를 붙들어 줄꼬?
남원인 察訪 최휘지
붉은 깃발로 남원성에 부임하여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년이 넘었다
관대한 은혜는 곧 동군(東君)의 교화를 볼 텐데
슬프고 바쁜 것은 홀연 예주(豫州)의 백성을 울렸다
촌마을 어진 혜택 젖음이 다시 없는데
쇠하고 천한 몸이 무슨 인연으로 사랑하는 정을 입었던가?
병을 앓아 상여를 잡고 영결하지 못 하고
백발로 남쪽을 바라보니 눈물이 쏟아진다,
남원인 군수 이유형
고문저성(高門著姓)이 오천으로부터 내려왔는데
들어보니 적선의 경사가 집에 이어져 전하더라,
진사에 뽑힘은 참으로 분수 안의 일인데
성랑경운(省郞京尹)은 누구의 곁인고?
남원 백리에 큰 재능을 시험하더니
궁영(弓影) 一朝에 계몽(鷄夢)을 전한다
타관의 령구가 멀리 호령으로부터 돌아와
상여가 이제 울주를 향해 옮기네
거기에 선영이 있는 줄 아니
혼백이 돌아오매 영원토록 온전하리라
늙고 병든 여생이 공연히 눈물 뿌리니
황혼녘 적막한 하늘엔 연기만 자욱하다
황천에서 우리 형장을 볼 터이니
나를 위해 이승의 칠십년을 갚아 주게나,
왕자사부 최동집,
주
1. 성랑경윤 = 소랑은 6조랑관이고 경윤은 경비윤으로 조선의 한성판윤 임,
2. 궁영 = 진나라의 樂廣이 친구와 술을 먹을때 그 친구가 술잔 속에 비친 활의 그림자를 뱀의 그림자로 잘못 보고 병들었가 후에 자세한 사정을 듣고 병이 나았다는 故事,
3. 계몽 = 꿈에 힌 닭을 보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함, (힌 닭 꿈은 꾸지 마세요,)
4. 우리 형장 = 대암 최동집의 형으로 임진란때 대구 팔공산 의병장 최동보를 가리킴,
5. 최동보 = ?~?년 자는 자익(子翼) 호는 우락재(憂樂齋) 본관은 경주이며 임진란때 의병을 일으켜 중부 최인 계부 최계 장몽기 등과 의병을 일으켜,경산.영천.경림.등을 다니며 적을 파악하고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복병 전술로 적을 많이 죽였다, 저서로는 신협일기.가 있고 대구 평천사에 배향되어 중부 계부.등과 함께 향사 되었다,
6. 최동집 = 1586~1664년 자는 진중 호가 대암으로 인조 때 천거로 왕자사부를 제수하여 효종이 왕자 때 가리켰다. 얼마 안되어 물러나면서 쌍봉 정극후를 천거하고 물러났다, 그래서 효종이 왕자 때 스승이 두분으로 대암 최동집과 쌍봉 정극후가 왕자사부가 된다,
두 왕자사부는 양계 정호인과 어린시절부터 절친 했는데, 최동집은 모당선생께 자주 왕래 하면서 청호서당에서 만났고, 쌍봉공은 정호인의 족친이며, 정호인의 어머니 숙인권씨와는 고종간이라 너무나 잘 아는 사이로 청호서당과 입암서당에서 함께 공부했기도 하였고 곤봉공과 쌍봉 형재는 집에 만나는 음식이 있으면 항상 양계를 불러 함께 먹으며 시를 읊조렸다고 한다,
첫댓글 면신례
免新禮가 晩으로 되어 있습니다. 병자호란시 의병장 全湜이 상주사람인 것을 미루어 성창成昌이 아니고 함창 咸昌이 아닐가 합니다.(정화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