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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시는 삶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 라는 사상은 동학의 3대 교주 의암 손병희의 사상이다. 물론 그가 스승으로 모신 수운 최제우의 핵심 사상인 시천주(侍天主)에서 발원한 것이다. 종교학자 류병덕은 최제우의 이 시천주,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양천주(養天主), 손병희의 각천주(覺天主) 및 체천주(體天主) 사상을 각각 존재철학, 생성철학, 실천철학 및 사회철학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천주는 내 안에 모시는 하느님을 길러 나가는 것을 말한다. 각천주는 내 안의 하느님을 깨닫는 것이며, 체천주 또한 내 안의 하느님을 체득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사상은 시천주로 돌아간다. 하느님을 모셔라, 하늘에 계신 하느님만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모셔라, 라는 뜻이다. 밥을 먹을 때도 내 안의 하느님께 고하고, 잠을 잘 때도 내 안의 하느님께 고하며, 말을 할 때도 내 안의 하느님께 고하고 한다. 나는 24시간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며 살고 있다. 행주좌와어묵동정을 하느님과 함께 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다.
이 ‘모신다’는 것에 큰 뜻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사회에서 목격하는 모든 현상의 근원에는 이 모시는 삶이 결여되어 있다. 두려움이 없어진 것이다. 염치는 물론, 반성, 회심, 참회가 없다. 불교에서 옛날에는 참괴(慙愧)라는 말이 있었다. 참은 내 안의 양심에 부끄러운 것을 말한다. 괴는 진리 앞에 부끄러움을 말한다. 인간은 날 때부터 부끄러움이 있었다. 빛을 보는 순간, 우주에 던져진 존재로서 한없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던져진 독자(獨子)로서의 부끄러움. 이 부끄러움은 홀로된 인간과 그 인간이 어울려 사는 사회에 하나의 법칙이 되었다. 그 부끄러움이 양심이 되고, 진리의 세계로 회귀하는 회심이 된 것이다. 그것이 철든 인간의 모습이다. 철들었다는 것은 천혜(天惠, 하늘이 준 은혜)의 부끄러움을 놓지 않고 사는 것을 말한다. 결국 이 시천주, 양천주, 각천주(체천주)는 인간의 완전함을 되찾아 가는 길이다. 태어났을 때의 그 순수함, 어른이 되어서도 잃지 않고, 하늘이 부여한 인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문명은 이 모시는 삶을 애써 지워나가고 있다. 과학과 국가와 자본주의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과학은 신의 세계에 도전하고 있다. 유전자의 암호는 풀렸고,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창조해내고 있다. 인간은 신이 된 것이다. 오만해졌다. 그리고 신은 없다고 자신만만해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여기에 하나의 들꽃이 있다. 이 들꽃의 유전자를 다 해독하여 그 들꽃의 비밀을 다 분석했다고 치자. 그리고 그 꽃의 색깔이 어떤 유전자 배열을 통해 나타나는지 파악했다고 하자. 그러나 왜 노란색의 유전자 배열이 그렇게 되어 있는지, 누가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있는가. 그 유전자는 누가 만들었는가. 나아가 그 꽃의 노란색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들꽃은 왜 거기에 있는가. 그리고 그 들꽃이 우리에게 전하는 마음을 우리는 읽을 수 있는가. 과학은 여전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음을 우리에게 알려줄 뿐이다.
오늘날 국가는 모든 분쟁의 원천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강대국들 간의 무역 전쟁은 국가라는 단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인구 몇 백 만의 국가와 몇 억의 국가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스포츠 경기를 하는 것이 타당한가. 국가라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지역의 권력화를 구축한 것이 국가라는 단위다. 이 국가의 장벽으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마음대로 가는 것도 제한된다. 날아다니는 새들에게 국경이 있을까. 국가는 각각 권력의 집합체가 되었다. 대화와 양보와 타협보다는 힘의 크기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역사가 하루 이틀이었던가. 그리고 이제는 국가가 신이 되었다. 투표를 통해 국가의 신성성을 스스로 구축한다. 헌법은 경전이 되었고, 국민은 국가의 신도가 되었으며, 세금은 그야말로 십일조가 되었다. 하늘의 두려움마저 잃고 인간 생명을 좌지우지한다. 자본주의는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알 만큼 알고 있다.
2. 부처로서의 존재
과학, 국가, 자본주의의 맹점은 인간의 진정한 이상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구를 점령한 호모사피엔스가 오랜 기간의 진화를 거듭하여 구축한 이 문명이 이제 인간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온갖 상상력과 지적인 모험을 통해 쌓아온 문명은 이제 인간 자신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현생 인류가 나름의 피와 땀을 흘려 정교한 기계와 화려한 도시와 인간주의적인 정치체제를 만들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그리고 집단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내면은 분열되고 파편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 존재의 의미가 쇠퇴하고 잊혀져 가는 것에 원인이 있다.
인간으로서 태어남은 <성서>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하나의 존재가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것의 증명은 간단하다. 나와 지구상에서 같은 존재는 없다. 설사 내가 한쪽 팔이 없는 신체의 소유자라고 하더라도 이 세계에는 나와 같은 존재는 없다. 쌍둥이조차도 지문이 같지 않다. 나와 같은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나야말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가 아닌가. 그것이 바로 부처다.
물론 불교에서 부처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이 부처라는 성품(불성)을 알고(견성), 그 불성에 맞게 행동하는 것(성불)에 이르러야 된다. 역사 속에는 그러한 분들은 수없이 다녀가셨다. 그러니 현애상(懸崖相,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미리 내어 내가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다.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수행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석가모니불은 인간이다.
그런데 그처럼 부처됨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대중이다. 부처를 이룬 사람이 부처로서의 언행을 하게 되면 삼척동자도 그 분이 부처임을 알 수 있다. 그 반대로 부처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도 또한 간단하다. 깨달음의 세계를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 하지 않는 사람, 말은 그럴 듯한데 행동이 부처가 아닌 사람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있다. 가르침을 이해하지만, 그 얻은 뜻을 표현 못해도 부처의 행동을 하는 사람은 부처인가.
그것이 바로 원불교에서 말하는 처처불상 즉, 곳곳이 부처라고 하는 생각의 단초가 된다. 이미 모든 존재는 부처로 살고 있다. 우리가 삶의 비교우위를 버리기만 한다면, 그 어떤 존재도 부처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부처처럼 행동하지 못하는가. 우리 일생의 한번쯤은 부처였던 때가 있었다. 어린이였을 때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겠지만 어떤 욕심으로부터도 자유로웠던 그 때 부처였던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부처였으므로 하늘의 식량인 천록(天祿)이 어머니로부터 나온다. 젖이다. 이 젖을 떼고 서서히 자라면서 인간은 욕망에 물들기 시작한다. 그 욕망에는 소유욕, 권력욕, 명예욕 등이 있어, 자아를 둘러싸고 견고한 욕망의 성(城)을 구축한다.
그러니 반대로 부처가 되는 길 또한 어렵지 않다. 욕망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아마 이 지구 혹은 우주를 소유한다고 해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아의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몸 어딘가에 자아가 있을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고정불변한 자아는 없다. 그것이 무아(無我)다. 우리는 떨어져 각각의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서로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연기(緣起)의 존재로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3. 모든 존재를 부처로 모시는 삶
최시형은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을 하늘처럼 모셔라, 라고 설한다. 소태산 박중빈이 처처불상 사사불공(곳곳이 부처, 일마다 불공)이라고 외친 것 또한 같은 의미다. 부처는 존재로서의 부처를 말한다. 석가모니불처럼 이상적인 부처 또한 이 존재로서의 부처를 깨우쳐준 부처다. 우리가 욕망과 욕망의 근원인 무명(無明, 우리의 마음이 밝지 못한 것)을 타파하면 누구든지 이상적인 부처가 될 수 있다.
박중빈은 한 발 더 나와서 모든 존재가 부처이므로 부처로서의 삶을 살면 된다고 한다. 내가 무명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 무명을 타파해가는 삶과 더불어 부처와 같은 삶을 지향한다면 얼마든지 부처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함께 사는 것이다. 내가 부처임을 알고 실천하는 것에는 바로 내가 대하는 모든 존재를 부처로 알고 부처로 모시는 삶을 사는 것과 연동되어 있다. 혼자 산다면 내가 부처든 중생이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전에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대화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내가 돼지면 상대를 돼지로 보고, 내가 부처면 상대를 부처로 본다. 여기에는 약간의 상대성이 있어 여전히 설득의 요소가 남아 있다. 나는 부처인데 당신은 왜 그렇게 자신을 인식하지 않는가, 라는 점이다. 처처불상은 그러한 상대성마저 끊어버린다.
내가 불상에 불공을 하듯이 살아있는 존재인 부처에게 불공을 하는 것이다. 불공은 진리에 대한 종교적 행위다. 자신의 삶의 한계상황을 불공을 통해 돌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부처님을 모시고 공양하는 행위다. 공양은 물건으로부터 마음, 몸의 모든 행위를 말한다. 이 공양의 행위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위대한 존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행위는 세계 모든 종교의 공통된 속성이다.
처처불상은 이러한 행위가 존재로서의 모든 부처에게 향하는 것이다. 고정된 상(像)으로서의 상징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실재 불성을 지닌 모든 존재에게 향하는 고귀한 행위인 것이다. 인간이 하늘로서 존중받는 행위를 타자에게 올리는 것이다. 즉,
‘나는 부처님인 당신의 모든 존재에 대해 한없는 존경과 신뢰와 사랑을 올립니다. 또한 당신과 나는 무한한 은혜의 관계로서 당신이 베푸시는 그 은혜로 인해 나의 존재의 당위성이 증명됩니다. 당신이 없이는 나의 존재 실상과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나의 존재의 근원이십니다. 살아 있는 부처로서의 당신에게 나의 모든 것을 정성을 다해 올립니다. 받아주소서.’
라고 행동하는 것이다. 어떤 누구든, 어떤 사물이든 그 존재가 간직한 비교 불가능한 절대적 존재 말하자면, 오직 이 지상에 하나뿐인 부처로서의 존재인 타자는 이로써 타자로서가 아닌 나의 존재 그 자체가 된다. 그것은 오늘날 현대철학의 주제인 환대이기도 하다. 나의 존재의 다른 모습인 타자에게 올리는 행위가 바로 사사불공이다.
인간소외를 불러온 문명 그 자체는 우리를 소외시키지 않았다. 욕망에 도취된 우리의 영혼이 스스로 부처임을 망각함으로써 그 미망(迷妄)에 의해 또한 존재로서의 부처인 이웃을 타자로 대하고, 그 타자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그 욕망과 타자가 무한 반복된 것이다. 사람은 하늘인 동시에 부처다. 나 자신과 나의 이웃을 부처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흐르는 강물처럼 무한한 은혜의 연쇄로 이어져 있는 거대한 하나의 우주적 부처임을 바로 이 자리에서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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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주자의 居敬과 동학의 侍天主와 원불교의 처처불 사사불공이 같은 뜻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세미나가 열렸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