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6대 왕, 고종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고종을 독립운동가로 묘사하기조차 한다. 그가 독립운동자금을 비밀리에 대주었으며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려했기 때문에 독살 당한 거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조선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개혁군주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를 조선의 선조, 인조와 더불어 무능하며 권력을 탐한 부패한 군주라고 생각한다. 그를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으려고 그에게 망명을 권했던 연해주의 이상설, 북경의 이회영, 연해주의 이범윤 그리고 왕정복고를 원하였던 의병출신 독립 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그를 독립운동의 총수나 지원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록에 나타나는 그의 언행이나 그의 44년의 치적을 살펴보면 그가 실로 조선을 망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교과서에서 배운 고종에 대한 나의 상식과 고정관념이 깨지는데 많은 세월이 걸렸다.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조선이 망한 것을 일본의 침략과 친일파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하느라 조선이 망한 진짜원인 규명을 소홀이 하였으며 간혹 양심과 양식이 있는 학자들이 연구하여 규명한 사실에 모두들 침묵하였으며 거론하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망국의 주된 원인이 양반 관료 사대부들과 왕에게 있었기 때문에 해방이후 여전히 정치와 학문에서 주도권을 잡은 그 양반 관료 사대부들의 후손들이 그런 사실을 글로 써서 조상을 포함한 양반들의 위상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서 일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역사 공부는 화해나, 성찰을 통하여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라와 민족을 이끌지 못하고 패 가르기와 조선 시대의 당파 싸움과 같은 권력투쟁을 심화시키는데 기여를 하고 있다.
조선의 왕 중에 외국군을 자국의 영토로 끌어들인 왕에는❮조일전쟁❯을 치룬 선조가 있다. 그는 자국의 백성을 치기 위해서가 외국군을 불러들인 것은 아니었으므로 한 나라의 군주로 서 무능해서 영토를 지키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럴 수 있다고 봐줄 수는 있다. 그러나 고종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1882년 임오년에 13개월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한 구식군인들이 한 달분의 봉급미를 받으면서 모래가 섞인 것에 분노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왕은 쿠데타의 원인과 이유를 파악하지 않고 자신의 왕권의 유지를 위하여 천진에 있는 김윤식과 어윤중을 통하여 청나라 군인을 불러 들였다.
청나라 군인 3,000명은 7월 7일 남양을 거쳐서 12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왕은 마건창에게 자국 군인을 진압토록 허락하여 구식군대 군인들 170여 명이 체포되고 11명이 참수를 당하게 만들었다. 또한 포도청으로 송치된 손순길, 공치원, 최봉규 등 3명을 효수하였고 이진학 등 3명은 유배시켰다. 뿐만 아니라 대원군파로 불리는 조정의 관리들을 대대적으로 처형하거나 유배시켰다.
결과적으로 청나라는 대원군을 쿠데타의 배후 세력으로 보고 그를 납치하여 북경 동남쪽에 위치한 보정부 유폐시켰다. 일본은 7월 3일에 1,500명의 군인을 급파하여 제물포에 주둔시킨 후, 하나부사로 하여금 조선에 제물포조약을 맺도록 강제하였다.
쿠데타가 끝이 나고 왕은 민씨 세력과 함께 재집권을 하였으나 청과 일본의 간섭에 시달리게 되었다. 특히 청나라는 3,000명의 군인을 그대로 주둔시켜서 조선의 내정•외교 문제에 사사건건 간섭하여 자신들의 종주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나라의 주권이 침해를 당하거나 말거나 조선의 개화와 근대화 운동이 퇴행하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과 민씨 집단의 안일무사와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빴다.
고종이 실제로 쿠데타의 원인제공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는 본질, 핵심을 외면하고 민겸호와 김보현 등 부패한 관료들에게, 호시탐탐 재집권의 기회를 노리는 대원군에게 쿠데타의 책임을 전가한다. 선혜청 당상이었던 민겸호와 전 선혜청 당상이었던 김보현 등이 가렴주구를 해서 모은 재물이 뇌물로 고종과 민비에게 바쳐졌다는 사실이 분명한데도 우리는 그에게 망국의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참으로 관대한 역사요, 참으로 충성스런 조선의 백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정부군이 황토현전투와 황룡강전투에서 패하고 마침내 4월 27일(음력) 전주성이 함락되자 기겁한 고종은 예전 청나라의 횡포와 위세를 다 잊어버리고 독립국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왕으로 재임하는 동안 두 번째로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한 나라의 왕이라는 자가 그렇게도 무지하고 무능하고 무자비할 수 있을까? 군주가 자기 백성을 죽이기 위하여 외국 군대를 끌어들인다는 것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것인데 그는 자국민을 진압하고 살상하기 위하여 두 번이나 외국 군대를 끌어 들였다. 실제로 자기 왕권 유지를 위하여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는 탐욕스런 왕을 개혁군주나 독립운동가로 추앙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군사부일체의 충성 멘탈리티가 어떤 것인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고종은 두 번째 청군 요청으로 조선을 망국으로 몰아갔다. 조선의 청군 요청을 받은 청나라는 일본과 맺은 ❮천진조약❯의 약조대로 파병 사실을 일본에 통고하였다. 청의 통고를 받은 일본은 얼씨구나 좋다고 쾌재를 부르며 그들의 야심대로 군대를 파송하여 5월 6일 인천에 도착하였고, 조선의 지배권을 차지하고자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무능한 왕을 둔 조선은 그대로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터가 되었고 밑바닥의 백성들은 전쟁으로 지옥이 된 세상에서 온갖 고통과 수모를 당하였다.
박종인은 그의 책 ⎾매국노 고종⏌에서 고종이 재위 기간에 한 것은 ❮치국강병❯이 아니라 대원군의 피땀 흘린 10년 개혁을 다 혁파하여 시간을 거꾸로 돌렸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매관매직과 뇌물의 총 지휘자이며 최종 수혜자로서 조선을 멸망의 길로 몰아간 자요. 종국에는 나라를 팔아서 자신과 왕실의 안녕을 보장받은 매국노라고 하였다.
아래 글은 고종이 자기 경호를 위해 만든 “무위소”로 말미암아 대원군이 8도 방위를 위하여 만든 지방과 중앙 군사제도가 급속도로 위축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종을 위한, 고종의 군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부국(富國)하지 못했고 강병(强兵) 하지 못했다. 뒷장에서 설명하겠지만, 그때 나라 꼬라지는 거지였다.
똑바로 된 거지 나라 지도자라면 궁궐 따위는 뒤로 넘기고 부국을 최우선 국정지표로 삼았어야 마땅하다. 조선은 임진왜란 후 자그마치 300년 동안 경복궁을 폐허로 방치하고 살아온 나라가 아닌가. 고종은 그런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지도자가 아니었다.
고종은 그 무위소에 필요한 경비는 아낌없이 지원했다. 1874년 신설된 무위소 병력에 필요한 군모와 군복, 주거지 지원은 호조의 1순위 업무였다. 1876년 6월 군기시(무기고) 병력에게 지급할 갑옷 8부 가운데 2벌은 무위소에 지급했다. 군기시는 선혜청으로 갑옷과 투구 구입비용을 빌려 이를 메꿨다.
부국을 2차 순위로 돌리더라도, 강병은 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고종이 만든 무위소는 A부터 Z까지 고종을 위한 고종의 병력이었다. 그 병력을 메꾸기 위하여 중앙과 지방군은 군복을 살 돈이 없어서 헤매는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강병이 될 리가 만무했다.
대원군이 구축해놓은 지방과 중앙 군사는 급속도로 위축돼갔다. 1875년 11월 15일 경기감사 민태호는 “(군사 요충지인) 인천, 부평, 통진에 군수물자를 조달할 방법이 전무하다”고 보고했고, 영의정 이최응은 “총융청의 화약과 군기시의 총기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보고했다. 1년이 지난 1876년 10월 29일 훈련도감이 고종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훈련도감 군사 수가 전보다 많이 줄어 각 영에 입직할 군사를 배정하기 어렵습니다. 남영( 南營, 창덕궁 돈화문 앞에 있는 부대)에 입직한 군사 40명 중에서 10명을 줄이려고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한 달 뒤 훈련도감에서 또 보고가 올라왔다.
“본국의 군사 수효가 전보다 감소하여 지방 각 영에 입직할 인원을 배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지방이든 중앙이든, 군부대에 하루하루 부대 정원을 채울 수가 없어서 근무가 불가능하다는 보고였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곤혹스러운 보고에 전군 통수권자인 고종은 아래와 같이 대답하였다.
“알았다.”
보고만큼이나 비현실적이고 곤혹스러운 대답이었다. 대책은 전무했다.
(⎾매국노 고종⏌ 93~94쪽)
1874년은 고종이 왕위에 오른 지 11년째 되는 해이며 대원군을 물리치고 친정을 시작한지 2년째 되는 해이다. 당시 그는 23세의 젊은 왕으로 부국강병의 원대한 꿈을 꿀 수 있는 나이였으나 자기의 권력유지와 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는 일체 무관심하였으며 이익에는 계산이 주도면밀하였다. 그는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하여 1874년에 왕궁에 친위부대인 ❮무위소❯를 만들어 지방과 서울의 군부대를 축소시켜 조선팔도의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약체가 된 조선은 1876년 일본과의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강제로 맺게 되었으며 자국 군대의 쿠데타인 ❮임오군란❯과 자국 농민들의 거사인❮동학농민전쟁❯의 진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해졌다. 그리고 16년 뒤에 조선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고종은 자기 권력 강화를 위하여 상대적으로 국가의 국방력을 약화시킴으로 조선 멸망을 가속화시킨 인물이다. 그는 1907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의 불법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장소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헤이그 특사의 출현으로 당혹한 일본이 왕에게 특사 파견에 대한 추궁을 하자 그는 밀사를 파견한 적이 없다고 완강하게 부인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특사 파견을 인정하지 않는 고종에게 '독립국가임을 당당하게 주장하려면 전쟁을 선포해서 일본과 싸워 이기라'고 조롱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지도자가 힘든 것은 주어진 권력만큼의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책임을 지지 않고 권력만 누리는 지도자는 국가와 사회의 악의 축이며 파멸의 길이다.
2021.5.11.,화
우담초라하니
참고도서
박종인 저 ⎾매국노 고종⏌,와이즈맵,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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