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호 2023년 4월] 뉴스 본회소식
“인간은 갈 곳 있기에 방황하는 존재”전영애 모교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여백서원 원장
수요특강
“인간은 갈 곳 있기에 방황하는 존재”
전영애 (독문69-73)
모교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여백서원 원장
괴테 ‘파우스트’ 강의에 깊은 공감
여백서원 확장 ‘괴테 마을’ 조성 꿈
3월 22일 오전 7시 마포 본회 장학빌딩 2층. 수요특강 연사인 전영애 동문이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안에서 꺼낸 것은 다양한 버전의 ‘파우스트’와 괴테 번역서들. 커다랗고 묵직한 영인본 원본과 손때 묻고 색인이 빼곡하게 붙은 옛 책까지 ‘동문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손수 강연장에 펼쳐 놓았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괴테가 1832년 3월 22일에 죽었습니다. 저는 어제(3월 21일) 태어났습니다.” 괴테 연구에 평생을 바친 그다운 서두였다. 전 동문은 최근 경기도 여주에 지은 ‘여백서원’에서 괴테 전집 번역에 홀로 매진 중이다. 괴테의 시와 소설에 대해 무궁무진 할 말이 많은 그지만 이날은 ‘파우스트’에 집중해 ‘파우스트의 21시간 완본판 공연’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기가 막힌 책입니다. 저는 40년을 읽고 번역했고요. ‘파우스트’를 모르시는 분이 없지만 다 읽으셨어도 이상하죠. 연극 대본이거든요. 자연과학, 철학, 논리학이 많은 경험에서 하나의 공리를 추출하는 것이라면 문학은 거꾸로입니다. 1만2,111행으로 풀어낸 것, 이 한 문장입니다.”
장장 60년간 괴테가 쓴 ‘파우스트’를 압축하는 문장 하나를 화면에 띄웠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통상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번역으로 익숙한 문장이다. 전 동문은 독일어 ‘streben’이 알고 하는 ‘노력’보다 몰라도 생겨나는 ‘마음속의 솟구침’을 뜻함에 주목해 번역했다고 말했다.
“자세히 보면 비문이죠. ‘지향이 있다’는 건 갈 곳이 있다는 것이고, 갈 곳이 있으면 똑바로 가면 되는데 왜 방황을 할까요? 이 문장이 주는 위로가 굉장히 큽니다. 방황하지 않는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편안하고 값싸게 ‘괜찮아, 잘 갈 거야’ 위로 받으면 아마 잊어버릴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방황하는 건, 의식하든 안 하든 내 마음 속에 갈 곳이 있고, 솟구침이 있기 때문이란 거죠. 문학은, 글쎄요. 복숭아 같아요. (전체를 요약하는) 이 문장은 복숭아 씨인데, 시고, 달고 한 과육들도 문학의 육질이죠.”
‘파우스트’의 주인공 파우스트는 ‘하늘에선 가장 아름다운 별을, 땅에서는 모든 최고의 쾌락을 맛보고 싶어 하는 인간’이다. 온갖 학문을 섭렵하고 회의에 빠진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하고 영혼을 팔아 벌어지는 일들이 줄거리다. 이어 그는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는 문장을 띄웠다. “악인과 선인을 너무 쉽게 구분하는 우리와 달리 인간의 선근(善根)을 본 것, 포용력이 어마어마하다”고 소개했다.
“‘파우스트’의 소재 자체는 대단히 독창적이지 않습니다. 흥부 놀부전같이 오래 전승된 얘기, 기독교권의 권선징악 얘기죠. 파우스트라는 욕심 많은 인간이 살았고, 영혼을 팔아 24년간 복락을 누리고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인데, 괴테는 스위치를 하나 딱 틀어서 우리 시대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얘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 스위치가 뭐냐면, 24년간 내기를 하게 만들어요. 파우스트가 만족해서 ‘스톱’ 할 때까지 메피스토펠레스가 잘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파우스트’가 1만2,111행이 됐죠. 항상 가져도 모자라고 부족한 현대인을 200년 전에 앞서서 본 거예요.”
2부만 5막짜리인 ‘파우스트’의 완본판이 독일에서 공연된 적 있다. 전 동문은 그 공연을 이정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갔다. 2부 2막에 등장하는 인조인간 호문클루스는 현대의 AI와 개념이 같다고 소개했다. “괴테가 200년 전에 생각했던 인조인간은 정신의 정수입니다. 육신이 없어요. 200년 전엔 이해받지 못하리라 생각했을 텐데 우리 시대에 훨씬 더 시사성을 갖게 됐죠.”
전 동문은 “‘파우스트’는 연극 대본인 만큼 역할을 나눠 같이 읽으면 정말 재밌다”고 했다. “우리 시대 서원을 만들어보고 싶어 지었다”는 여백서원에서 정기적으로 ‘파우스트’ 독회가 열린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는 일반인에게 개방한다. 1만㎡ 뜰에 모교 도서관 앞 하수구에서 발견한 느티나무 싹을 비롯해 버려진 나무들을 옮겨 심었고, “젊은 날 괴테의 집과 정원 등을 꾸며 ‘괴테 마을’을 만들어 내겠다”는 계획까지. 한 사람이 실현해 가는 웅숭깊은 꿈에 객석에선 연신 감탄사만 흘러나왔다.
질의응답 시간엔 선친 전우순(정치47-52) 동문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60대 후반부터 91세까지 혼자 사시면서, 90세 가을까지 매년 에베레스트에 가셨습니다. 드러누우면 자녀들에게 짐 된다며 45kg 몸에 20kg 배낭 지고, 5000원짜리 조끼 입고 날아다니셨죠. 한학자도, 서예가도 아닌데 말년에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도산서원, 소수서원 원장을 하셨던 증조부의 문집을 국역하셨어요. 남의 나라 글은 줄줄 읽는 제가 한문을 몰라 못 읽는 게 안타깝다면서요. 서원에서 육필을 보실 수 있어요. 아버지 호가 바로 ‘여백(如白)’이십니다.”
강연 후에도 참석자들은 전 동문이 가져온 책들을 들추어 보느라 한참을 머물렀다. 한 동문은 “다가오는 주말 여백서원에 가기로 했는데 마침 강연이 열려서 왔다. 어디서도 이런 강의는 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소감을 전했다. 쏟아지는 방문 문의에 전 동문은 “해외 일정으로 서원을 자주 비우니 미리 연락해 달라”고 당부했다. 본회는 이날 참석자들에게 전 동문이 번역한 괴테의 ‘서·동시집’을 증정했다.
괴테 수요특강 여백서원 전영애 파우스트
박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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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호 2022년 8월] 오피니언 동문칼럼라이너 쿤체 상·이미륵 상을 연이어 받고
라이너 쿤체 상·이미륵 상을 연이어 받고
전영애
독문73졸
모교 독문과 명예교수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한 시상식
1년 넘게 준비한 축사 듣고 감동
과분하기만 한 큰 상 둘을 독일과 한국에서 연이어 받는 일이 얼마 전에 있었다. 감사의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으려니와, 상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해 보는 기회도 되었다. 한국에서 받은 ‘이미륵 상’도 독일인들 그리고 독일과 관련이 많은 분들이 주시는 것이어서 그랬지만, 특히 독일에서 받은 ‘라이너 쿤체 상’이 그러했다. 여러 해 전에 독일에서 비슷한 상을 받으면서도 많이 놀랐던 터라, 내가 겪은 수상식 행사의 진행을 조금 전해 보고자 한다.
상을 무슨 이름 붙은 날이나 어떤 기회에 주는 것이 아니고, 오롯이 단 한 사람을 위하여 하룻저녁을 다 비워 사람들이 모였다. 오래 놀랍도록 성심껏 준비되는 그 자리는 그럼으로써 매우 뜻깊은, 성대하고 격조 높은 문화의 장(場)이 되었다. 행사의 중심은 물론 축사와 감사의 답사인데, 특히 축사(라우다치오)의 경우가 놀라웠다. 수상자의 업적을 잘 평가할 수 있는 전문가에게 의뢰되는데, 1년쯤 전에, 심지어 2년 전, 적어도 반 년 전에는 섭외를 하는 것 같았다. 수상자의 감사의 말 역시 축사와 상 자체의 정당성을 담보하고 그럼으로써 상의 권위도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 문학상의 경우에는 중요한 작가연구 자료가 된다.
예전에 독일 바이마르에서 ‘괴테 금메달’을 준다는 소식과 더불어, 축사하는 분으로 내가 세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괴테 연구가의 한 분이 정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라서 곧바로 옥스퍼드로 달려간 일도 있었다. 독일 괴테학회의 시상식 전통에 대한 짐작이 좀 있는지라, 그분이 일면식도 없는 미미한 나에 대해서 무얼 쓰자면 얼마나 고심하실까 싶어, 독일에서 나오지 않은 책들을 한 보따리 꾸려 들고 간 것. 갔다가 나는, 유서 깊은 퀸스 칼리지에서 과분한 동료 대접만 누리고 돌아왔는데 시상식에서 나의 연구를 꿰뚫는 말씀을 듣고 있자니, 이분이 대체 나의 책을 얼마나 읽으신 건가 싶어 그저 입이 벌어졌다.
이번 ‘라이너 쿤체 상’ 시상식에서도 축사를 듣는 내내 나는 정말이지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바이마르의 유서 깊은 안나 아말리아 도서관 관장을 지내신 분이 하셨는데, 내가 쓴 책, 논문을 얼마나 찾아 읽으셨는지, 한국어를 알 리 없는 분이 나의 ‘파우스트’ 번역에서의 난관 극복 방법을 예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꺼내어, 먼 극동과 독일을 연결하며 독문학자로, 번역가로, 시인으로, 시와 학문을 “아름답게” 아울러온 생애를 이야기하고 독일어로 쓴 나의 시 한 편을 인용하여 적절하게 해설하고는, “수상자에게는 수상한 것을, 시상자인 욀스니츠 시에는 이런 수상자를 가진 것을 축하”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욀스니츠 시는 우리나라 태백 같은 아주 작은 옛 광산 도시인데, 그곳 출신인 큰 시인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들어 좋은 시인들에게 시상함으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우리 충무시가 윤이상 기념사업들로 세계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알려진 것과 비슷한 사례다.
그런데 독일에서 나온 내 책들을 다 읽은 사람은 축사를 하신 분만이 아니었다. 시상식에 앞서 현지 도서관에서 고등학생들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걱정하며 갔다. 그런데 복도에서부터 한국 관련서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학생들을 만나니 더욱 놀랐다. 학생들이 내 책을 두루 찾아 읽고 몇 가지 주제를 뽑아서 그에 따라 각자 우선 작품을 하나씩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나중에 시상식장에 전시되었다. 진행도 자기들이 해가는데 질문 수준이, 경험하지 못했을 만큼 높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평생에 걸친 나의 주제를 뽑아내고 그 주제로 작품까지 만들었는데.
시상식 자체는 더욱 놀라웠다. 대체로 독일의 저명한 시인들이 받아온 상이라 나는 많이 떨면서 갔는데, 큰 홀이 매우 아름답게 꾸며졌을 뿐더러 수상자가 한국인이라고, 가야금 연주를 넣었고 선곡까지 세심했다. 윤이상, 황병기 곡에 우리 가곡 ‘동심초’가 더해졌다. 시장이 직접 베를린 한국문화원을 찾아가서 부탁했다고 한다. 이어진 뷔페 음식까지 한식 반, 독일식 반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도 홀 뒤쪽에 마련된 식사를 하며, 또 다른 한 켠에 마련된, 쿤체 시인과 나의 책들이 놓인 판매대 앞에서 사인을 해주며, 시민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 독일문화원에서 열린 ‘이미륵 상’ 시상식에서 역시 나의 책들 전시대가 있었고 비슷하게 성의껏 진행되었다.
또한 놀라웠던 것은 다음날의 신문기사였다. 기자야 겨우 나의 ‘감사의 말’을 들었겠건만, 나 자신도 미처 표현 못 한 핵심이 담겨 있었다. 모든 것이 진정한 관심과 성의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쳐준 이런 따뜻하고 큰 박수를 어찌 잊겠는가. 평생의 격려이다. 그것에 조금이나마 값하는 사람이 되려, 있는 힘 다 쏟으며 살 수밖에 없다. 상의 본디 의미는 아마도 그런 것일 게다.
괴테 라이너쿤체상 명사칼럼 이미륵상 전영애